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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랑 속의 초인, 대한남아의 기개를 떨친 안중근安重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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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兒有志出洋外(남아유지출양외)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事不入謀難處身(사불입모난처신)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望須同胞誓流血(망수동포서유혈)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莫作世間無義神(막작세간무의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영산전투 참패 후 안중근 장군이 상심한 대원들을 격려한 시

 

이등박문(伊藤博文)은 명치를 도와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서고, 조선에 통감부를 세워 한일합방을 주도한 인물이라. 그가 일찍부터 상제님의 성예(聲譽)를 접하고 여러 번 뵙기를 청하거늘 기유년 봄에 상제님께서 형렬을 데리고 친히 통감부를 찾으시니라. 상제님께서 형렬과 함께 안내를 받아 통감의 집무실에 드시니 이등박문이 상제님의 용안을 뵙자마자 정신을 잃고 고꾸라지니라. 잠시 후 그가 깨어나매 형렬이 “대왕인 그대가 어찌 천자를 보고 쓰러지느냐!” 하니 이등박문이 놀라며 “천자라니 무슨 천자인가?” 하거늘 형렬이 “조선의 천자다.” 하고 다시 “○○이 있느냐? 그것이 있어야 우리 선생님과 대면하지 없으면 상대를 못 한다.” 하니 이등박문이 기세에 눌려 말을 더듬는지라......이 해 10월 26일, 이등박문이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의 저격을 받아 하얼빈 역에서 죽음을 당하니라. (도전 5편 365장)

상제님께서 다시 내성에게 명하시기를 “담뱃대를 들고 나를 향해 총 쏘는 흉내를 내며 꼭 죽인다는 마음으로 ‘탕탕’ 소리를 내라.” 하시니 내성이 명에 따라 총 쏘는 흉내를 내거늘 이에 한 성도가 여쭈기를 “이제 이등박문을 폐하시는데 어찌 내성을 쓰셨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안성(安姓)을 썼노라.” 하시니라. (도전 5편 341장)


 

단지동맹 대한독립 혈서에 담은 안중근의 독백


 

1909년 기유 2월 26일, 단기 4242년 음력 2월 7일. 러시아 땅 엔치아(두만강 대안 러시아 노우키에프스크, 연추煙秋) 하리下里(단지동맹 장소를 현재 크라스키노 쭈카노바 마을 최재형의 안채로 비정).

북녘의 봄은 아직 서럽게 춥다.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기 때문이었을까? 

시퍼렇게 날선 칼날이 왼손 무명지

 

(*1)

 

를 지나간 공간에 붉은 피가 채워졌다. 시간과 공간을 잘라낸 듯, 가슴 한편에는 후련함마저 일었다. 내 몸속 더운 피의 열기는 그대로 태극기로 스며들어 내 굳은 의지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봄이되 아직 오지 않은 봄의 추운 바람과 내 안의 더운 열기가 만나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의 굳건한 의지는 더욱 공고해진다. 태극기 위에 무명지에서 나온 피로 혈서를 썼다. 

- 큰 대大, 큰 나라가 되게 하소서
나는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 안중근安重根. 나이는 31세이다. 1879년 기묘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친 안태훈 진사와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이 감응한다 하여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지었다. 타고난 성질이 가볍고 급한 듯하여 이름을 중근이라 지었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고려 때 명신인 안향安珦의 26대손이다. 조부는 안인수安仁壽로 진해 명예현감을 지냈고 가문은 지방 무반 호족으로 대대로 해주에서 세력과 명망을 이어왔다.

