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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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기반 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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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와 독립운동사】
독립운동가들의 책 환단고기를 위서로 만드는 세력들은 구한말 친일파계열 식민사학자들과 서구 열강세력에 편승한 외래사관 신봉자들이나 사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독립운동사와 환단고기가 살아나면 자신들이  설자리가 없기 때문에  기를 쓰고 환단고기 위서론 바이러스를 전파 하고 있다.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쓰인 다섯 권의 사서를 한 권의 『환단고기』로 묶은 인물은 바로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1864~1920)이다. 자신의 집안에서 보관해 오던 책과 지인들로부터 구한 책을 한 권으로 엮어 편찬한 것이다.

안함로의 『삼성기』는 운초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고, 원동중의 『삼성기』는 태천에 살던 백관묵白寬默에게서 구하였다. 『단군세기』 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뱃골 사람 이형식李亨植의 소장본이었다. 『태백일사』는 운초의 스승인 해학 이기李沂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다.

백관묵(1804~?)은 문재로 이름이 높은 명문 집안 출신으로 헌종 6년(1840) 식년시式年試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백관묵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 집안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일간지 <문화경제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아들 백삼규白三圭(1855~1920)는 유학자이자 의병장이었다. 백삼규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 운동을 시작하여, 1910년 경술국치 후 큰아들 인해仁海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농무계農務契와 환인계를 조직하여 애국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지도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부총재에 추대되었으며,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보민회保民會, 일민단日民團, 강립단强立團 등을 숙청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백삼규의 장남 인해도 독립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1921년 불심검문에 걸려 격투 끝에 순국하였고, 그 후 둘째 인제仁濟도 순국하였다. 삼부자가 모두 일제에게 희생되어 구국의 충혼으로 승화한 것이다(<문화경제신문>, “화서학파華西學派 인물열전” 246회, 2011.4.9.』 그리고 이형식은 1796년생으로 백관묵과 같은 해에 식년시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계연수가 이형식을 생원이 아니라 진사라고 부른 것은 그의 부친 이사겸李嗣謙이 진사로 합격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형식 소장본에는 『단군세기』도 합본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백관묵의 『단군세기』와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가 탄생하기까지 백관묵과 이형식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었지만, 특히 계연수와 이기의 혈성과 희생이 컸다.

이기(1848~1909)는 전라도 만경 출생으로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5세 때 향시鄕試에 나가면서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여러 고을에 알려졌다. 이기는 당시 유명한 선비들과 교유하였는데,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0~1910),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과 더불어 ‘호남의 삼재三才’라 불리었다.

이기의 문장에 대해 이정직은 “대개 백증(이기의 자)의 글은 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이 없어서 마치 꽃 중의 꽃이요, 곡식의 자양분과 같고, 따뜻하고 윤기가 있으며, 법도에 맞고 아담하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건창李建昌(1852~1898)은 “백증의 문장은 수를 놓은 비단이다”라고 평하였고, 황현도 “씩씩하고 뛰어나며, 뛰고 달리는 기운이요, 특출하게 아름답고 박학한 문장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성리학과 실학을 모두 섭렵한 이기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저항의 일선에서 애국 활동을 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찾아가서 ‘동학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임금을 받들어 국가의 질서를 새롭게 하자’는 뜻을 전했다. 전봉준은 이기의 뜻에 호응하여 남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과 협의하도록 하였으나 협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침투해 오자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을 만나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전후戰後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릴 때, 이기는 동지들과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여권이 나오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행에 실패한 이기는 동향 후배이자 동지인 나인영羅寅永(나철羅喆, 1863~1916)을 비롯한 몇 명의 독립운동가와 그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과 일본 정계 요인들에게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투쟁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그해 11월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던 이기는 곧 이어 모친상을 당해 귀향하였다. 그러나 국권이 기울어지는 위급한 시기였으므로 ‘상복을 벗어버렸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다시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들어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大韓自Ë會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이기는 교육의 목적을 국권 회복에 두고, 교육을 통하여 자강自Ë, 자급自給으로 실력을 길러 나라를 지키자고 주창하였다.

