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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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실제상황 중] 상고사 시대의 최고 전성기, 단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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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

초대 환웅이 배달국을 개국한 지 약 1,500년이 지난 18대 환웅에 이르러 한민족은 역사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단군 성조의 ‘고조선古朝鮮’시대가 열린 것이다. 

고조선의 시조 단군왕검은 웅족으로 배달국 말기인 BCE 2370년 5월 2일에 탄생하셨다. 태어날 때부터 신령스러운 덕을 갖춘 단군은 나라 안팎에서 존경을 받아 14세 때 웅씨 부족의 왕을 보좌하는 비왕裨王으로 임명받고 24년 간 국사를 섭정하며 경륜을 쌓았다. 그러다 38세 때 웅씨 왕이 전사한 후, 배달국 말기의 혼란을 바로잡고 천제의 아들로 추대되어 제위에 오르셨다. 지금으로부터 4,338년(2005년 기준) 전의 일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나도 단군의 자손이니라”(2:26:3)라고 하셨다. 단군왕검께서 송화강 아사달쫡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한 고조선은 엄연한 실존국가인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254년에 위나라 왕침王沈이 편찬한 『위서魏書』에도 남아 있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분이 계셨다.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다”고 하였다.

『위서』는 ‘요임금과 동시대에 단군왕검이 조선을 개국하였다’고 직필하였다. 그런데 이 책도 다른 여러 사서와 마찬가지로 동방 고조선 역사의 틀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후대 한족 역사가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말았다.

|왜곡된 삼한 역사의 진실|

단군왕검은 환국과 배달시대의 대도인 신교를 계승하여 신교의 삼신관, 즉 삼신이 품고 있는 광명의 원리를 근본으로 치화治化의 도를 역사 속에 실현하셨다.57) 삼신은 본래 한 하나님이나[三神一體] 만물을 창조할 때 세 가지 덕성을 펼치신다(3부 참고). 우리 조상들은 신의 세 가지 본성을 그대로 역사에 구현하는 것을 신을 잘 모시고 신과 하나 되는 진리 체험의 길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단군왕검은 삼신의 덕성, 즉 조화신造化神, 교화신敎化神, 치화신治化神을 바탕으로 조선을 삼한, 즉 진한辰韓, 번한番韓, 마한馬韓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신교문화의 삼신사상이 국가 통치원리, 국가 경영원리로 제도화된 것이다.

이 가운데 고조선 강역의 중앙인 만주에 자리 잡은 진한이 삼한의 중심국으로서 단군왕검이 직접 다스렸다. 그리고 요서와 한반도에 자리 잡았던 번한과 마한은 각기 단군을 보좌하는 부단군이 다스렸다. 진한의 대단군만이 병권을 장악하고, 번한과 마한의 부단군은 대단군의 명을 받들었다. 이를 일컬어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 한다.58) ‘고조선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인 삼한관경제는 고조선사 왜곡의 최대의 핵심 문제로서 한민족사의 뿌리문화(삼신세계관)와 정통성을 바로잡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일찍이 한말의 애국지사요 민족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삼한관경이 고조선의 국가 경영 원리였음을 밝혀냈다.

선생은 맨몸으로 북만주를 누비며 한반도의 남쪽 삼한시대 이전에 만주, 요서, 한반도에 걸쳐 광대하게 뻗어 있었던 단군조선의 삼한시대가 실재했음을 입증했다. 그리고 본래 단군조선의 통치 강역을 뜻하는 대륙 삼한을 ‘북삼한(전삼한)’, 고조선이 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한반도 한강 이남으로 대거 이주하여 소규모로 재건한 반도 삼한을 ‘남삼한(후삼한)’으로 확연히 구분지어 주었다.
그렇다면 현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그들은 삼한관경제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신교의 삼신문화에 대한 우주론적 인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본래의 삼한에 대해 무지한 채, 한강 이남의 소국가 연맹체인 남삼한(가야·신라·백제의 전신으로서의 마한·진한·변한)만을 삼한으로 알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민족의 웅대한 역사 혼을 축소시키기 위해 고려·조선의 사대주의 학자와 일제 식민사학이 조작한 소한小韓주의 반도사관이다.