201510_144.jpg- 나라 한韓, 하늘땅의 광명을 받아 사람의 광명(人光明)으로 빛날 조국이여
유복했던 어린 시절 글공부와 함께 호협豪俠하는 기질로 사냥을 취미로 즐겼다. 16세 때인 1894 갑오년에 김아려金亞麗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다. 당시 동학을 빙자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폭도들을 부친을 도와 진압하였다. 이때 나는 황해도 동학접주 김구를 만났고, 이 뒤 김구와의 인연은 우리 항일 독립 운동사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당시 나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친우결의親友結義),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음주가무飮酒歌舞), 총으로 사냥하는 것(총포수렵銃砲狩獵),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기마준마騎馬駿馬)을 가장 좋아했다. 호방함을 갖추고 상무정신으로 심신을 단련했던 이 무렵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 홀로 독獨, 어떤 외세의 간섭 없이 굳건하게
19세가 되던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독실하게 종신신앙을 하였다. 천주교를 통해 세계와 민족을 만나게 되었고, 신앙생활에서도 항상 의로움을 추구하며 행동윤리로 삼게 되었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 1904년 러일전쟁 개전에 즈음하여 일제의 침략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부친이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때 결심하였다. 독립을 이루는 그날까지 금주를 맹세하기로. 가족들을 이끌고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문무쌍전에 입각한 민족 교육을 실시하고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 운영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던 1907 정미년 부친과 친교가 있던 김진사金進士라는 분이 간도와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에 대한인 백여만 명이 살고 있으니 크게 활동할 만한 곳이라 하였다. 이때 조선통감으로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강제로 정미 7조약을 맺게 하여 대한제국 광무제(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군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제는 애국계몽운동이 아닌 전면적인 무장투쟁으로 나라를 구해야 하리라. 1907년 8월 1일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해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다. 홀로 되신 어머니와 부인, 장녀 현생, 장남 분도, 갓 태어난 차남 준생을 두고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 쉽지 않은 발걸음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꿈하늘>에서 이때 내 심정을 대변하는 글을 지었다. ‘누가 처자를 어여삐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열사가 나라를 위함에는 가족까지 희생하는 법이니, 나라 사랑과 아내 사랑은 서로 같이할 수 없는 것이다.’

- 설 립立, 하늘과 땅 안에 우뚝 설 내 조국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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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를 지나 연해주로 온 나는 의병을 모집하고 세력을 결집하였다. 이 무렵 엄인섭, 김기룡 두 사람과 의형제를 맺었다. 이후 동포사회를 돌며 유세를 하여 자금과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1908년 3월 연해주 지역의 의병운동은 지역유지였던 최재형崔在亨

 

(*2))

 

(1858년 1월 20일 ~ 1920년 4월 7일)에 의해 주도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전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이 헤이그 특사의 한 명인 아들 이위종을 보내 군자금을 기부하고, 전 간도 관리사 이범윤등과 함께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였다. 이에 나는 동의회의 발기회에 참여하게 되어, 동의군 우영장右營將으로 3개 중대 약 300여명을 지휘하는 참모중장參謀中將이 되어 의병들 훈련과 사상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훈시했다. 

“한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두 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 번, 그렇게 네 번, 열 번에 이르고, 백 번을 꺾여도 굴함이 없이 금년에 못 이루면 내년, 내년에 못 이루면 후년, 그렇게 십 년 백 년이 가고, 또 만일 우리 대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고, 급히 나가고 천천히 나가고, 앞일을 준비하고 뒷일도 마련하여 모든 것을 갖추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1908년 7월 7일 우리 부대는 두만강 대안의 경흥군 홍의동에서 항일전쟁을 개시하였다. 이때 일본군 척후보병 상등병 이하 4명을 사살하였고, 10일 새벽에는 경흥읍 아래 신아산 헌병분견대를 습격하였다. 이때 포로가 된 일본군을 나는 만국공법에 의해 인류정의와 도덕적 견지에서 동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석방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불만을 품은 의병들이 대오에서 이탈하고, 엄인섭 부대와도 갈등이 빚어져 연해주로 귀환하였다. 이후 연해주 의병은 회령군 영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이 영산전투는 연해주 의병이 수행한 마지막 전투가 되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연추(노우키에프스크; 엔치야)로 귀환한 나는 친구들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천명天命이 있지 않았다면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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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기력을 회복한 나는 제2의 의병 봉기를 위해 노력했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깊은 고민에 빠진 나는 고심초려苦心焦慮한 결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조직하게 되었다. 생사를 같이하며 구국운동에 투신하는 11명의 동지들

 

(*3))

 

