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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학을 완성한 진정한 스승, 주회암朱晦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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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유가(儒家)의 인물들이 흠이 많으나 주회암(朱晦庵)은 흠잡을 데가 없느니라.”(도전 4편 14장 3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회암은 유도의 종장이 되느니라.”(도전 4편 8장 4절)



동방의 천자국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천하 제국으로 군림하던 당唐나라도 현종 때에 이르러 국운이 쇠하기 시작하였다. 지방 절도사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화되어 안녹산, 사사명의 난을 거쳐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의 제齊나라에 의해 멸망의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결국엔 황소의 난으로 붕괴되기 시작해, 907년 황소의 부장인 주전충에게 멸망당했다. 이후 5대 10국이라는 중국 최후의 대분열의 시기를 겪고 후주後周의 노장인 조광윤이 공제恭帝로부터 중국 역사상 최후로 선양 형식을 밟아 카이펑開封에 수도를 정하고 송宋을 건국하였다. 하지만 송태조 조광윤에서 송태종 조광의로 황위를 승계하는 과정에서 동생이 형을 살해했다는 의혹이 퍼졌다. 송나라는 과거제도 확립으로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였으나, 과도한 문관 대우로 군사력은 최약체였다. 대진국(발해)을 멸망시킨 거란契丹과의 대립에서 패하여 매년 공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기도 했다(전연의 맹약). 6대 신종 때 농민보호와 대지주 억제를 목표로 한 왕안석의 신법과 이를 반대하는 사마광의 구법간의 다툼은 격렬해 국력이 기울어졌다. 이 대립은 후에 주자에 대한 최후의 위기인 ‘경원慶元의 당금黨禁’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8대 황제 휘종은 예술적인 재능은 뛰어났지만, 정치는 별로인 인물로 요遼를 멸망시키기 위해 금金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후 과정에서 허술한 대응과 금에 대응하기 위해 요의 잔당과 손을 잡은 것에 금의 분노를 사게 되어, 1127년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 흠종, 상황 휘종이 북쪽으로 잡혀갔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하고 이로써 북송北宋은 멸망하게 되었다. 당시 근왕병 모집을 위해 남쪽에 있던 강왕康王 조구趙構가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여 고종高宗이 되니, 이를 역사에서는 남송南宋이라 부른다(1127년). 금과의 대립에서 남송의 이순신이라 불리는 주전파인 악비岳飛의 활약이 있었다. 이때 유능한 관리였지만, 정권유지를 위해 반대파를 억압하고 악비를 옥사시키는 한편, 금나라에 신하의 예를 취하고 세폐를 바치게 한 대표적인 간신인 진회秦檜가 있었다. 이후 고종은 송태조의 후손인 조신趙昚(태조의 차남인 조덕방의 6세손으로 수안회왕 조자칭의 아들)에게 양위하니 이가 남송 최고의 군주 효종이다. 당시 금나라 세종이 즉위하여 중원의 남북에 현군들이 즉위하면서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당시 남송의 일련의 상황은 훗날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조선 사회와 비슷한 형국이었다.

남송의 건염(建炎:송나라는 화덕火德으로 건국된 나라라 하여, 송의 재흥을 의미하는 의미로 연호를 이렇게 썼다) 4년(1130년) 9월 15일 정오 푸젠성福建省 남검주南劍州 우계현尤溪縣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송朱松, 어머니는 축씨祝氏로, 3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을 빛을 발한다는 의미인 희熹라고 했다. 훗날 주자朱子로 존칭하게 되는 천년 가량 동아시아 사상계를 지배하는 신유학의 완성자 주회암

 

(주1)

 

 

선생이 바로 그다.
 