1907년에는 육순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인영,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을사오적乙巳五賊 암살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로 끝나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을 갔다. 다행히 2년 후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온 이기는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고, ‘단군 성조의 얼을 기리고 고조선의 역사를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단학회檀學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계속 펼쳤다. 하지만 끝내 국세가 기울자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절식絶食으로 62년의 일생을 마쳤다.

이기의 생애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기가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태백일사』를 쓴 이맥(이암의 현손)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기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역사서를 읽었고, 우리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그가 계연수에게 전해 준 『태백일사』도 집안의 가보家寶로 전해오던 것이다. 이러한 이기를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연수에 대한 기록은 『해동인물지』(1969)와 『정신철학통편』(1920) 외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계연수의 간략한 생애가 기록된 『해동인물지』에 따르면, 계연수의 자는 인경仁卿, 호는 운초雲樵이고 평안도 선천에서 살았으며, 이기의 문하생이 되어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한 후 무술년(1898)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太白遺史』 등을 간행하였다. 기미년(1919)에 임시정부의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에 만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정신철학통편』은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한(1916)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안경전 역주자가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서지학적 정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현 단단학회檀檀學會 회장인 양종현(1948~ )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를 통해 계연수의 실체를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양종현은 『환단고기』의 전수자인 이유립의 증언을 바탕으로 계연수의 생존 당시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소장하고 있었다.

계연수는 1864년에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 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다. 1897년(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그로부터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다.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해 5월 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두 달 후에 이기가 자진하자, 계연수가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다.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에 범례凡例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았다. 범례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집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 1943)와 오동진(1889~1944)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하였다.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일본군의 간도출병과 홍범도에 관한 기록이다. 홍범도의 호걸스런 기풍, 독립군 진영내의 분열상, 그의 전술전략, 한쪽 다리에 관통총상 등이 눈길을 끈다. 그는 청산리 전쟁 중에 총상을 입었던 것 같다.

 다음은 홍범도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홍범도 장군의 항일투쟁을 단순 명확하게 말해보면
가장 먼저, 가장 활발히, 가장 오래 투쟁을 한 우리민족의 영웅이다.
심하게 얘기해서 이순신장군에 버금갈 정도의 위대한 인물이다. 홍범도장군은 평양사람이고,정식 군인으로 평양감영의 나팔수 출신이며, 따라서 정식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당시 나팔수는 오늘날 무전병과 같아 글을 모르고선 절대 맡을 수 없는 보직이다. 어느 책을 보니까, 홍범도장군을 일자 무식꾼이라고 기술하고 있어 왜곡되게 쓴 책으로 돈벌이하는 사기꾼들이 많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잠시 금강산 초계사 스님생활을 했다. 이때이순신 장군의 적손인 스님으로 부터 각종 진법등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 비구스님과 사랑에 빠져 스님생활을 마감하고  함경도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포수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고  함경도 삼수갑산을 넘나들면서 명포수로 맹활약을 했다. 이때 험한 속의 날쌘 산짐승을 잡으려면 몇날 몇일을 사냥감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나타나면 협공해서 잡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포수들은 모두가 사격에 관해서 명사수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도 움직이는 목표물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봉오동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독립군과 왜놈들 정규군과 정면승부를 한 최초의 전투라는데 있다. 전과는 283중 46명을 사살했고 전멸 시킬 수 있었지만 갑작스런 소나기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독안에 든 쥐를 놓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왜놈들에겐 하마터면 전멸이라는 치욕을 면하는 순간이었다. 얼마후 치욕을 씻고자 혈안이 된 왜놈들이 홍범도부대를 찿고자 헤매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김좌진 부대와 조우해 벌어진 전투가 청산리 전투다. 청산리 전투의 시작은 김좌진 부대가 했지만 전투과정에서 김좌진부대는 왜놈들에게 밀려 쫓기는 위기에 빠졌지만 홍범도 장군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어 무사할 수 있었고 이때 홍범도 부대는 위기에 빠진 김좌진부대를 도움은 물론 일본군의 협공을 역이용해 일본군끼리 총질을 하게 만들어 청산리 전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러나 훗날 이범석장군(당시20세)의 자서전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소설처럼 기술해 청산리 전투가 김좌진의 공 인양 만들어 청산리 전투의 진짜 승리자인 홍범도장군(당시52세)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내는데 일조를 했다. 역사 왜곡은 아니 일제때 배운 학자들로 이뤄진 해방 초기의 역사학계는 이러한 역사 왜곡에 면밀한 연구 없이 인용해 일본군들을 그토록 벌벌떨게 한 민족의 영웅인 홍범도장군을 역사의 노숙자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항일의병 독립지사들은  한민족의 오염되지 않은 고유의 역사사서인 환단고기를 읽고 강독을 하며 대한독립과 아시아 평화를 위협한 제국주의에 강력히 항거한 것이었다. 역사관이 부족한 그들이었다면 과연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혼을 바쳐 나라를 되찾으려 했겠는가. 그 당시도 일명 지식인이었던 많은 배운자들은 역사관이 부족한 시대조류에 편승해서 사대주의에 기대어 일본을 믿고 그들 편에 섰다. 해방 후 친일세력이 득세를 하면서 이 독립운동사를 거의 역사에서 가르치지 않거나 철저히 왜곡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정신적 기반 마져 신화로 치부되어 환단고기는 한낮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서 조작된 사서로 몰아 붙였다.