과 단지동맹을 결행하고, ‘조국독립 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이를 나는 ‘정천正天동맹’이라 명명했다.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작성한 동의 단지회 취지서는 회령 영산전투 패배로 떨어진 내 자신과 동지들의 위상 회복과 국권회복을 위한 강한 의지를 반영하였다. 우리들의 선혈로 쓴 ‘대한독립기’와 자른 손가락 그리고 기타 서류는 독립 운동가들과 러시아지역 한인들에게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909년 9월 엔치야에 머물던 나는 문득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겠다고 말했다. 어떤 영감inspiration이 떠올랐던 것 같다. 동지들과 작별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니 국적國賊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이었다. 옳거니! 옳거니! 하늘이 내게 이토를 처단하는 기회를 주시는구나. 천여불수天與不受 반수기앙이反受其殃耳라고 했다. 만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몇 년 동안 소원하던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었으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출전出戰 - 늙은 쥐 도적놈(鼠竊伊藤)

(*4))
을 사살하라

 

탄환에 십자를 긋다

 

1909년 10월 25일 자시子時, 안중근은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줄칼로 여덟 개 탄알의 탄두 위에 십자를 긋고 있었다. 탄알은 덤덤탄. 체코산으로 덤덤탄은 표적을 맞추기가 쉽지 않기에 사격의 달인이 아니면 사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단 명중하면 관통하지 않고 인체에 박혀서 탄체 내의 납이 급속하게 분출하는 할로우 포인트탄(Hollow Point Bullet)이기 때문에 치명적이다. 때문에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로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서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미 고종의 특사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참석조차 거부당했고, 일제의 만행에 분개했던 안중근은 이 탄알로 이토의 숨통을 겨냥하기로 했다. 6시 30분 하얼빈哈爾濱(Harbin) 역 북쪽 부두구 레스나야 가 28호(지금의 썬린森林 가 34호) 러시아식 단층 건물 방 안에서 눈을 떴다.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검은색 신사복 위에 모직 반코트를 단정하게 차려 입었다. 가슴 속에 넣어둔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 모델 7연발 권총을 꺼내 탄창 안의 일곱 발 탄알과 약식 속 한 발을 다시 확인했다. 빈틈없이 장전된 사명감이었을까. 가슴 속에 권총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무릎을 꿇고 마음의 기도를 올렸다.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 뒤, 오늘의 이 일이 결코 사적 복수심이 아닌 자유와 평화를 위한 출전임을 기원했다. 박해 받는 민족과 조국을 구하기 위해, 더 나아가 동양의 평화를 위한 전쟁임을 기도하였다. 기도를 마친 후 일본인처럼 보이기 위해 납작모자를 눌러쓰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나섰다. 지난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온 안중근이 머문 이 집은 ‘하얼빈 한민회’ 회장 김성백金成白(안응칠 역사 저서에는 聖伯)의 집이었다. 김성백의 당시 나이는 32세로 안중근과 함께 이번 일을 도모하는 유동하劉東夏와는 사돈지간이었다. 잘 다녀오라거나 잘 가시라는 말도, 그동안 고마웠소, 잘 계시오라는 그 어떤 배웅도 차라리 구차했던 것일까. 이 두 동지는 말없이 마음으로 통하여 오직 국적 이토 처단 성공만을 빌었다. 서두름이나 망설임, 두려움의 기색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당당하고 차분한 호흡의 걸음으로 담담하게 오전 7시 하얼빈 역에 도착한 안중근은 심장 가까이에 닿는 권총의 차가운 쇠 느낌과 북녘 하늘의 매서운 추위를 느끼며 한층 더 냉정해져 갔다. 태연히 역사 안 찻집으로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며 이토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국적國敵 이토가 당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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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하얼빈 역 일대에는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러시아 군경에게 일본인 환영객을 검색하지 말 것을 요청하여 검문은 허술한 편이었다. 

1909년 10월 25일 23시, 청나라 동북면 창춘長春 역.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태운 특별열차가 북동쪽에 새롭게 들어선 도시 하얼빈을 향해 긴 기적 소리를 올렸다. 플랫폼을 가득 메운 창춘의 일본 거류민 환송객은 “이토 공작 만세!”를 열렬히 외치며 일장기를 흔들었다. 이토는 차창 밖을 향해 한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며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창춘에서 하얼빈까지는 열차 운행 6시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메이지 왕의 최고자문기구인 추밀원 의장이며 공작 신분으로 도둑처럼 한밤중에 열차에서 내릴 수 없었기에 운행속도를 조정해서, 다음 날인 10월 26일 오전 9시에 하차할 예정이었다. 

