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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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개벽이다 중] 삼한관경제로 강역을 통치한 단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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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이 조선의 영토를 다스린 기본 원리인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에 대해 알아보자. 삼한관경제는 왜곡된 단군조선사의 뿌리와 정통성을 바로잡는 핵심 코드이다. 단군왕검은 세계 문명의 시원 국가인 환국과 배달의 대도(신교) 정신을 정통으로 계승·발전시켜 신교의 삼신 원리와 삼신의 신성 속에 깃든 광명 원리를 근본으로 해서 단군조선의 전 영토를 삼한三韓(진 ·번한·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진한(만주 일대)은 단군 천제가 직접 통치하고 마한(한반도 일대)과 번한(요서·하북성 일대)에는 부단군 격인 왕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진한·번한·마한이 북삼한(전삼한)인데, 단군조선이 망한 후에 한반도의 남부에 존재한 ‘남삼한(후삼한)’과는 엄연히 다르다.

 

신교의 삼신 사상에 따른 단군조선의 국가 체제(소위 북삼한)인 삼한관경제는 ‘조선 문화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다. 단군조선 시대에 지금의 요서 지방과 북경 일대는 번한(번조선)이 통치한 영역이었다. 그리고 중국 황하 ·양자강 유역의 회수와 태산[淮岱之間] 지역에 분조分朝(단군조선 분국)를 두어 다스리면서 순임금을 시켜 분조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고, 다시 치우천황의 후손인 치두남蚩頭男을 번한의 왕(부단군)으로 임명하여 순임금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당시 당唐의 요임금과 우虞의 순舜은 단군조선 관경管境의 제후였던 것이다. 태산은 고대 중국 문화의 성산이 아니다. 단군조선 시대 이전부터 한민족 통치자들이 이 산에 올라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는 등 신교문화가 뿌리를 내렸던 곳이다. 이 때문에 회대(회수와 태산) 지방은 중국 지역에서 신교의 삼신 문화가 가장 먼저 토착화되어, 전국戰國 시대 연燕·제齊나라 때까지도 그 역사가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단군조선 시대는 신교의 삼신 사상을 기반으로 한 삼한관경제로써 동방  문명권을 통일하고, 황하·양자강 유역과 만주·한반도에 이르는 동아시아 대부분을 통치한 한민족 문화사 최대의 전성기였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학자들이 발표한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이제까지 베이징대학과 호북정胡北省 전문가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약 3천 년 전에 세워진 초楚나라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양자강 유역의 호북성 의창현宜昌縣에서 하夏, 은殷, 서주西周시대(약 4,000년 전~약 2, 750년 전)에 이르는 고대 왕조의 도기陶器와 파면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들은 황하 문명의 유물들과 일치하여 양자강 유역도 같은 광역廣域 황하 문명권에 들어간다는 대단히 중대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양자강 유역에서도 빈번한 교류가 일어났으며, 황하 양자강의 광범한 유역에서 이 고대 문명이 대단히 번창하였으며, 은殷나라 때는 남북의 밀접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1983,115.)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는 번한·마한의 역대 왕의 통치 연대와 그 이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으로 잘못 알려진 준準왕은 단군조선의 삼한(44세 구물 단군 때 수도를 백악산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옮기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개편) 중에서도 번한, 즉 번조선의 마지막 왕이다. 삼신 시장에 따라 성립한 삼한(삼조선) 시대는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 초기까지 지속되었으나 번조선이 망하면서 비로소 끝이 났다.  단군조선의 역사와 문회를 알려면 47대 단군에 대한 기록을 역사적 사  실로 인식해야 한다. 지금의 단군조선사는 조선(BCE 2333년 건국) 말기  번한 준왕의 역사만 기록(위만의 침략과 준왕의 망명, BCE 194년)하였을  뿐이고 그 이전 2천여 년 간의 역사는 증발되어 버렸다. 최근에 와서도 4 천여 년 전에 건국되었다는 사실만 인정할 뿐 역사를 개창한 주인공과 구체적 내용이 없는 유령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조선 중종 때의 찬수관으로 한민족 뿌리 역사의 대가인 이맥은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단군조선이 처음에는 조선 문화의 심장부인 송화강 아사달阿斯達에 수도를 정하였으나 그 이후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과 장당경藏唐京아사달로 차례로 옮겼다고 기록하였다. 『삼국유사』에서도 단군조선은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아사달로 도읍을 이동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신교 삼신문화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북삼한北三韓 개념을 처음 종합하고 체계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단재 신채호다. 단재는 일찍이 만  주에 가서 뿌리 문화의 자취가 성성하게 깃든 고대 유물, 풍속과 언어를  현장에서 혼신의 노력으로 연구한 꿀에 “고구려의 수도 집안集安을 한 번  가보는 것이 역사서를 1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번조선이 망하자 북삼한의 유민이 한반도로 내려옴으로써 경주 중심의 진한(신라 사람들은 진한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나라 이름도 진한이라 하였다), 가야 중심의 번한, 호남 지역의 마한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진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와 더불어 남·북 삼한 시대(남북국 시대)가 여기서 처음  열리게 되었다. 고구려가 망한 후,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이 대진(중국에선 발해라 불렀다)을 세우고 남쪽의 신라와 더불어 두 번째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 왕조인 한양 조선이 망한 후, 서양과 일본 제국  주의로 말미암아 남북한으로 분단되어서 한韓의 분단이 세 번째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 남한에서 후천 통일문명을 주도하는 ‘남조선 도수’에 따라서 갈라졌던 한韓이 통일됨으로써 조화와 통일의 한이 본래 이상을 온전히 회복하게 된다.

 

《이것이 개벽이다 하》-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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