거짓된 학문(僞學)의 수괴, 주자를 참해주소서


1196년 남송 영종 경원慶元 2년 상소 하나가 올라온다. 정확히 말하면 탄핵문. 작성자는 태상소경 호굉, 올린 이는 감찰어사 심계조이며 탄핵 대상은 당시 환장각대제 겸 시강侍講, 주희였다. 이른바 주희를 대표로 하는 도학자들이 ‘거짓 학문僞學’, ‘위학僞學의 당’, ‘역당逆黨’등의 죄명으로 중앙정부에서 축출되거나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주희 계열의 정치가나 학자의 임관이나 저서를 유포하지 못하게 금지시킨 이른 바 ‘경원慶元의 당금黨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 탄핵문은 남을 모함하려는 이들에게는 꼭 참고해야 할 모범이 될 만한데, 여기에서 주희가 범하였다는 여섯 가지 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희는 거주하는 고장에서 생산되는 좋은 쌀로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고 오래된 쌀로 봉양하고, 어머니가 이를 불평해도 고치려 하지 않으니, 불효막심한 인간이다. 둘째, 뇌물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지방 관리로 임용되는 것은 기꺼이 응하면서도, 정작 황제가 임명하는 중요한 관직은 계속해서 거절하니 불충한 인간이다. 셋째, 그는 자신의 악한 친구 채원정(蔡元定 채침의 아버지,1135-1198)을 승진시키기 위하여 황실의 장지와 묘제에 관한 기이하고 옳지 못한 주장을 하니, 조정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인간이다. 넷째,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애쓰면서 주희의 무리들을 기용하고자 하였던 조여우는 주희를 황제에게 강의하는 시강에 기용함으로써, 주희가 황제의 신임을 얻게 만드는 간교한 술수를 부렸다. 하지만 주희는 그 자리를 짐짓 사양하는 척함으로써 결국 조정을 모욕했다. 다섯째, 조여우가 죽자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였는데, 주희만은 100여 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그를 추모하였다. 여섯째, 주희는 사욕을 채우기 위해 지방 학교를 이용했고 공자의 화상을 불상으로 대체시키고 공자의 화상이 사지가 잘린 채 방치되도록 하니, 그는 사회의 건전한 습속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인물이다. 그 외에도 주희는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고, 가족을 다스리고, 여러 사람들을 다스리는데 실패했고, 타인에 대한 봉사나 인격적 성실성에서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주희가 유공劉珙의 딸과 혼인하여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고, 비구니 둘을 유혹하여 첩으로 삼았으며, 남편과 사별한 주희의 맏며느리가 임신을 했고, 주희의 아들들이 소를 훔치기도 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러나 탄핵문의 내용은 터무니없고 무모해, 주희를 폄하할 수 있는 사항이라면 진위 여부를 고려치 않고 무엇이든 수록하고 있었다. 탄핵문의 일부는 진실에 부합하는 사항이 있기는 했다. 그가 관직에 임용되는 것을 거듭 사양하고 옛 문헌을 탐구하고 죄인들을 처형했다는 것, 황실의 장지에 관해 조정 대신들과 논쟁을 벌였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유공의 딸이 아닌 유면지劉勉之(1091-1149)의 딸과 혼인했고, 주희와 그 사위 황간黃幹(1152-1221)은 매우 가난했다. 사리사욕을 탐했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도 분명한 사실적 근거가 제시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주희는 이로 인해 1196년 12월 26일 시강侍講의 직위와 사록관司祿官(도교 사원의 관리나 실제 임지에 부임하지 않아도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송대에 시작한 관리 우대제도로 주희는 이 사록관을 통해서 학문 연구에 정진했다)에서 해임되었다. 그의 나이 67세. 이로써 현실 정치 영역에서 주희의 경력은 끝났다. 그의 제자이자 친구 채원정은 유배지에서 사망했고, 주희는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야 했다. 여일이라는 인물은 주희를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마저 올렸고, 주희는 지금 내 머리는 언제나 풀칠을 해 놓은 양 목 위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예부터 성인聖人이 타살당하는 일은 없다며 의연하게 대처하기도 했다.

경원의 당금은 본질적으로 종실 재상인 조여우(趙汝愚 1140~1196)와 외척 한탁주(韓侂胄 ?~1207) 사이에 일어난 권력 쟁탈전 성격이 짙었다. 즉 영종 옹립에 공이 컸던 이 두 사람은 권력 장악의 야심을 드러냈다. 한탁주는 북송 때 신법당에 가깝고, 조여우는 구법당으로 주희의 도학파 쪽 인물에 가까웠다. 이에 한탁주가 정치적 라이벌인 조여우와 그가 후원하던 주희를 비롯한 도학파 인사들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경원의 당금 사건을 일으켜 학문 자체를 근절시키려 했다. 여기에 호굉胡紘이 주희에게 가진 사적 원한도 함께 작용했다. 그는 관직에 오르기 전 무이산武夷山(주희의 고향인 복건 북부 숭안에 있는 풍광이 뛰어난 산)에 있던 주희를 방문했다. 주희는 모든 이들에게 대접하듯 거친 밥과 채소로 대접했는데, 호굉은 자신에게 닭과 술을 대접하지 않음을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주희는 호굉을 잘 알지도 못하였고 그를 모욕하고자 한 것도 아니며, 너무 가난하여 술과 닭을 대접할 여유가 없었다. 친한 친구에게 조차도 검소한 식사 이상을 대접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굉은 자신이 받은 대접에 기분을 몹시 상해 하며, 나중에 쓰디쓴 보복으로 되갚아 준 것이다.