이번 이토의 만주 지역 방문은 단순한 유람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동청철도회사의 기관지 <하얼빈 웨스트니크>의 10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이토는 남만주철도회사에 관한 모든 권한을 정부로부터 위임받았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면 남만주 일대를 다스리는 책임자(대수大守)에 임명될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미 이해 7월 6일, 일본 각의에서는 대한제국 병탄을 의결하고 메이지 일왕의 재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이 국책을 수행하기 위해 이웃한 러시아와 청국의 완전한 양해를 얻을 필요가 있음도 전하고 있었다. 또한 만주 지역뿐만 아니라 몽골에 대한 지배권도 러시아와의 비밀협상 대상이었다. 이토의 하얼빈 방문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도적의 가슴에 날린 응징의 총탄
오전 9시 안중근은 다시 창문 밖 플랫폼으로 눈길을 돌려 동정을 살폈다. 찻집 바로 앞에는 일본인 환영단이 겹겹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앞쪽으로는 선로를 바라보며 오른편에는 러시아 의장대와 군악대가, 왼편에는 청국 군인들이, 다시 그 왼편에는 각국 외교사절 대표와 일본 관리 및 상사 대표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때 안중근에게는 이토를 사살할 가장 효과적인 저격지점에 대한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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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기적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속도를 늦추며 들어온 열차가 플랫폼에 멈춰 섰다. 기관차 한 대에 호화스러운 객차 4량이 달린 특별열차였다. 열차가 도착하자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Kokovsev가 열차 내에 들어가 영접하고 20분 뒤, 이토는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검은색 프록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이토의 얼굴 가득한 미소에는 의도된 위엄과 거만한 기색이 뒤섞여 있었다. 

“이토 공작, 반자이(만세)~!” “반자이!”

뚜벅, 뚜벅…. 일본인 환영 군중 무리 왼쪽 끝 부분, 러시아 의장대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은 이토와의 거리가 10여 보쯤 되자 품 안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탕! 탕! 탕!

201510_150.jpg세 번 외친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브라우닝 총구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화약 연기 너머에는 두려움도 물러서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 당당한 모습의 엄청난 거인 안중근이 있었다. 안중근이 쏜 첫 네 발 중 세 발은 이토에 명중했다. 모두 오른쪽 팔을 지나 폐와 복부에 박혔다. 이토의 정면이 아닌 옆에서 오른쪽 팔꿈치 위쪽을 겨냥해서 쏘아야 심장을 타격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알았다. 이토는 오전 10시경 어떤 유언도 없이 절명했다. 나이 68세, 한국통감에서 물러난 지 134일 만이었다. 나머지 한 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의 오른팔에 박혔다. 이토의 얼굴을 몰랐던 안중근은 이토 같아 보이는 이에게 총을 발사했고, 순간 그가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나머지 세 발을 발사한 것이다. 세 발은 각각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의 왼팔을 스쳐 왼쪽 허리에 박히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滿鐵)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의 왼쪽 다리관절을 관통했으며, 만철 총재 나카무리 고레키미의 오른쪽 다리에 박혔다. 마지막 한발이 남은 상황에서 안중근은 더 이상 발사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은 자결용이 아니었다. 그는 자객도 암살범도 아닌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하얼빈 특파 독립대장의 자격으로 적장을 사살했던 것이고, 이제 남은 한 발은 다음 전쟁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총을 거꾸로 돌려 러시아 병사에게 쥐어주고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순순히 잡혔던 것이다.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대한 만세)”를 천지개벽 하듯 세 번 외친 후 안중근은 체포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의 일이었다.

