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

환단고기 관련 다양한 컨텐츠는 대한사랑 K역사문화채널 홈페이지 http://koreanskorea.com 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일본과 중국 교과서 속의 왜곡된 한국사

운영자 0 116
일본 고등학교에서 가장 많이 채택하는 일본사 교과서에 소개된 한국 관련 첫 역사는 바로 한사군이다. “낙랑군에 당시 왜인 사회가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다”라는 본문서술에 붙인 주석에서 “전한 무제가 BCE 108년에 조선 반도에 설치한 한사군 중의 하나”로 낙랑군을 소개하면서 그 위치를 “평양 부근으로 추정한다”라고 하였다. 게다가 “낙랑군은 중국풍의 높은 문화를 자랑하였다”라고 하여 한국을 중국의 정치적 속국일 뿐 아니라 문화적 속국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4세기에 남북분열 시대를 맞은 중국이 주변 민족에 대한 지배력을 잃자 동아시아의 제諸 민족은 국가형성 단계로 들어섰다”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삼국사기 기록 초기기록 불신론을 그대로 추종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초기역사는 부족국가 형태로 기술하고 비로소 4세기에 삼국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형성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BCE 57년, 고구려는 BCE 37년, 백제는 BCE 18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삼국사기』의 상대上代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 초기 왕들의 존재도 부정하였다. 삼국의 초기 왕을 모두 누락시키고 고구려는 6세 태조왕, 백제는 8세 고이왕, 신라는 17세 내물왕부터 그 이름을 거론하였다.
일본은 왜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 시대 초기 역사를 부정하여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조장했을까? 이보다 앞서 일본은 ‘4세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정하게 되면 4세기 이전에도 한반도에 강력한 왕권국가인 고구려,백제 신라가 있었기에 4세기의 임나일본부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때문에 조선사편수회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중국이 5호 16국으로 혼란해진 그때 한반도에 비로소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세워진 것으로 서술하고, 삼국의 성립 시기를 겨우 4세기로 설정하였다. 이때는 삼국이 세워진 지 4백 년도 더 지난 때이다.
이런 내용에 덧붙여 “조선반도 일부에는 소국 연합에 머물러 있던 가야가 있었으며, 『일본서기』는 그 가야를 임나任那라 부른다”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일본이 한반도 남쪽 땅에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는 주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본의 또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일본사 실교출판)도 이와 대동소이한 내용을 싣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야기한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일제가 심어 놓은 이 낭설이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6차 교육과정까지의 국사 교과서는 부록 ‘역대 왕조 계보’에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 연대를 적지 않았다. 고구려는 6세 태조왕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했고, 백제는 8세 고이왕부터, 신라는 제17세 내물왕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하였다.

제7차 교육과정부터는 각 왕조의 1세 왕부터 연대가 기록되었는데, 이것도 역사학자들이 인정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 참여한 교육부 관료들이 강력히 주장하여 마지못해 넣은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여전히 초기 왕들의 행적이 서술되지 않아 사실상 삼국 시대 초기 역사는 지금도 계속하여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이다.

중학교 교과서는 한사군과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를 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표현을 좀 더 쉽게 하여 같은 내용을 기술한다. 한사군 체제에 대해 “한漢은 기원전 2세기에 조선반도 북부를 비롯하여 중앙아시아도 지배하에 두었다” (『역사교과서』, 扶桑社, 2011, 32쪽)라고 하고,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任那(가라加羅)라고 하는 땅에 거점을 두었다고 생각된다”라고 한다.

심지어 한반도에서 건너 간 ‘도래인’도 그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귀화인’이라고(『일본사日本史B』, 51쪽).말을 바꾸는 등 한국과 관련된 거의 모든 역사를 왜곡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교과서는 독도에 대해서도 “한국과는 다케시마(독도)의 귀속을 둘러싼 대립이 있다. 이것은 일본고유의 영토이다”라고 하여 현대사도 왜곡하고 있다. 2012년 4월 11일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옆 헌정기념관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 주장하는 집회가 열렸다. 외무성 차관을 포함한 정부 인사 2명, 각 당 대표자 8명, 여야 국회의원 47명 등이 참여했다. ‘일어나라 일본당’ 대표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는 “헌법을 개정해 문제를 해결하자”라는 발언을 하였고, 야마구치 차관은 “다케시마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라고 하였다(<동아일보>, “일日 외무차관―의원 등 50여 명 참석 ‘독도는 일본 땅’ 도쿄서 망언집회”, 2012.4.12)

그러면 중국의 교과서는 어떠한가? 구석기와 신석기의 원시생활을 간략히 소개한 후 화하족의 시조로 4,700여 년 전의 황제헌원을 내세우는 것으로 시작되는 중국의 국정 역사 교과서는 5,300년 전의 우리 조상인 염제신농씨를 자기네 조상이라 말한다. 염제는 황제와 함께 “황하 유역의 저명한 부락 수령”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염제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배달의 문명을 크게 일으킨 3대 성황聖皇 중의 한 분으로 황제보다 5백 년 앞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동방에는 강대한 치우 부락이 있었다. 황제 부락은 염제 부락과 연합하여 탁록전쟁에서 치우를 크게 이겼다”라는서술과 함께 “치우는 풍백, 우사를 데리고 법술을 부렸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면서 황제, 염제의 부락 사람들로 하여금 방향을 잃게 하였다. 이에 황제는 부하를 명하여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방향을 분별하게 하였으므로 치우를 이길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배달의 환웅천황인 치우를 ‘동방의 부락장’정도로 밝히면서, 승자와 패자를 바꾸어 황제가 치우천황을 이긴 것으로 중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더구나 황제는 훌륭한 병기를 개발한 영웅으로 표현한 반면에 치우천황은 요술이나 부리는 도사로 묘사하고 있다
.
황제헌원 이후의 역사서술에서는, 4세기 위진남북조까지 다루는 7학년 교과서가 끝나도록 동방 한민족과 관련된 내용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북방 민족에 대해서 ‘북방민족대통합’이라는 별개의 장을 설정하고, “진秦·한漢 무렵 흉노의 걸출한 수령 묵특은 최초로 몽골 초원을 통일하여 강대한 국가를 건립하였다”, “동한東韓 말년부터 흉노, 선비, 갈羯, 저氐, 강羌 등 북방과서방의 소수민족들이 잇달아 내륙으로 이주하였다” (『중국역사』, 77쪽, 109쪽) 등의 내용을 여기저기에서 술한 것과 대조적이다. 고조선 시대에는 한국이 중국의 왕조 성립 과정에 깊이 관여하였고, 열국 시대에는 중국 땅과 한반도 사이에 정치경제적 교류가 많이 있었건만, 그 어떤 내용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 교과서는 고대 한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환단고기 안경전 역주본)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Comments

 

글이 없습니다.
글이 없습니다.





State
  • 오늘 방문자 865 명
  • 어제 방문자 1,220 명
  • 최대 방문자 3,354 명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