주희의 제자들은 그를 떠나갔고, 심지어 배신하기까지 했다. 그의 학문을 담론하기를 꺼렸으며, 그의 사후 장례에 참석하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 주희를 괴롭힌 것은 정치 사상적 탄압인 ‘경원의 당금, 위학의 금’만이 아니었다. 내부의 적, 즉 질병과도 싸워야 했다. 40대 후반부터 시작된 다리의 질환과 눈병이 심해져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노쇠하고 쇠잔한 육신을 이끌고 내우외환의 괴로움을 겪고 있던 주희는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나에게 불행과 곤궁을 피하라고 충고하지만, 나는 다만 굳건하게 서고자 할 뿐이다.” 라며 죽는 순간까지 제자를 가르쳤고, 학문 정립에 매진했다. 60대 후반에 착수한 [예서禮書]의 편집은 평생 숙업이었다. 그의 명을 받은 제자 채침蔡沈은 서경의 집전을 뒤에 완수하였다. 주자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자기 자신의 불행보다, 제자들과 함께 쌓아올린 자신의 학문이 단절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물러나 은둔한다는 의미의 둔옹遯翁이란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다혈질로 성미가 급했고 타협을 모르고 고집스러웠으며 감정 기복이 심했던 주자는 한때 더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들기도 했으나, 강철 같은 의지로 만년의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다.

1120년 3월 8일 상반신은 매우 뜨거워 부채를 부쳐도 열이 내리지 않고 하반신은 매우 차가워서 설사가 멈추지 않는 상황에서도 주희는 범백숭范伯崇(염덕念德)에게 편지를 써서 [예서]의 필사를 부탁하였다. 3월 9일 새벽 자신의 장례에 대해서 <서의書儀>와 <의례儀禮>를 두루 참고하겠다는 채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71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둔 주희는 그해 겨울 11월에 건양 당석리唐石里의 대림곡大林谷에 안장되었다. 이에 주희의 제자인 황간黃榦은 “주공과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찬란한 문화를 진작시키기 위해, 하늘이 이토록 어질고 현명하신 분을 내시어 도를 온전히 전하게 하셨도다.”고 했다. 경원의 당금은 1202년 가태 2년 2월 9일에 가서야 해금 조치가 공포되었고, 이미 사망한 주희의 관작이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관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文’이어서 주문공朱文公이라 불렀다. 또한 학문적 업적과 인품을 기려 극존칭인 ‘자子’를 써서 주자朱子라고 했다. 그의 학문을 주자학이라고도 하며, 고려 말 회헌晦軒 안향安珦과 백이정白頤正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 되었고, 주자학을 익힌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후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풍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일본에 전래되기도 했다.
 

위대한 스승, 주자의 삶


금나라의 압박에 밀려 양쯔 강 이남으로 쫓겨 와 있던 남송 조정에서 주희의 아버지 주송은 금과의 굴욕적인 화친에 반대하다가, 화친파에 밀려 푸젠성福建省 요주饒州 지사로 좌천되었으나 주송은 지방관에 취임할 의사가 없어서 태주台州 숭도관崇道觀의 관리직을 얻어 건안에 칩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이때 주자가 태어났다.

주희는 어린 시절부터 천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정도로 조숙했다. 청나라 때 왕백전王白田이 편찬한 [주자연보朱子年譜]에는 4살 때 아버지가 하늘을 가리키며 “보아라! 저것이 하늘이란다.”라고 하자, 보통 아이들과 달리 주희는 하늘 위는 무엇이냐고 되물어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5세 때 소학에 입학하였고, 가장 일찍 읽은 책은 [효경孝經]이라고 한다. 효경을 본 뒤에, 나무 위에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쓰기도 했고, 친구들과 놀 때도 모래 위에 팔괘八卦를 그려 어릴 적부터 노력하고 정진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후 정계를 은퇴한 아버지 주송은 명석한 외아들(위의 두 형은 어려서 죽고 9살 아래 여동생은 어린이) 주희를 통해 자신이 못다 한 학문의 꿈을 이루려 했던 것 같다. 그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북송의 정자학程子學, 이른바 도학道學을 주희에게 전수하였다. 주송은 정자 문하의 고제인 양시楊時(구산龜山)의 제자 나종언羅從彦(1073-1135)에게서 도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47세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주희는 정학程學을 익힌 ‘건안의 삼三 선생(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서 학문을 익히게 된다. 여기에서 주희는 고전의 한 구절을 자신의 삶의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학문적 특성을 배우게 되었다. 삶의 방식이나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이 시기의 주희는 자신이 가려는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 근본에는 학문을 과거공부와 같은 입신영달立身榮達이나 허명 추구가 아닌, 나 자신의 삶을 위한 절실한 문제로 받아들인 사고방식(위기지학爲己之學)이 깔려 있었다. 주희는 또한 불교와 도교를 비롯한 다른 학문에도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와 함께 유교 경전 독서에 집중하였고, 19세의 봄에는 수도 임안臨安에서 열린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진사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당시 합격자 평균 연령이 30세인 점에서 이른 나이에 합격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학문적 이상과는 배치되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사대부로서 영예와 책무였던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무엇보다 생활의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치밀함과 탁월한 암기력을 지닌 그가 330명 중 278등이라는 그다지 우수하지 않은 성적으로 합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금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이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강경론을 주장하는 그의 답안이 높게 평가될 수 없었던 배경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줄곧 주희를 괴롭힌 주요 문제가 되었고, 실제 50년간 네 명의 황제를 섬겼는데 지방관으로는 9년, 조정에 섰던 것은 단 40일이었다. 그 외에는 사록관을 청하여 칩거하면서 학문에 몰입하였다. 이 무렵 주희는 스승인 유백수(이름 면지勉之)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유씨와 사이에서 3남 5녀의 자녀를 두었고, 부인은 주희가 47세 때 남편보다 먼저 타계하였다. 아들들은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고 모두 음보蔭補(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훈이나 음덕에 의해 특별히 보임됨)로 관직에 올랐다.