 

순국殉國 - 대한 독립의 하늘에 서는 날까지


의도된 재판, 당당한 대응 

이토를 사살하고 플랫폼에서 체포된 안중근은 곧바로 하얼빈 역구내 러시아 헌병대 분소로 연행되었다. 이날 저녁 18시경 이토의 사망 소식은 일본 내각에 전해졌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와 청국 법정에 서지 않도록 억지 주장과 협박

 

(*5))

 

을 통해 안중근을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장악하고, 담당검사를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로 배정하였다. 관동도독부는 러일전쟁 승리를 기화로 러시아로부터 받은 조차지 다련, 뤼순 지역을 관동주라 칭하고 그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식민행정기관이었다. 그런데 왜 거사가 있었던 하얼빈이나 본국인 일본에서 재판을 받지 않고 하얼빈에서 1,000여km나 떨어진 뤼순까지 갔을까? 하얼빈은 러시아의 관할지이기에 자칫 재판 과정상 외교문제를 초래할 수 있으며, 당시 일본 본토에는 파렴치범에게는 사형을 언도하지만, 사상범은 사형을 주지 않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뤼순까지 간 이유는 순전히 안중근에게 사형을 구형하기 위해서다. 안중근은 이곳에서 그 유명한 이토의 죄상 15가지를 들며 조목조목 신문訊問에 반박했다. 

이후 계속된 재판은 정치적 쇼였다. 국내 유지들과 안중근의 모친이 보낸 변호사 안병찬安炳瓚과 통역 고병은高秉殷, 연해주 한인이 파견한 러시아 변호사 미하일로프C.P.Mihailov와 상하이에서 온 영국인 더글러스J.E.Douglas 및 그 밖의 외국인 2명의 변호 신청은 당초 약속과 달리 모두 불허되었다. 처음 일본은 대한인과 외국인 변호사의 변호를 허락하는 듯했지만 시종 당당하게 대응하는 안중근의 모습에 놀라 태도를 바꾸어, 일본인 일색으로 진행된 명백한 편파 재판을 단 6회로 끝내버렸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뤼순도독부 지방법원 2층 형사법정. 일본과 전쟁 중 포로로 잡혀 왔으니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에 따라 판결해야 한다는 안중근의 외침에도 일본은 이미 정한 ‘사형’을 선고한다. 이에 안중근은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며 미소를 지으며 전혀 미동도 없이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의롭게 죽기로 하다
안중근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항소를 하는 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니,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는 모친의 말을 따른 것이다. 다만 <안응칠 역사>에 이어 집필 중이던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고 떠나길 원했지만, 그의 요청에 대해 일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서둘러 사형집행일을 정해버렸다. 안중근이 떠나길 원했던 3월 25일은 천주교 사순절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융희제(순종황제)의 탄신일이기도 하여 여론을 의식한 일제는 그 다음 날로 정한 것이다.

현재 안중근이 옥중투쟁을 하던 감방에는 안내판과 함께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라는 친필이 걸려있다. 그는 일본의 국사범에다 일본 최초의 수상을 주살했기에 잡범처럼 일반 감방에 수감된 것이 아니라, 특별감호대상으로 별도의 부속건물에 따로 수용되었다. 문이 잠겨 있어 창문을 통해 내부를 훑어볼 수밖에 없다. 냉기가 흐르는 방에는 딱딱한 목재 침대와 얇은 이불이 전부였다. 오른쪽에는 투박한 책상과 걸상 그리고 지필묵이 놓여 있다. 안중근은 이곳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탈고했으며, 143일 동안 옥중 투쟁을 벌이면서 신품神品과 같은 유묵을 남겼다. 주로 높은 기개와 도덕 애국적 사상을 한두 구절의 명구나 5언 내지 7언 절구로 표현한 시문들이 많고 논어를 비롯한 유교경전과 애국사상을 표현한 유묵들이 많다.

