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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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실제상황 중] 일본의 만행과 역사왜곡의 실상

운영자 0 83
한민족 정복을 위한 일본의 식민 정책

역사학자 토인비가 남긴 명언이 있다.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역사를 말살하라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 이것을 어느 제국주의 국가보다도 철저하게 실천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그들은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조선의 민족혼을 뿌리 뽑기 위해 온갖 잔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직후,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불온서적을 수색한다며 군경을 동원, 마치 군사작전을 하듯 전국 각지에서 20만 권의 사서를 강탈, 소각하였다.8) 그리고 1916년부터 3년 동안 조선사를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또 한 차례 사적을 거둬들여 그 가운데 희귀한 비장사서들은 일본으로 가져가 깊이 감춰 두었다. 이 사실은 일본 궁내성의 왕실 도서관에서 12년 동안 근무했던 박창화(1889~1962)에 의해 폭로된 바 있다.9)

그러나 기미년에 거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무단통치와 사서 말살만으로는 한민족의 항일의지와 역사 혼을 근원적으로 뿌리 뽑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항구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치밀하고 조직적인 역사왜곡 정책을 세우게 된다.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부임하자마자 기존의 문맹화 정책을 바꾸어 전국에 이른바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문화통치 교육시책을 하달했다.

이마니시 류의 한국 상고사 조작극

■석유환인昔有桓因

민족혼을 없애버림으로써 영원히 조선을 지배하려 한 일제는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를 하수인으로 내세웠다. 이마니시 류는 『삼국유사』 「정덕본」의‘석유환국昔有桓j 의 ‘((國의 속자)’ 자를 ‘因’자로 조작하고 이것을『삼국유사』 「경도제대 영인본」으로 배포하였다. 즉,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는 내용을 “옛적에 ‘환인’이 있었다”고 바꾸어 버림으로써 한 국가의 실존 역사를 한 인물의 신화로 뒤집어 버린 것이다.

역사 조작극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환인! 글자 하나를 변조시킴으로써 조선 민족사의 뿌리를 완전히 말살한 이 해괴한 조작의 망령에 사로잡혀 오늘날까지도 한민족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

조선역사의 뿌리를 밑둥이까지 들어낸 이마니시 류는 한민족사의 중간 역사도 가위질하여 고대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는 과거 중국이 조작·왜곡한 한국 고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사군 대동강설이다. 그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귀신도 하지 못할 땅 뜨는 재주’를 부려서, 고대 요서에 있던 지명을 대동강변에 옮겨놓은 것이다. 거기에 낙랑·임둔·진번·현도군이라 이름을 붙인 그는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 되어 ‘점제현신사비’ 같은 가짜 유물을 대동강변에 묻어 놓고 한나라 4군의 유물이 나왔다고 사기극을 벌였다.

한반도 북부를 중국 식민지로 만든 그는 황국사관으로 날조한 『일본서기』 기록과 사카와 중위가 조작한 광개토대왕 비문 내용을 끌어들여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두고 한반도 남부를 식민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남선경영南鮮經營’의 논리이다.

그리하여 조선은 고립무원의 고단한 삶, 그 야만의 상태에서 개화의 안내자인 일본의 도움을 받아 서구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멸망당하지 않고 겨우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끝나지 않은 일본의 만행

지난 20세기 중반 독일과 더불어 침략 전쟁과 비인도적인 만행을 저지른 일본은 독일과는 달리 패망 후에도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한 역사 왜곡의 망상을 떨쳐 버리지 못한 채 최근 또다시 우리 민족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그들은 극우단체가 침략사관으로 왜곡한 역사교과서쫡를 국가 검정 교과서로 채택하여, 4세기 후반부터 200년 동안 한반도 남부를 식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역사의 진실인 양 가르치고 있다.

그들 우익세력의 망언을 들어보라.

장차 또 한일합병이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이거야말로 만만세다. 전쟁 때는 일본인도 똑같이 징용당했다. 지금에 와서 ‘한국인 강제연행’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한일합병을 침략이라든가 식민지화였다고 생각한다면 구제할 길이 없다.(히로시마시의회 니시무라 도시조 의원, 1987년)
근래에 이르러 그들은 패전 이후 ‘제국주의 침략과 결부된 이미지를 상징한다’ 하여 금지되었던 국가 기미가요(君が代)쬃와 국기인 히노마루(日の丸)쫮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고이즈미 총리는 후쿠오카 법원이 내린 위헌판결도 무시하면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있다. 또다시 극우화의 강력한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침략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1998년과 2002년 11월, 첨단무기로 무장한 자위대 병력을 동원하여 동경도東京都 남쪽 해상에 있는 이오시마硫黃島에서 독도 점령 훈련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예 국정교과서에다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공표하였다.

|일본 고대사의 진실 |

그러면 이렇듯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억지 부리는 일본 고대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약 1~3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일본 열도는 한반도와 연륙되어 경계가 없었다. 그 때 한반도로부터 이주민이 육로로 건너가 지금의 일본지역에 정착하였다. 시베리아와 한반도에서 흔히 발견되는 면도날처럼 예리한 세석기(좀돌날 몸돌)가 일본 큐슈섬 후쿠오카현 일대에서도 발굴되었음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또한 최근에는 일본인의 다수가 한국인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연구결과가 국내외에서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 일본인들의 혈통이 한민족과 거의 동일하며 어느 민족보다도 유전적으로 밀접하다는 것이다. 헤이안平安시대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보면 고대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인 기내畿內 지방의 1,182개 성씨 가운데 한반도에서 이주한 성씨로 확인된 것만 해도 무려 324개나 된다. 또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기내 지역 인구의 80~90%가 백제인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문물을 전수받아 이룩한 일본 고대사의 실체가 단순한 문화 전수 차원을 넘어선 한민족의 이민사였음을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다. 일본 열도를 향한 한민족의 이주·개척의 물결과 문물 전수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여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고대 한민족은 일본 열도에 문화를 뿌리내린 선진문화의 주인공이었다. 즉, 한국은 일본의 정신적 조국이며 고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가르침을 준 스승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니 일본은 지금 얼마나 비열하고 끔찍한 배사율背師律을 범하고 있는 것인가! 가을개벽의 정의의 칼날에 의해 단호히 바로잡혀야 할 너무도 큰 불의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개벽실제상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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