단재 선생은 일제의 탄압과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남삼한에서 북삼한, 반도에서 대륙의 역사로 우리 민족 본래의 역사 혼을 개안시켜 주었으며, 소한주의 반도사관을 본연의 ‘대한大韓주의 대륙사관’으로 바로잡는 불멸의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렇건만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친일 사학자 잔당들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활개를 치면서, 오직 반도삼한만을 고집하고 있다.

|청동기 문명과 신교문화로 강성했던 고조선|

최근 고고학의 발굴에 의해 BCE 2400년경, 만주의 요령지역에 청동기 문명이 펼쳐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청동기 문명의 대표적인 유물로 꼽히는 비파형 단검이 발해 연안 북부와 송화강 유역의 만주 지방, 한반도 등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었는데, 그 출토 범위가 고조선의 강역과 일치한다.

이를 통해서 청동기 문명의 주인공은 중국 한족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민족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고조선은 당시 동북아 문명의 주역으로 실존했던 선진국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의 고토古土인 중국 대륙에서 살아 본 사람이나 그곳을 여행해 본 사람은 ‘우리나라 고대사와 조선문화의 뿌리를 알려면 만주 땅을 가 봐야 한다’는 불문율을 확신하게 된다. 민족정기가 고갈되어버린 오늘날, 다행히도 만주 땅에는 민족사 부활의 영감을 강렬히 불러일으키는 우리 신교문화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고대 부족국가인 동예東濊의 제천행사로만 알려진 ‘무천舞天’이 고조선의 풍속이라고 적혀 있는 당나라 시대의 문헌(650년)을 최근에 국내 학자가 처음으로 찾아냈다. 인천 시립박물관 윤용구 박사는 “돈황 문서 가운데 고구려사 관련 내용을 담은 「토원책부兎園策府」61)라는 필사본을 검토하면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토원책부」는 지금은 사라진 문헌인 『위략魏略』을 인용하면서 ‘고조선에서 10월에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그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牛蹄占을 행했다’고 기록해 놓았다”고 공개했다.

이 고조선 문화의 바탕은 배달국으로부터 내려온 신교이다. 고대 한민족이 가졌던 문화사상의 총결정체인 신교는 고조선의 정치, 경제, 종교, 풍속, 지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당시 동북아의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이다. 구소련의 역사학자 유엠 푸진은 신교가 크게 흥했던 고조선은 최소한 천 년의 세월 동안 중국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켰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방의 학자도 이 정도는 알고 인정하는데 정작 후손된 우리는 근 2천 년 동안 외래사상에 오염되고 역사의식이 완전히 고갈된 나머지, 실존했던 조상 이야기를 ‘호랑이와 곰의 신화’로 치부하면서 제 뿌리를 부정하고 있다.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조선, 어떻게 망했는가|

두 번의 천도

고조선은 건국한 지 1,048년이 지난 22대 색불루 단군에 이르러 백악산 아사달(현재의 길림성 장춘)로 천도하게 된다. 원래 단군의 자리는 아들에게 세습되거나 오가 중에서 가장 덕망이 높은 사람에게 전해졌다. 그런데 색불루 단군은 정치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단군의 자리에 오른 뒤, 도읍지를 자신의 근거지인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그리고 그동안 병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번한과 마한에 병권을 일부 나누어 줌으로써 삼한 체제의 동요가 서서히 일기 시작하였다.

이후 860년 동안 삼한제도로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며 번영을 누리던 고조선은 43대 물리 단군의 재위 말기인 BCE 426년에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사냥꾼 두목 우화충于和沖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우화충의 무리들은 백악산 아사달의 도성을 급습, 점거하였고 물리 단군은 피난길에 붕어하고 말았다. 이는 마치 후한後漢 말기의 황건적의 난이나 당唐나라 때 안록산의 난처럼 고조선을 망운으로 몰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구물丘勿 장군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규합하고, 때마침 도성에 밀어닥친 홍수에 힘입어 반역의 무리를 손쉽게 소탕한다. 그 후 구물 장군은 모든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44세 단군으로 즉위한 뒤,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로 개칭하고 백악산에서 장당경(요령성 개원)으로 천도하였다.