201510_154.jpg의연했던 마지막 모습
뤼순감옥 교형장, 즉 사형집행장은 본 건물과 떨어져 있다. 들어갈 때는 살아 들어가지만 나갈 때는 죽어야 하는 곳. 교형장은 2층으로 이루어졌다. 사형수의 눈을 가리고 형구를 씌운 후 1m 크기의 나무판 위에 세운다. 연결고리에 목을 단단히 묶고 경첩이 열리면 나무판 아래로 사형수가 떨어지고 허공에 매달리게 된다. 사망을 확인하고 밧줄을 풀면 나무통으로 구부러진 채로 들어간다. 나무통 뚜껑을 닫고 감옥 뒤쪽 사형수 묘지로 매장하면 끝. 교형장 안에는 나무통에 담겨진 시신을 볼 수 있는 데 죽어서도 눕지 못하고 구부린 채로 들어 있다. 일본군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애국투사가 죽어서는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형 집행 당일에는 부슬비가 내렸다. 그전에 안중근은 경천敬天과 독립獨立이란 글씨를 쓰며 나라와 신앙을 생각했고, 청초당靑草塘을 쓰며 어린 시절 뛰놀던 수양산 아래 청계동의 푸른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줄곧 그의 경비를 섰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가 휘호를 부탁한 일이 생각나 즉석에서 책상 위에 비단 천을 펴놓고 자세를 바로 한 뒤 붓을 들었다. 

 

위국헌신爲國獻身 군인본분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단숨에 써내려간 뒤 여순旅順(뤼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썼다고 적고 손바닥 묵인을 찍었다. 지바는 이후 일생토록 안중근의 명복을 빌며 한국과 일본의 평화와 공존을 기원하며 살았다. 이때 쓴 유묵은 1980년 안중근 탄신 백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에 반환되었다.

1910년 경술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뤼순 감옥 사형대 앞에 섰다. 그가 아침에 갈아입은 옷은 어머니께서 보내온 흰 명주 한복이었다. 흰색 저고리와 검은색 바지, 흑백으로 분명한 대조를 이룬 옷차림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야 하는 운명이 엿보여 일종의 감개를 느끼게 했다.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은?” 그동안 영웅적인 안중근의 풍모에 존경의 마음을 품었던 구리하라栗原貞吉 전옥典獄은 물었다.

 

“우리 대한제국이 독립해야 동양평화가 보존될 수 있고, 일본도 위기를 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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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까지 그는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다. 간수는 백지를 접어 두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수건을 둘러맸다. 간수는 안중근을 부축해 일곱 계단을 올라 교수대 위에 세웠다. 한 계단 한 계단 죽음의 길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되고 있었다.

이때 안중근은 집행관에게 마지막 소원을 말한다.

“잠시 기도할 시간을 달라.”

안중근은 교수대 앞에서 천주님께 생애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오전 10시 4분 안중근이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옥리 한 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았다. 바닥의 경첩이 덜컹거리며 문이 열렸다. 그는 순국殉國했다.

10시 15분 의사는 안중근의 절명을 확인했다. 그의 나이 32세. 

보통 사형수의 유해는 좌관座棺에 넣는 것이 관례였으나 특별히 새롭게 송판으로 침관寢棺을 만들어 시신을 넣고 그 위를 흰 천으로 씌워 매우 정중하게 취급했다고 한다. 함께 이토 처단에 참여했던 조도선, 우덕순, 유동하는 안중근의 유해를 향한 최후의 고별인사를 하였다. 뤼순 감옥 공동묘지에 매장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안중근의 두 동생은 시신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일제는 이를 불허했다. 이는 대한인들이 그 유해를 인수해 하얼빈 한국인 묘지에 매장하고 묘비와 기념비를 세워 애국지사로서 숭배와 존경을 다하며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의 만행이었다. 

201510_1552.jpg유서에 담긴 염원
안중근은 순국 전에 어머니와 부인 등 가족들과 뮈텔Mutel 주교, 빌렘Wilhelm 신부 등 6인에게 유서를 전했으며, 부인과 아이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죽는 순간까지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서를 통해 우리는 영웅 안중근과 더불어 인간 안중근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그 중 동생들에게 남긴 유언을 보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든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였던 대한의 독립을 위해 이후에도 더 많은 싸움과 희생들을 치러내며 우리는 마침내 광복을 맞았다. 빼앗긴 영토를 되찾아 주인으로 다시 행세를 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지금 민족정신의 주체성과 영혼을 잃어버린 채 또 다른 독립전쟁을 하고 있다. 한민족이 처한 현 상황은 과거 대한제국 때의 상황과 너무도 유사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이권과 역학관계에 맞물려 움직이는 국제 정세가 그러하고, 내부적으로도 남북분단과 이념 대립 및 갈등 요인들이 상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식민매국 사학에 의해 스스로의 역사 왜곡이 버젓이 진행되고 있는 기막힌 역사전쟁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들을 타파하고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비장한 의지로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장군이 남긴 마지막 총탄 한 발의 깊은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역사전쟁의 거친 파고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 어쩌면 그것을 꺼내어 써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안중근에 대한 호칭] 의사義士인가 장군將軍인가