1153년(소흥紹興 23년) 24세의 주희는 천주泉州 동안현同安縣 주부主簿로 70세에 은퇴하기까지 긴 관리생활을 시작한다. 부임하러 가던 중 아버지와 동문인 연평延平 이동李侗(1093~1163, 연평의 스승은 나종언羅從彦이고, 그는 정자程子 문하의 고제 양시楊時의 제자다)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이를 통해 북송의 도학과 심법心法에 관한 깊은 통찰을 전수받아 불가의 선학禪學을 비롯한 ‘잡학’을 유학 속에 승화시키게 된다. 여기서 주희는 정좌靜坐 수행법과 같은 정적靜的인 존양存養 공부의 바탕 위에, 강우講友 장남헌張南軒(이름은 식栻: 1132-1180)의 사상과 교유하면서 얻게 된 동적動的인 찰식察識(살펴서 깨달음) 공부를 가미시켜, 동과 정을 융합하는 자신만의 정론定論을 구축하였다. 이후에도 쉬지 않고 사색과 저술활동을 통해 이를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행정 관료로서 주희는 타고난 빈틈없는 성격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세금 징수에서도 철저한 고시와 함께 체납하는 일이 없도록 했고, 관리나 상인이 농민의 토지를 매수하거나 경작권을 빼앗은 일에 철저히 대항하기도 했다. 이는 주희가 얼마나 집요하고 강직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친구 장남헌은 주희에게 ‘당신은 평소 남을 훈계하여 고치려 들기만 하며, 남을 틀렸다 하고 자신을 옳다고 하는 면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당신을 꺼려하여 의문점이 있어도 물으려 하지 않으며, 아첨하는 자가 많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이가 적습니다. 이처럼 성격이 치우친 것을 성찰하지 않으면 아마 언젠가는 유폐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충고하였다. 훗날의 경원의 당금 때의 일도 이런 강직한 성격에서 초래한 면도 있다. 또한 그의 친구 여조겸 역시 주희에게 ‘적을 만들어 승부하기를 좋아하며 온화한 기상이 부족하다고’ 했다.

동안현에서 임기를 마친 뒤 29세에 모친 봉양을 구실로 사록관을 청하여 임명된 후 오로지 집에서 독서와 저술과 제자 교육에 힘썼다. 이 당시 연평 선생에게 얻는 학문적 성취를 천천히 반추하며 자신의 학문 정립에 매진하였다. 40대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으로는 모친이 세상을 떠나고, 부인과 사별하고 옛 친구인 위섬지가 죽는 등 행복하지는 않았으나, 학문적으로는 가장 충실했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에 사서四書에 대한 집주와 편집이 끝났고,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 교정,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등 축적된 에너지가 한꺼번에 분출된 듯이 중요한 저술들이 이 무렵에 집중되었다. 당시 남송의 여러 학파들과 두루 교유하며 온화한 성품의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최고의 성리학 입문서인 [근사록近思錄

 

(주2)

 

]을 편찬하게 된다. [근사록]은 북송의 ‘사자四子(주렴계, 명도, 정이천, 장횡거)’

 

(주3)

 

의 저술이나 어록에서 발췌한 문장을 항목별로 정리한 책이다. 주희의 저술활동을 보면 일단 사자四子의 편찬 주석→사서四書의 주석→오경의 연구로 이행하고 있다. 신유학, 송학宋學, 성리학의 완성자인 주희는 종합의 천재로 그 사상적 전거에는 이런 북송 오자 같은 선인들의 연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여조겸의 주선으로 신주(信州: 장시성江西省 상요시上饒市)에 있는 아호사鵝湖寺에서 같은 도학의 계승자이면서 학문적으로 대립하던 육구연陸九淵(호는 상산象山,1139~1192, 심즉리心卽理를 주창 양명학에 영향을 줌) 형제와 만나 3일간 학문하는 방법 등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사상적 체계를 더욱 선명하게 정립해 간다.

