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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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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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강단 사학계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E 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사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민족이 BCE 2500년경에 이미 청동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화는 황하 유역의 BCE 2200년경, 시베리아 지역의 BCE 1700년경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내몽골의 적봉시를 중심으로 발해만 일대, 요령성의 의무려산 일대까지 뻗어 있던 하가점하층 문화는 산성山城의 존재와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황하 유역의 중국 문화와 성격이 다른 별개의 문화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 강역이었던 곳으로 하가점하층 문화는 곧 고조선 문명의 일부이다.

이 유적의 발굴은 청동기 문명을 고대 국가의 출현 조건으로 보는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없이 석기만으로도 고대국가가 건설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후기 베다시대(BCE 1000~ BCE 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 국가도 청동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49쪽). 청동기문명이 있어야만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근대 실증사학의 일방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BCE 1300년 이후로 설정하고, BCE 1300년이 지나서야 한민족의 고대 국가가 탄생하였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고조선을 인정하는 듯 하지만 속 내용에 들어가면 강단사학에서는  삼국유사의 BC 2333년에 건국했다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을 신화속 인물로 규정을 하는 것이다.  단지 고조선은 BC 10세기 이후 부족국가를 이루어서 발전해나가다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고(BCE 194),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한(BCE 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한반도 북부)에 한나라가 네 개의 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고 가르친다. 그것도 지금의  북한의 평양부분에 작은 나라였던 고조선(위만)을 한무제가  무너뜨리고 식민지를 삼은 후 철기문명을 전해줘서  국가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는 온데간데없고,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한민족 고대사는 부족국가 족장형태로 건국이 되었고  3천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곳적 환단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화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 시대라 정의하였다. 지금 이들은 ‘식민사학을 극복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면 아직 식민사학 논리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고대사복원을 하려는 민족사학자들 주장에 대하여  나라가 큰 게 자랑이 아니다 라며 조롱을 한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큰 나라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와 같다 라며 강변을 한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 지배를 위해서 만든 식민사학은  한민족은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서 국가가 발전했다는 타율성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식민시대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제의 논리였다. 한민족사는 고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하고 근대에도 식민지로 발전했다는 논리다. 그런데도 해방된 지 70년이 넘고 있건만 한국 사학계는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현 역사학계는 위만이 번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만조선’이라는 것은 고조선의 서쪽 영토인 번조선을 강탈하여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자주적인 한국사를 구축하려 하였던 18세기의 실학자 안정복은 위만을 ‘권력을 부당하게 참칭한 도적[僭賊]’이라 하였다(『순암집順菴集』「동사문답東史問答」).

이와 같이 식민사학자들은 ‘BCE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단고기』가 밝힌 고조선 강역에서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고조선사를 축소·은폐하던 강단의  식민계열에서는 이제 고조선사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가점 지역을 포함한 요서, 요동, 만주 및 중국의 하북성, 산동성 일대 등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청동기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비파형 동검(중국에서는 이를 ‘곡인단검曲刃短劍’이라고도 함)이다. 비파라는 악기처럼 생긴 이 청동검은 중국 중원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비파형 동검은 청동과 아연의 합금으로 그 재질이 단단하고 강하다. 주로 납으로 만들어 쉽게 무디어지는 중국의 검과는 다르다. 청동과 아연은 비등점이 서로 달라 두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데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만으로도 4천여 년 전 고조선 문명의 높은 수준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북부뿐 아니라 충남 부여와 전남 여천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반도 전역이 내몽골, 요서, 만주 일대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했고, 고조선의 영역이 요서에서 한반도까지 걸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비파형 동검 유물 분포는 환단고기의 환단시절의 기록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자신의 논리와 다르다고  무조건 위서로 몰기보다는  학자라면 열린 자세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고조선의 청동기 제작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고조선의 수준 높은 청동 제련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여러 꼭지 잔줄무늬 거울)이다. 직경 21.2cm 안에 0.22mm 간격으로 13,000개에 이르는 가느다란 선을 넣은 다뉴세문경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주석의 비율이 27%에 달하여 매우 견고할 뿐 아니라 빛을 밝게 반사하는 이 청동 거울은 강단사학계에서 보는 것과 달리 고조선이 고도의 청동기 제작술을 자랑하는 동북아 문명의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의 거석, ‘고인돌’
고조선은 높은 수준의 청동기뿐 아니라 거석 유적에 속하는 고인돌도 많이 남겼다. 고인돌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로 동북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다. 한반도의 경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로 많은데 대략 4만 기 정도로 추정한다. 전북 고창과 같이 100여 기 이상 밀집된 곳도 있다.
고인돌에 사용된 판석의 무게는 적게는 10톤에서 많게는 300톤에 이른다. 거대한 판석을 떼어 무덤까지 옮기려면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고인돌의 모양은 음양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뚜껑돌은 양으로 하늘(아버지)을 상징하여 1개[天一]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어머니)을 상징하여 2개[地二]로 이루어졌다. 뚜껑돌, 받침돌, 피장자被葬者는 각기 천, 지, 인을 상징하여 삼재 사상을 나타낸다. 고인돌에도 신교의 천지 음양과 삼신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구실도 하였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다.

