‘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이것은 구지가의 한 구절로 금관가야를 비롯한 6가야의 건국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이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금관가야의 수로왕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김해 김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김金씨이며 약 1,069만 명으로 국내 인구의 21.5%를 차지합니다. 5명 중 1명이 김씨일 정도로 상당히 많은 수를 점유합니다. 김씨는 크게 김알지의 신라계와 김수로왕의 가야계로 나누어지는데 수로왕계의 김해 김씨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의 신라 김씨 계통입니다.
그렇다면 수로왕으로부터 시작되는 김해 김씨는 어떤 성씨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김해 김씨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9%에 해당하는 445만 6천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전체 김씨 중 무려 41.7%가 김해 김씨입니다. 김해 김씨에서 김해 허씨가 분적하고, 또한 김해 허씨에서 인천 이씨가 분적하게 되는데, 모두 김수로왕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1964년부터는 기존 종친회를 확장하여 ‘가락중앙종친회’로 하고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 모든 수로왕의 후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해 김씨는 크게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려 충정왕 때 인물인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김녕군파金寧君派), 동생인 김익경金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감무공파監務公派) 그리고 고려말 김관金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가 있는데, 모두 김유신의 직계 종파입니다. 3개파 이외에도 다수의 계파가 있고, 또한 이들 아래에는 각각 여러 개의 파로 다시 나누어져 있는데 모두 합하면 총 148개파가 됩니다.
이외의 계통으로는 사성賜姓
김씨와 귀화한 김씨가 있습니다. 사성 김씨로는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인 장수 김충선金忠善의 우록 김씨友鹿金氏와 김성인金誠仁의 함박 김씨咸博金氏가 있고, 귀화한 김씨로는 당나라에서 귀화한 영양 김씨英陽金氏와 명나라에서 귀화한 태원 김씨太原金氏가 있습니다.
제주도의 고高·양梁·부夫 삼성三姓과 신라의 박혁거세, 김알지와 마찬가지로 김해 김씨의 시조인 가야의 김수로도 건국신화가 전해져 옵니다. 김수로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인터뷰】
수로왕릉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춘추제례
를 올리고 있으며, 종친과 시민들이 함께하는 큰 행사로 2천여 명 이상이 참여한다고 합니다.
김수로왕은 김해의 금관가야를 건국한 왕입니다. 어떻게 가야를 건국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처럼 수로왕은 아홉 명의 족장들인 구간九干의 추대에 의해 금관가야의 초대 왕이 됩니다. 그리고 알에서 나온 나머지 다섯 사람은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상주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의 왕이 됩니다.
그런데 김수로왕과 더불어 꼭 알아야 할 인물이 왕비 허황옥입니다.
【인터뷰】
김해시 구산동에는 아주 신비로운 석탑이 있습니다.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탑인데,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재질로 이루어져 있고, 신기하게도 이 돌 위에 닭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다를 건너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는데, 어부들이 파도를 막아 준다고 하여 석탑을 깨어 가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수로왕릉에 있는 태양 무늬와 쌍어문雙魚紋을 통해 아유타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왕릉과 숭선전 등을 중수하였음을 알리는 ‘중건신도명비’의 이수螭首 부분에 수로왕비가 인도 출신이라는 것을 알리듯 인도 사원에서 볼 수 있는 태양 무늬가 새겨져 있고, 왕릉 바로 앞 납릉정문納陵正門 양쪽 문 위에는 흰색의 석탑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의 흰색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는 쌍어문雙魚紋이 있습니다. 이 쌍어문雙魚紋은 인도 아유타국의 용왕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쌍어문은 인도에 가면 힌두교 사원 정문마다 조각되어 있고 생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문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김해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문양입니다.
또한 수로왕비릉 바로 옆에는 수로왕의 탄생 신화가 깃들어 있는 구지봉龜旨峰이 있습니다. 수로왕비릉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쪽으로 쭉 내민 봉우리 형상이 거북의 머리 모양과 같다 하여 구지봉이라 합니다. 그리고 정상에는 아주 오래된 고인돌이 있는데, 그 위에 한석봉이 쓴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는 한자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수로왕은 멀리 떨어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를 어떻게 왕비로 맞이하게 됐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김수로왕은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후로 맞아들이게 되고, 10남 2녀의 자녀를 둡니다. 첫째는 2대 거등왕이 되고 둘째와 셋째는 왕비의 요청에 따라 김해 허씨가 됩니다. 나머지 7왕자는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인도로 출가하여 하동 칠불사
에서 성불했다고 합니다.