이후 남강군 지사로 부임하여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주렴계周濂溪를 현창하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중건하여 인재양성에 힘쓰기도 했으며(이 백록동 서원을 본떠 훗날 조선 중종 때 주세붕周世鵬은 안향을 제향하는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세운다), 기아에 허덕이던 절동折東 지역(오늘날 안휘성安徽省 및 저장성浙江省 지역에 있던 열한 개 현)에 파견되어 가뭄과 수해에 따른 기근대책으로 사창社倉제도의 실시를 건의하였고, 탐관오리를 탄핵하기도 했는데, 이게 뒤의 경원의 당금 사건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주희의 삶은 늘 현顯적인 면에서 정치와 현실에 참여하는 모습과 은隱적인 면으로 산림에 거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는 모습이 공존하였다. 아무튼 주희를 통해 이전에 있었던 모든 학문적, 사상적 연구가 집적되었고, 이것들이 통합 융합 숙성되어 다시 한 번 그를 통해 개혁적이고 새로운 학문의 기틀이 세워졌다. 이는 모든 시냇물이 하나의 소沼로 모였다가 다시 거대한 강으로 나가는 것과 같았으므로, 역사에서는 그를 신유학의 집대성자 또는 완성자라고 평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에게 새로움이란

 

(주4)


신유학의 집대성자, 완성자 주희에게 있어 새로움이란 무엇이었을까? 사실 주희가 새로운 철학적 개념을 고안해 낸 것은 아니었다. 미지의 땅을 탐험하기 보다는 익숙해져 있는 땅을 걸어갔다.(述而不作) 하지만 선배 유학자들의 사상과 다른 사상들을 자못 새로운 그 무엇으로 변화시켰다. 우선 주희가 세운 새로운 기록들을 간단하게 보자. 그의 저술, 주석, 편저 등은 80여 종에 달하고 쓴 편지는 2000편, 대화록은 140편에 달한다. 한 사람의 대화록으로는 중국 역사상 최대 분량이다. 다른 신 유학자들보다 많은 467명의 제자를 지도했고, 3개의 정사精舍(조용히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를 세웠고, 21곳의 서원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경원의 당금이 있기 전 조정 관료들의 부도덕하고 타락함을 조심하라는 충언을 담은 상소문은 역사상 가장 긴 상소문이었지만, 주변의 만류와 좋지 않은 점괘를 보고 올리기를 포기하였다고 전한다.

주희는 세 가지 영역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집필과 경서체계 확립, 유가 철학의 확립, 그리고 도통道統을 세운 일이 그것이다. 주희는 우선 오경五經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육구령陸九齡(주자와 학문적으로 대립한 육상산의 형)이 “정밀한 경전 해석과 철학적 사색은 마음을 질식시킬 뿐”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그는 치밀한 문헌 고증을 했다. 주희는 아마도 글씨를 매우 빠르게 써내려가고 사고가 대단히 명석하고 체계적이었으며 각종 문헌 내용들을 암기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전과 관련한 가장 중요하고도 혁신적인 업적은 바로 1190년에 사서四書를 한 데 모아 묶은 것이다. 주희가 사서를 확정하면서 유교의 기본 원리 연구에서 체계적인 방법론을 정하고 오경을 대신하여 사서가 유학 사상의 정통적 권위를 지니게 되었으며 학교 교육 뿐 아니라 관료 선발 시험의 기본교재가 되기도 했다. 주희는 사서의 주석에 40년 동안 몰두하여 작업이 마무리되었을 때에는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을 정도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대학大學]의 주석을 다듬는 데 몰두했다고 한다. 특히 대학은 가장 주의를 기울인 것으로, 대학 경문은 공자의 말이 분명하다고 할 정도였다.

 

(주4)



 

철학 방면에서는 ‘이理’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고 마름질했다. ‘하나의 사물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理가 있다.’고 하였고, 하늘과 땅이 존재하기 이전에도 이理는 있었다고 말하며 다양한 각도에서 이理개념에 접근하였다. 또한 인仁의 개념을 다듬고 마름질 하여 “사람의 마음이 갖추고 있는 본래적인 덕성이며 사랑의 이理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주희는 인을 사랑의 이로 보면서 나무의 뿌리나 수원에 견주었는데, 구체적으로 작용하기 전의 인仁은 의로움, 예의바름, 지혜로움을 포함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작용하게 되면 동정과 연민, 곧 측은해 하는 마음이 공경과 공손함, 겸양과 순종, 옳고 그름의 판별 등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고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위대하신 상제님께서 이 백성들을 내리시니 무엇을 그들에게 주셨는가? 의義와 인仁이다. 오직 의와 인은 상제님의 법칙이다’라고도 했다.