 보급품을 구할 수  없었던 독립군으로서는 교포의 큰 부락을 만나지 못하면 거의 몸에 지녔던 소금 섞은 좁쌀가루로 굶주림을 달래지 않을 수 없었고, 때로는 강냉이나 날밀떡,호박 같은 것도 구할 수 없어서 세 네 끼씩 굶기가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백 여근의 무장을 봄에 걸치고 하루에 백 수십리 길 험산 황야를 갈로질러 강행군하면서 피가 튀는 치열한 전투까지 치루었던 것이다. 그 배고픔, 그 추위, 그 투지가 아직 숨소리의 갈피엔 배여 있다. 어찌 내 이를 잊을 수 있으랴!

영하 삼 사십도의 혹한에 눈산이 부서져 나리는 듯한 눈보라 속에서 비록 때 늦게나마 면군복(솜군복)을 입게 되는 것은 천만다행의 행운이었던 일인저! 그뿐이랴. 중상한 전우가 자살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절을 눈 앞에서 목도해야 했고, 경상자에게도 소독약 한 번 써본 일이 드물었다.』
 

범례에서 계연수는 “환단 이후로 계속 전수되어 온 삼일심법三一心法(태고 시대 동방의 우주사상의 핵심)이 진실로 이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동방 대광명의 참 진리가 중흥하는 기틀이 아니고 무엇이랴! 손발이 절로 춤추며 흥겨워 외치고 싶고 기뻐서 미칠 듯하도다!”라고 벅찬 심정을 토로했다. 발간 의의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요, 또한 민족 문화의 이념을 표출하게 되었으니 크게 경축할 만한 일이며, 또 한편으로 세계 인류가 대립을 떠나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더욱 경축할 만한 일이다”라고 밝혔다.

1914년(51세) 대영절에 계연수는 단학회 동지들과 평안도 삭주 천마산에서 천제를 올리고 혈맹을 맺어 ‘역사 회복 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다짐하였다. 이듬해 10월 단학회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기면서 관전현 홍석랍자紅石拉子에 배달의숙倍達義塾이라는 교육기관을 열어 청년 학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인 천마대天摩隊,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민사義民社, 벽파대碧波隊,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에 속한 단원들의 사상적 계몽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단학회가 결성된 지 10년이 지난 1919년 3월부터 기관지 <단학회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제8호까지 발간하였다.

『환단고기』를 간행한 후 역사 회복뿐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던 계연수는, 조선인의 민족혼 말살과 역사 파괴에 혈안이 된 일제가 검거할 제1순위 대상이었다. 결국 계연수는 1920년(57세)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의 덫에 걸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일제는 그의 사지를 절단하여 압록강에 버리고 배달의숙 건물에 불을 질러 계연수가 소장하던 3,000여 권에 달하는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 버렸다.

조선이 일본 제국의 흉포한 야욕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고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때, 인류의 창세사와 한민족의 9천 년 국통 맥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국사학의 아버지’ 계연수는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환단고기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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