김해의 금관가야를 건국한 김해 김씨는 6세기 신라에 편입되면서 중요한 시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후 김해 김씨는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수로왕이 건국한 김해의 금관가야는 5세기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급속히 쇠퇴하게 됩니다. 결국 서기 532년 10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고, 금관가야의 왕족은 신라의 진골로 편입하게 됩니다. 구형왕의 세 아들 중 막내 김무력은 장군이 되어 신라의 영토 확장에 큰 역할을 합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지배를 확정 지었던 관산성 전투에 큰 공을 세우고 후에 최고 관등인 각간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은 신라 왕족인 만명부인과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망국의 왕족과 신라 왕족의 만남이었지만 신분을 뛰어넘어 두 사람은 혼인을 하게 됩니다.
또한 김서현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건 전우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바로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입니다. 왕이 될 운명이었지만 아버지의 폐위로 권력에서 밀려난 왕족과 망국의 왕족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는데, 훗날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과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김유신은 수로왕 이후 김해 김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여동생을 태종무열왕 김춘추에게 시집보내고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루어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된 유례없는 인물입니다.
이처럼 김해 김씨는 망국의 왕족이었지만 신라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고, 고려 시대에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며 위세를 떨치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비롯한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외 어떤 인물들이 더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①김일손
조선 시대 인물로는 김일손이 있습니다. 김일손은 영남 사림파의 중심 인물로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쓴 사관입니다. 강직한 그는 사초史草에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게 됩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진나라 말 숙부인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글인데, 선왕인 세조의 단종 시해를 중국의 사례로 비판한 글입니다. 이것을 빌미로 훈구파는 사람파를 공격했고, 그 결과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지고, 그의 스승인 김종직마저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는 등 영남 사림파는 몰락하게 됩니다. 중종반정 이후 김일손은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고 목천의 도동서원과 청도의 자계서원에 배향됩니다.
②김홍도
조선 최고의 화가라 불리는 단원檀園 김홍도는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7, 8세 때부터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세황姜世晃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고 합니다. 스승 강세황의 추천으로 일찍이 도화서 화원이 되었고, 영조의 어진과 정조의 초상을 그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김홍도는 회화의 모든 장르에 능하였지만,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③김원봉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의열단 단장인 약산若山 김원봉
은 독립운동가 중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인물입니다. 경남 밀양 출신인 김원봉은 1919년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 출신 13명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합니다. 이후 의열단은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 등 맹렬한 활동을 벌이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해방 후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게 됩니다. 일각에서 김원봉이 월북한 이유는 악덕 친일 형사인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큰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수로의 선조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 북방 초원 지역에서는 강성한 흉노가 대제국을 세우게 됩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는 흉노의 공격에 시달렸고, 한 고조 유방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후에 한나라 7대 황제인 한 무제에 이르러 또 흉노를 공략하게 되는데, 이때 한국사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흉노 좌현왕인 휴도왕의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된 사건입니다. 포로가 된 흉노 왕자는 궁궐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에 한 무제의 눈에 띄어 그의 측근이 됩니다. 이 흉노 왕자가 바로 김일제金日磾입니다. 그 후 김일제는 망하라莽何羅의 반란을 막은 공으로 ‘투후秺侯’로 봉해지고 사후에는 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 곁에 묻힐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후손 중에는 왕후(전한 11세 원제元帝의 비 효원왕후)도 배출되고, 김일제의 현손玄孫인 왕망
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습니다. 왕망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 신新을 세웠지만 16년 만에 몰락하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위험한 처지에 몰린 일족은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의 문무왕 비문과 중국 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김현일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일제가 한나라에 포로로 잡힐 때, 동생 ‘김윤’도 함께 잡혔는데,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 김씨 왕의 시조인 김알지이고, 김윤의 후손은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라고 합니다. 실제로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는 기마민족의 유물이 대거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청동제 솥인 동복銅鍑은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제사 의식을 치르기 위해 말에 싣고 다니던 제기입니다. 이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가야와 신라의 김씨는 북방 초원의 제국, 흉노의 후예가 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내용은 흉노의 시조가 단군조선의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려 말 이암이 저술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의하면 흉노의 시조는 열양의 욕살 ‘삭정索靖’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가야의 수로왕과 허왕후의 세기적 만남을 간직한 김해 김씨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