마지막으로 도통 개념은 1189년에 집필, 편찬한 [중용장구中庸章句 서序]에서 사용하였다. 도통은 도의 정통적 전수 계보로, 기본적으로는 철학적 계승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유교 경서에 대한 태도 및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연구 작업과 연결이 된다. 즉 주희가 사서를 진작시킨 의미도 사서는 도를 체득하기 위한 길 또는 방법을 제공해 주며, 도의 전체적인 윤곽을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주희는 도통을 요순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보다 훨씬 이른 배달 시대의 인물인 복희씨와 신농씨로 해서 요,순, 우, 탕, 문, 무, 주공과 공자, 맹자 그리고 주돈이, 정호, 정이로 이어지는 도통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나 태호 복희씨를 맨 앞에 놓은 것은 주돈이가 비록 복희씨를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태극과 시획始劃 팔괘를 한 인물이 바로 태호 복희씨임을 알았기에 주희는 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도통 맥에는 주희 자신을 집어넣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상과 같은 주희의 행적과 사상을 살펴보면, 그는 단순한 종합가가 아니라 공자와 마찬가지로 혁신가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위정 편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옛 것을 찾아 익혀서 새로운 것을 깨닫는 사람이야말로(溫故而知新), 가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可以爲師矣)” 주희는 실로 그런 인물이었고, 위대한 스승이기에 ‘주자朱子’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시대를 역주행한 조선의 주자 우암尤庵 송시열 VS 민족사를 바로잡으려 한 미수眉叟 허목
*상제님께서 “미수(眉叟)야, 우암(尤庵)을 잡아 오너라.” 하고 외치시니라.(도전 4편 124장 10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길 “ 허미수가 중수한 성천(成川) 강선루의 일만 이천 고물에는 녹(祿)줄이 붙어 있느니라.(도전 5편 184장 2절)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부터 시작된 참혹한 7년 전쟁은 조선 주자학이 그 순기능을 다했다는 경고와도 같았다. 시대는 이제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방의 거유 율곡 이이 선생도 임진왜란 전 ‘지금은 묵은 제도를 개혁해 새롭게 하는 경장更張의 시기’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선조를 이은 광해조 때까지도 우리는 분명 변화할 수 있었지만, 시대를 역행하는 인조의 왕위 찬탈 극은 우리 민족사의 시계바늘을 사대모화事大慕華로 돌려 버렸다. 금나라의 후신 청나라에 의한 정묘, 병자의 양란은 당시 절대적 위치를 점하고 있던 주자학이 상대적으로 내려와야 함을 경고했지만 인조 이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西人 노론老論은 이런 흐름을 거부했다. 오히려 주자학을 강화하면서 수구사상인 예학을 강조하였다. 이는 북송시대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을 보는 듯 했다. 신권臣權 중심의 정치를 통해 양반 지주층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송시열 등의 서인 노론들과 군주권을 강화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민본주의를 주창한 윤휴, 허목 등 남인들의 견해가 충돌한 것이다. 결론은 노론의 승리였다. 이러한 당쟁에서는 자기 진영의 견해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되었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면 살아남지를 못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다행히 주자 뒤에 나서 학문이 어긋남이 없다”고 말을 할 정도로 주자의 학문을 존숭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주자학이 정치에 적용될 때 어긋남이 너무 컸던 것이 송시열의 비극이었다. 이는 다양한 모든 학문을 포용한 주자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지켜내지 못한 시대적 비극이었고, 더 나아가 조선 사회 전체의 비극이었던 것이다. 사대부라는 특정 계급의 이익만을 도모했던 송시열은 동성동본을 금지시키도록 했다. 송시열이 이끈 예론의 승리로 인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고루한 조선의 모습이 이때 형성되었다.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것만 정도正道이고, 다른 생각들은 사도邪道라 여겼던 그가 과연 주자의 모습을 올바로 답지한 것인가? 남인 소생 여인(희빈 장씨)의 아들이 원자가 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목숨을 걸었고 결국 그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 그의 노론은 모든 다른 의견을 물리치고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일당 전제를 계속하였다.

흔히들 송시열이 북벌론자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덕일은 그의 책에서 우암이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증오한 것은 맞지만 실제로 북벌을 추진할 의사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조선이 힘을 길러 무력으로 청을 정벌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청과 국교를 단절하자는 명분적 북벌론, 제한적 북벌론이었다. 즉 말로만의 북벌론이고, 내부 체제 강화를 위한 구호적 북벌론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효종은 실제 청을 정벌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효종의 재위기간은 군비확장과 북벌을 위한 준비로 채워져 있었다. 효종의 갑작스런 급서가 아니었다면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서인인 우암과 예송禮訟 논쟁(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상례喪禮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한 사건)을 벌였던 남인의 핵심 인물이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다. 그는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어서 호를 미수眉叟라 하였는데, 주자학을 중시하던 당시의 조류와 달리 원시유학原始儒學인 육경학六經學에 관심을 두었고 도가적道家的인 성향도 깊었으며 불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특이한 개성을 보인 인물이었다. 허목은 1659년의 1차 예송논쟁(기해己亥예송)으로 정치적 패배를 당한 후에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는데, 그가 삼척부사를 지내는 동안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세워 해수 범람의 피해를 막아냈다는 이야기는 그의 도력을 상징하는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허목은 1674년의 2차 예송논쟁(갑인甲寅예송)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다시 조정에 나와 대사헌과 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한 후 물러나 경기도 연천에서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쓰며 은거하다가 1682년 8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미수 허목이 1670년대에 쓴 [동사東事]라는 역사서는 미수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사]는 단군세가, 고구려세가, 백제세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 역사 첫머리가 단군조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민족의 시원역사인 배달 신시시대까지 소급하여 중국의 역대 제왕과 어깨를 견주었다고 주장하면서 상고사 계통을 확립하였다. 또한 숙신, 예맥, 말갈 등의 백두산 북쪽에 있던 족속들 역시 단군의 후손임을 인정하여 20세기 초 최남선의 불함 문화론에 영향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미수 허목의 [동사]는 조선 후기 자주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지닌 학자들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주며 우리 역사 정통성 복구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암 이후 정권을 잡은 노론의 교조화된 주자학은 도도하게 조선 후기 사회를 장악했다. 그 마지막 모습은 무력한 국권 피탈이었다.
 