 

안중근은 대한남아의 의로운 충의와 기개를 만천하에 알린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부를 때 의사, 열사, 장군 등의 호칭을 혼용하고 있다. ‘열사烈士’와 ‘의사義士’에 대하여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열사: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
●의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의로운 사람

즉 ‘열사’는 ‘나라를 위하여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절의를 지킨 사람’이고, ‘의사’는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며, 때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나 확연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이에 국가보훈처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열사: 맨몸으로써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사람
▶의사: 무력武力으로써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

우리는 지금까지 안중근을 ‘의사義士’라고 호칭했다. 북에서는 ‘열사烈士’라고 부른다. 하지만 안중근은 시종일관 자신을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토를 처단하면서 만국공법에 의해 전쟁포로의 자격으로 대우받길 원했고 순국하는 그날까지 대한의군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의 수괴를 처단했다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당시 대한제국 군대는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이 뒤를 이어 극렬한 무장 투쟁이 있었다. 이에 대한제국의 무력은 의병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그 선봉에 안중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안중근은 일제와 전쟁을 벌였던 대한제국 장교의 신분으로 이토를 처단했기 때문에 ‘의사’나 ‘열사’보다는 ‘장군將軍’이란 호칭이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은 개인 자격이 아닌 대한의 장수로 대對일본 전쟁을 치렀다. 그의 이토 처단은 치밀하게 계획된 작전계획의 하나였고, 유묵에서도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 쓰며 스스로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동안에 써오던 의사라는 칭호 대신 ‘참모중장’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역사적으로 타당한 결론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한다는 의미로 별다른 호칭 없이 이름으로 서술하였다. 그 이면에는 안중근에 대해 의사/장군이란 호칭보다 더한 존경의 의미가 담긴 칭호를 마땅히 찾지 못한 이유도 존재하고 있다.

 

■ <안응칠 역사> 중에 기술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조

● 의거의 이유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조
1. 10여 년 전 대한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2.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대한인들을 학살한 죄요. 
5. 국권을 강탈한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요. 
8.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민족교육을 방해하고 신문 읽는 권리를 금지시킨 죄요. 
10. 대한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 대한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대한제국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 일본 현 천황의 아버지 효명 천황을 살해한 죄이다(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사실이다. 1867년 1월 메이지 왕의 아버지 고메이 왕이 죽었을 때 나온 독살설과 관련 그 범인이 이토라는 점을 지적했으나 당시 이토는 아직 궁정에 출입하기 전이고 이때에는 와병 중이었다).

 

■ 안중근 공판의 두 가지 쟁점

 

안중근이 공판에서 벌인 투쟁은 새로운 형태의 독립운동이었다. 안중근과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과 벌인 논쟁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통감통치에 대한 평가’와 ‘하얼빈 거사의 성격’이다. 