고조선의 주무대였던 만주와 요서 지역에서 발굴되는, 그 형성 연대가 더 오래된 고인돌은 차치하더라도,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인돌만 해도 BCE 2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된다.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 넬슨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대를 BCE 2665~2140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BCE 4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BCE 2000년대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본다(성삼제, 같은 책, 70쪽).

 고인돌의 출토 범위와 건축 추정 시기 또한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환단고기』가 전한 고조선의 실존을 증명한다.
하지만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한반도 고인돌의 방사능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그들로서는 애써 외면해야 할 고고학적 자료인 것이다. 학자로서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그들이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례喪禮 문화를 갖고 있었다. 정명악은 우리의 상례 문화를 단순히 중국의 유교 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 지적한다. ‘요여腰輿(혼백과 신주를 모시는 작은 상자)’ 안에 혼백상자를 만들어 넣고, 그 혼백상자를 상여 앞에 모시는 것은 신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는 유교와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상례 문화가 중국과 달랐고 중국보다 더 발달한 것은 공자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다.(孔子曰 ‘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懈,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예기』 「잡기하雜記下」). 『소학』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부루단군조에 소련대련의 부모 삼년상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환단고기 기록이 조작이라고 한다면 환단고기 기록자들은 천재와 같다. 그 시대에 정보검색이 불가능한 시대에 수많은 내용들을 전부 알고 기록을 하였다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공자는 소련과 대련 형제를 동이족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3년 상을 치른 효행의 대명사로 칭찬하였다.  공자는 동이족의 풍습을  기록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자가 東夷(동이)는 君子不死之國이라 했다고 배웠다. 그럼에도 왜 정작 군자불사지국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왜 공자는 九夷(구이)를 흠모했는가. 환단고기를 읽다보면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 (夷 東方之人也, 南蠻從蟲, 北狄從犬, 西戎從羊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동이(東夷)란 동쪽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가 있나니 (有君子不死之國),고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 나라에 가고싶다."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띄웠다 한다.
참으로 이유있는 일이로다.
欲居九夷(욕거구이)라고도  했다.
동이에서 거주하고 싶다. “동이에서 살고 싶다.” 라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도덕정치가 무너지고 패왕들이 들 끌던 시대,  동이 군주의 홍익인간에 바탕을 둔 정치적 이상에 대해 익히 알았다는 이야기다. 환단고기에는 공자가 왜 그리 이야기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환단고기는 위서 논쟁을 떠나 엄청난 정신가치관을 전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위시한 여러 역사 기록을 종합하면, 소련과 대련은 고조선 사람으로 동북아에서 3년 상의 상례를 처음으로 실행하였다. 상례 문화 또한 고조선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였던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과 저술을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 했다.(나는 옛사람의 가르침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이는 전승돼 내려오는 것을 전술(傳述)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공자 가르침의 사상적 근간은 환단시대의 동이 문화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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