쑥대밭이 된 사대 모화사상의 소굴, 만동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천하의 난국을 당하여 장차 만세(萬世)의 대도정사(大道政事)를 세우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 와야 하리니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光緖帝)에게 응기되어 있느니라.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된 인연은 송우암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비롯되었느니라.” 하시니라.(도전 5편 325장 2절-5절)

* 임자(壬子 : 道紀 42, 1912)년 7월 3일에 태모님께서 경석을 데리고 걸어서 청주 만동묘(萬東廟)에 가시어 9월 2일까지 날마다 치성을 봉행하시니라. (도전 11편 31장 1절)



만동묘의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약자로 ‘만 번을 굽이치고 꺾어져도 반드시 동쪽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즉 중원대륙을 가로지르는 황하를 빗대어서 모든 근본, 열매 결실은 동쪽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만동묘가 세워지게 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사대모화사상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만동묘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사당으로 우암 송시열의 유지로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출병을 결정한 만력제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의종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개인 사당이다. 당시는 청나라의 치세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다. 사대는 청나라에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이미 망한 명을 섬기는 두 마음의 전형이고, 조선의 왕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이미 죽고 없는 암군暗君이었던 명나라 황제를 섬기는 두 마음을 엿보게 한다. 이 노론 세력은 훗날 경술국치의 국망을 주도한 세력이고,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세력으로 변신하고, 광복 후 그 어떤 청산 작업도 없이 그대로 현재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만동묘가 있는 화양동 계곡은 본래 청주군 청천면 지역으로 황양목이 많아 ‘황양동’이라 하다가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주자의 무이 구곡을 본 떠 이곳에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암은 화양계곡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절경을 화양구곡이라 불렀다. 화양동 서원은 우암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등이 세웠는데, 후에 노론의 본거지이자 유생들의 소굴이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하였다. 만동묘를 찾았다가 만동묘 지기에게 봉변을 당한 흥선대원군은 훗날 정권을 잡고, 만동묘에 소굴을 튼 고루한 유생의 적폐를 개혁하기로 한다. 이른바 서원철폐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만동묘를 철폐할 구실로 경복궁에 대보단을 세우고 명태조와 신종, 의종의 지방과 기타 물건들을 모두 대보단 경봉각에 갖다 두었다. 그 후 유생들이 만동묘를 재건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했으나 실패했는데,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명성황후와 외척인 여흥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잡자 1874년(고종 11년) 부활하였다. 후에 국권을 피탈 당한 뒤에는 일제에 의해서 제사가 끊기고 쑥대밭이 되었다가 최근에 복원을 하는 중이다. 화양계곡 곳곳에는 우암의 자취가 남아 있으나 거의 대부분이 편협되고 주체의식을 상실한 사대모화의 흔적들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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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주희의 자字는 원회元晦, 후에는 중회仲晦라고 하였으며, 호號는 회암晦庵이고 주자朱子는 존칭이다. 주희에게 자를 지어준 이는 젊은 날의 스승인 유자휘劉子翬(병산屛山)인데 이는 주역의 명이明夷괘 상전象傳의 ‘회장晦藏을 사용하고 있지만 현명함(用晦而明)’에 의거한 것이다. 이는 이름인 “희喜”의 반대개념으로 정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주자는 [발반현보자서跋潘顯甫子序]에서 “이를 축하한다는 뜻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무는 뿌리를 어둡게 하여 봄의 광채를 갈무리하며 사람은 그 몸을 어둡게 하여 신명神明을 살찌운다”고 적고 있다. 이 ‘회晦’는 결코 암우를 의미하는 게 아니고 마음 깊숙한 곳을 뜻하며 거기에 빽빽하게 내실이 저장되어 있어야만 밖으로 발산된다는 게 병산의 의도였다고 한다.