먼저 ‘통감통치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검찰관은 한국은 독립 자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통감정치가 필요하고 대한의 문명화를 지도계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안중근은 통감 통치는 동양 평화를 해치며, 대한의 독립 자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문명개화론은 우리의 국권을 침탈당한 가운데 진행되는 일본의 문명개화이지 대한의 문명개화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중근은 문명의 이름으로 침략과 정복을 일삼는 침략주의적 문명개화론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또한 ‘하얼빈 의거의 성격’에 대해서 검찰관은 안중근이 이토를 오해해 개인적인 감정에서 살해했다고 하지만 안중근은 이토를 국권을 탈취한 나라의 원수, 즉 국적國敵이라 반박했다. 그리고 검찰관은 천주교인이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 하며 도덕적 종교적 문제로 추궁했지만, 안중근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포악한 자를 응징하고 무고한 생명을 보호하는 의전義戰을 전개한 것이며, 자신은 개인적으로 이토를 살해한 살인범, 즉 형사피고인이 아니라 대한국인들을 대신해 항일 전쟁의 일환으로 특공작전을 수행해 이토를 사살하고 포로가 된 군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안중근의 이토 처단이 1910년의 ‘한일병합’ 즉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앞당겼다는 일부 친일모리배들의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외교권을,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해산을 결행함으로써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병탄倂呑하고 있었고, 1909년에도 대한제국을 집어삼키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 속도의 완급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안중근의 이토 처단과는 별개로 대한제국의 명운은 이미 다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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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 저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는 안중근 자신이 지은 자서전이다. 출생부터 독립운동과정, 이토 처단 그리고 순국에 이르기까지 떳떳한 행적을 밝혔다.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은 저술하던 중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 이 두 유고는 순국 후 일제 의해 압수되어 한국 식민통치자료로 이용되었고, 원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안응칠역사>에서는 생존 동지들의 신변을 염려하여 동지들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거나 모호하게 했다. <동양평화론>은 이토를 포살한 이론적 근거가 담겨 있는데, 서문序文,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 등 5단계로 잡았다. 이중 서문과 전감만 완성되었고, 나머지 세 가지는 목차만 제시하고 미완인 채 순국하였다.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지고 있는 이치이다”라고 시작하는 <동양평화론>은 평화공존과 수평적 연대를 기초로 하고 있다. 동양 삼국이 자주 독립과 국제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평화체제를 구축하여 뤼순을 개방해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공동은행 설립, 공용화폐 발행과 같은 현재 유럽공동체를 연상시키는 구상안이 담겨 있다. 아마 이 논문이 완성되었다면 일제의 대한제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침략의 실상을 일목요연하게 밝혔을 것이고, 이토의 15개조 죄상에 대한 논거를 제시하여 그 처단의 정당성을 입증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형장에서도 “동양평화를 삼창하고 죽음을 맞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동양평화론>에서는 일본의 성질이 급해서 빨리 망하는 결함이 있다며 일본의 속성을 매우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다. 사형집행일이 정해지고 영하 20도를 오가는 감방 안에서 아무런 자료와 준비 기간도 없이 집필을 하고 있었기에 여러 한계점은 보이나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의 평화구도와 공동체 모델은 대단히 선구적인 제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 대한 대장부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의 어머니 역시 대장부大丈婦였다. 대한 대장부를 낳은 항일운동의 어머니인 모친 조마리아趙馬利亞 여사는 배천 조씨로, 1862년에 태어나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 살던 동갑내기인 순흥 안씨 집안의 셋째 아들 태훈과 혼인하였다. 그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 바로 영웅 안중근이다. 남편 안태훈은 여러 형제 중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개화파에 연루되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서 신천군 두라면 천봉산 아래 청계동으로 이주하였다. 조마리아는 6세 된 안중근을 데리고 청계동에서 살림을 새로 시작하여 가족의 대소사를 도맡으며 가정을 건사하였다. 

당시 일제는 우리 정부 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여 1907년 정미년 당시 대일 차관액은 대한제국 1년 예산에 맞먹는 1,300만환이었다. 이에 대구에서 서상돈 등의 발의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났다. 이는 뒷날의 물산장려운동이나 IMF 구제금융 시 금金모으기 운동 때와 같이 남녀노소 귀천을 떠난 거족적인 구국운동이었다. 이때 조마리아 여사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당시 안중근이 세운 진남포 삼흥학교 교원과 학생들이 34원 60전의 국채보상 의연금을 냈고, 어머니 조마리아 역시 은가락지 두 쌍을 비롯한 패물 20원 어치를 ‘안중근 자친’ 명의로 출연하였다.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이토가 사살된 후, 조마리아는 직접 평양으로가 변호사로서 명성과 애국심이 강한 안병찬을 만나 변호를 부탁하였다. 당시 이를 두고 조마리아를 조사한 일제 순사와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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