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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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개벽이다 중] 일본사의 뿌리 단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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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는 일본 역사의 기원을 이렇게 전한다.

 

●가륵 단군 재위 10년(무신戊申: BCE2173),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께서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곳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목을 베게 하셨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불렀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서 소머리 나리[牛首國]가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挾野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바다를 건너가 삼도三島를 점거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참칭하였다.

그런데 협야노가 소시모리라는 이름으로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소시모리와 관련된 『일본서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국조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으로 스사노素盞鳴尊라는 신이 있었는데 과도한 야심을 품고 난동을 피우자 여러 신이 단결하여 스사노를 본국[根國]인 신라(당시에는 단군조선이었다)로 쫓아냈다. 신라로 돌아온 스사노는 소시모리會尸茂는 곳에 살다가 다시 배를 타고 떠나 혼슈本州 이즈모出雲에 정착했다.’  이즈모에는 현재 구마노 신사熊野神社 이즈모 대사出雲大社가 남아 있는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이다. 그 중 구마노 신사에 모셔진 제신祭神이 바로 소시모리素尸毛犁이다. 스사노의 조상이 ‘조선의 소시모리’인 것이다.

 

소시모리는 『일본서기』 「신대기神代紀」의 일서一書에 스사모리로 되어 있는데, 스사노의 ‘스사’와 ‘소시’, ‘협야가 모두 ‘소’의 변음이다 현재도 일본에는 ‘소머리’ 라는 뜻인 우두牛頭라는 성씨기 있고 우두신牛頭神을 모신 신사를 ‘소머리 데라牛頭寺’라 한다(현채 오사카의 백제왕 사당에도 우두천왕 신사가 남아 있다). 『삼국유사』는 우수주가 원래 한반도 지명임을 밝히고 현재 강원도 춘천에 남아 있는 우두산牛顆山이 옛적의 ‘소시모리牛首國’ 였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이곳을 조상의 땅이라 하여 찾는 일본인이 많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니니기가 다카마노하라高天原에서 다카치호다케高天穗峰로 내려왔다는 이른바 천손 강림으로 신대 역사가 막을 내리고 인물사가 시작된다. 이때 나니기는 “이 땅은 가라쿠니韓國를 바라보고 (중략) 아침 해와 저녁 해가 비치는 매우 길吉한 땅이다” 라며 조국인 한국韓國 즉 ‘단군조선 삼한三韓’에 대한 향수와 그리운 심정을 토로했다. 이처럼 일본의 개국조는 모두 한민족 혈통이다. 일본 왕실의 역사는 ‘니니기의 증손자’ 인 일본 초대 왕 ‘진무神武’에서 시작한다. 오늘날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수수만 년 태고시대부터 열도에 살던 선주민이 일궈 놓은 토종 일본사이고, 일본 왕가는 125대 동안 만세일통萬世一統의 왕통을 그대로 이어온 것으로 위장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일본 왕가의 혈통적 뿌리’는 ‘단군조선’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세기』는 일본 왕가의 기원을 매우 상세하게 전한다. 35세 사벌단군은 재위 50년 (BCE 723)에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으로 하여금 해상의 웅습熊襲(구마소)을 평정하게 하였고 36세 매륵단군은 재위 38년 (BCE 667)에 언파불합의 이들인 협야후狹野候(협야국의 제후) 배반명裵幋命에게 명하여 일본 열도를 평정하게 하였다.

 

이 배반명이 바로 큐슈 섬 일향日向에서 출발하여 일본 열도를 평정했던,  일본 천황가의 뿌리인 초대 진무神武(挾野尊) 왕이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보면 진무 왕 사후 2대에서 9대 왕까지는 왕이 태어나고 죽은 것 이외에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어떤 중대한 사실’을 숨기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 최초의 통일 왕조를 연 부여계

 

한민족의 열도 ‘이민사 제3 단계’는 이른바 고분古墳 시대(4세기~7세기)로, 4~5세기에 걸쳐 중무장한 기마 군단이 기내畿內 지방까지 건너가서 강력한 고대 통일 왕조인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한 시기이다. 일본 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일본이 야요이 시대에서 고분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갑자기 거대한 고분과 철갑 기마 군단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는 이러한 과정이 급속하고 이질적이어서 자체적인 발전과 무관하다는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발표(1949년)한 바 있다. 실제로 당시 가야, 백제, 부여 등지에서 기마 군단을 이끌고 간 사실이 고분 발굴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태백일사』는 이러한 시실을 “285년에 부여의 왕인 의려依慮가 선비족 모용외에게 패하자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왜를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라고 전한다.

 

『이것이 개벽이다 하』-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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