주2.
모두 14권으로 1175년 순희 2년 여름 모친 묘소 근처에 세운 한천정사에서 여조겸을 맞이한 주희가 40일간 기거를 하면서 편찬한 책이다. 학문을 다스리는 대강과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 622조목을 뽑고 왕복 편지를 편집해서 1178년 4월에 완성하였다. 책 이름은 논어 자장 편 구절을 따온 것으로 근사란 일상생활에 절실한 사실을 묻고 생각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나의 몸에 가까운 문제에서 출발하여 깊은 이치에까지 미친다는 말이다. 이 책은 성리학의 이념과 체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성리학을 배우는 이들의 필독서로 일종의 철학 선집으로 ‘송학의 논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여기에는 주렴계의 태극론, 정이천의 리理 철학, 장횡거의 기氣철학 등이 담겨 있다.

주3.
당나라 때는 불교와 도교의 극성기였다. 당나라 말기 불교를 극복하기 위해 일어난 유교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인 한유韓愈(768~824)와 이고李O(772~841)에서 시작된 일련의 사상들을 종합하고 체계화시킨 것은 남송의 주희에 의해서였다. 이 주희에 영향을 준 북송 시대 뛰어난 유학자 5명을 북송 오자라고 부른다. 근사록에서는 상수철학의 대가인 소강절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이는 상수철학을 도교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주돈이周敦O(1017~1073) 자는 무숙茂叔. 사람들은 염계濂溪 선생이라 했다. 주희는 그를 공자와 맹자 이후 1400년 동안이나 끊어졌던 성인의 도를 이은 인물로 평한 이래로, 주돈이는 북송 성리학의 선구자라 일컬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가 있다. [태극도설]은 송나라 초의 도사 진단陳O(871~989)에게서 전수된 것으로 태극이 우주의 본체가 된다는 것과 이것이 복희도의 상과 꼭 부합된다는 점을 논한 게 태극도설이다. [통서]는 주자周子가 성인이 되기 위한 수양법으로 중용에 나오는 성誠의 개념을 중시한다.

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O(1033~1107) 형제는 이정二程 또는 이정자二程子라 하며 주희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형인 정호의 자字는 백순伯淳, 호號는 명도明道로 정명도 선생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낙향해서 교육에 힘썼으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구도에 전념하였다. 성품이 온화하여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한 살 아래인 정이의 자는 정숙正叔이고 호는 이천伊川으로 이천 선생이라 불렸다. 형과 반대로 엄격한 편이었다. 형인 정명도는 인을 인식하는 것(識仁)을 주로 했고, 성실함(誠)과 경건함(敬)을 강조했다. 심즉리心卽理의 입장을 취해 주희의 맞수였던 육상산陸象山(1139~1192)과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1472~1528) 심학心學에 영향을 주었고, 동생인 정이천은 이치를 궁구하는 것(궁리窮理)을 위주로 하였는데, 여기서 이치는 자연의 이치라기보다는 도덕적인 이치를 말한다. 이치를 궁구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나아가서(격물格物) 앎을 이루는 것(치지致知)이 필요하다고 한다. 또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하는(주일무적主一無適) 경敬사상을 강조했으며 성이 곧 리이다(性卽理)라는 명제를 내세워 주희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장재張載(1020~1077) 자는 자후子厚로 오랫동안 횡거진橫渠鎭 출신이라 ‘횡거선생’이라 불렸다. 그는 종일 방안에 꿇어앉아서 좌우에 책을 두고, 책을 읽고 생각하다 얻은 것이 있으면 기록해 두었으며, 혹 밤중에도 일어나 앉아 불을 밝히고 글을 썼다고 한다. 유교 뿐 아니라 백가서와 병서, 불교, 도교 교리까지 두루 연구했다. 장재는 기氣가 만물의 구성요소이며 변화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여 기일원론을 제창함으로써 이후에 기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소옹邵雍(1011~1077) 자는 요부堯夫로 호는 안락선생安樂先生이며 죽은 후에 강절康節이란 시호가 내려져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소강절이라 불렀다. 성품이 온화하여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고 종일토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곤 해서 낙양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좋아했다. 젊은 시절 사방을 주유하다가 도가 계열인 이지재李之才에게서 상수학象數學을 전수받아 [주역]을 상象과 수數로 풀이하였다. 이는 태극에서 음양, 사상, 팔괘로 이어지는 분화과정을 설명하는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W.Leibniz, 1646~1716년)가 이에서 착안해 2진법을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다.대표적인 저술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로 여기서 원회운세元會運世론과 129.600년의 우주년을 제시했다.

주4.
이 부분은 진영첩의 주자 강의를 주로 참조하였음.

<참고문헌>
『증산도 도전』 (대원출판, 2003)
『인간 주자』 (미우라 쿠니오 지음, 김영식·이승연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96)
『진영첩의 주자 강의』 (진영첩 저, 표정훈 옮김, 푸른역사, 2001)
『주희의 철학』 (陳來 지음, 이종란 외 옮김, 예문서원, 2002)
『근사록』 (주희·여조겸 엮음, 이기동 옮김, 홍익출판사, 1999)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김영사, 2001)
『대학강의 상』 (남회근 지음, 설순남 옮김, 부키, 2014)
『다산경학연구』 (이지형, 태학사, 1996)
<월간 개벽> 200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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