그런데 고조선의 이 마지막 천도에 대해 『삼국유사』 「고조선기」는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기 때문’이라고 엉뚱하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중국에서 왜곡 날조한 가공의 역사를 꿰맞추기 위해 고조선사의 허리를 자르고 기자조선을 끼워 넣은 것이다. 이는 당시의 학자, 승려, 관리들이 얼마나 모화사대慕華事大사상에 물들어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삼조선 체제로의 개편과 고조선의 몰락

구물 단군이 반란을 진압하고 등극하였으나, 혼란의 와중에서 이미 진한의 중앙정부 권력은 크게 약화되고 번한과 마한의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이에 삼한관경의 체제는 무너지고 대신 두 분조分朝의 독립된 병권이 인정되는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쫡 체제로 개편되었다. 중앙정부인 진조선의 권한이 축소되고, ‘좌우의 두 조선’이 형식적으로 진조선을 받드는 형국이 되자 장군들의 반역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고조선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BCE 238년, 47세 고열가古列加 단군에 이르러 마침내 고조선은 2,096년의 장구한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고조선 멸망을 바로 앞둔 BCE 239년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일으켜 고조선의 국통을 계승하였으며, 그 후 BCE 194년에는 번조선 준왕準王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들어온 한족 위만에게 나라를 찬탈당하게 된다.

여기서 또 필자는 지금의 혼 빠진 역사학계를 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사가들은 마치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고조선이 한족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준왕은 고조선의 서쪽 날개였던 번조선의 부단군이었을 뿐이다. 더욱이 진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고열가 단군이 장수들의 거듭된 화란 속에 퇴위하여 고조선 본조시대가 마감된 것은, 찬적纂賊 위만이 번조선을 점거하기 4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특히 고열가 단군 시절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춘추시대BCE 770~BCE 403, 전국시대BCE 403~BCE 221)의 혼란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당시 한족이 고조선을 위협한다거나 고조선을 찬탈할 여력이 어디 있었겠는가! 요컨대 단군조선은 지금의 강단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 한족의 위세에 눌려 망한 것이 아니다. 병권을 셋으로 나누어 삼조선이 독자적으로 나라를 경영하게 됨에 따라 국력의 구심점이 없어져서, 내란에 의해 스스로 멸한 것이다.

고조선은 원래 신교의 제사장인 단군왕검이 삼신일체의 원리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던 신정神政국가였다. 따라서 삼한제도의 쇠퇴는 곧 종교의식의 약화에 따른 신교문화의 붕괴 과정으로 보아야 하며, 그 첫 번째 과정이 바로 삼한(진한, 번한, 마한)에서 삼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개편된 것이다.

요컨대 고조선은 47대 단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실존 국가라는 것, 삼한관경제로 국경만 셋으로 나누어 대단군이 병권을 장악하고 전체를 다스렸다는 것, 그리고 수도를 송화강의 아사달 → 백악산 아사달 → 장당경으로 세 번 옮기면서 고조선 말기에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바꾸었다는 것, 이것이 신교문화의 정통사서가 전하는 고조선 역사의 참모습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바르게 알려면 무엇보다 47대 단군들에 대한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식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땅에는 2천여 년에 달하는 고조선 역사의 알맹이와 그 멸망 과정의 진실이 모두 증발되어버린 엉터리 역사서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현행 초중고교 역사 교과서를 보라. BCE 2333년 단군의 건국 사실은 언급하면서 정작 개국조 단군은 실존 인물도 신화의 주인공도 아닌 애매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또한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BCE 10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이유로 삼아, BCE 24세기 고조선 건국이라는 문헌상의 연대를 부정하고 있다.62)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역사를 이끌어간 주체가 전혀 없는 유령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대한의 아들딸이라면 어찌 가슴 치며 통곡할 일이 아니겠는가!

|위만조선의 진실|

그러면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盧튷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그의 반려자인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는데, 이 때 연燕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년). 좬삼국유사좭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위만이 상투를 틀고 조선인 복장을 하였다 하여 조선의 유민이라 하였는데, 현행 국사학계에서 이를 정론으로 받아들여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엉터리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기」에서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하였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李相龍(1858~1932)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 하였으며, 신채호 선생은 ‘(위만조선은) 우리의 변강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이다.

위만조선은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밖으로는 한 무제의 침입과 안으로는 지도층의 분열로 인해 결국 망하게 된다.(BCE 194~BCE 108) 사필귀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위만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은 결코 용납할 수 없고 성립될 수도 없다. 위만조선이 아니고 ‘위만왕조’라든지 ‘위만정권’이라는 언어를 써야 마땅할 것이다.


[개벽실제상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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