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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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과 증산도 중]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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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한국사의 실제적 기원은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시작되었는가?


한국의 주류사학의 주장은 단군조선은 신화이기 때문에 실제적 한국사의 시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의식 때문에 ‘고조선은 단군이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여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이 기술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 신화시대를 거쳐서 실제적 한국사 기원은 주나라에서 조선후(朝鮮候)로 임명한 기자(箕子)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국이 자행한 또 다른 한민족사 왜곡인 기자箕子조선설입니다. 문화를 전해준 스승국이자 천자국(天子國)인 단군조선을 지워버리고 신하국가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라, 상(은)나라를 이은 주나라가 건국되던 때인 지금부터 약 3,100년 전, ‘주나라 무왕이 기자라는 인물을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사기』)는 기록을 근거로 중국은 한국의 고대사가 중국의 제후국, 즉 식민지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단군세기」의 기록을 보면 상(은)나라의 왕족인 기자는 나라가 망하자 고향을 떠나서 산서성 태항산太行山 서북 땅으로 피하여 살았고, 말년에는 고향 땅인 지금의 하남성 서화西華로 옮겼다가 산동성 조현曹縣에 묻혔습니다. 주나라가 막 건국된 이때는 단군조선의 25세 솔나 단군 시절입니다. 이 기자조선설은, 중국 기록에서 전하는 여러 가지 모순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중국의 억지 주장일 뿐입니다. 우선 기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담고 있는 중국의 『서경』에는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조선의 왕 운운하는 이야기는 그로부터 훨씬 후대인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 나옵니다.

그런데 『사기』의 기록 자체도 모순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라는 구절 다음에 ‘신하로 삼지 않았다(而不臣也)’는 구절이 나옵니다.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삼았다면 기자는 당연히 주나라의 제후이자 신하가 되었을 텐데, 그런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자가 고조선 지역으로 넘어왔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봉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동방 땅에 조선이란 나라가 그때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실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주류사학계에서는 단군조선이 기껏해야 기원전 10세기경에 부족국가형태로 건국되었다고 합니다.(송호정 교수는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가 기원전 10세기경 이라고 주장이나, 경기도 양수리 청동기는 기원전2,600년 전 것으로 밝혀졌고, 전남 영암군 장천리 주거지유적에서는 서기전 2630, 2365년인 청동기 유물이 나왔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포함한 30여권의 사서에는 “구려의 임금인 치우가 금속무기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구려는 동이東夷을 말합니다. 청동기 발굴 결과는 이런 사서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홍산문명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초기 청동기 문화의 상한 연대는 서기전 2500년 까지 올라갑니다. 이로써 기원전 10세기 전 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잃습니다. 오히려 삼국유사 기록대로 기원전 25세기가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이 사실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송호정 교수는 고조선이 3,000 여 년 전에 소규모 부족국가 시대를 겪다가 2,200년경 위만조선의 철기문명이 전해지면서 국가기능이 갖추어지면서 전성기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군조선이 기껏 길어야 3000 여 년 전에 부족국가시대를 열고 기자조선으로 이어지고 기원전 190년 전에 위만조선으로 계승되고 기원전 108년 우거왕 때 한무제에 의해 망하고 이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삼국유사의 고조선 건국 기록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이자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와 완벽히 일치를 합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중국을 떠받들던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날조된 기자조선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더욱이 기자를 ‘당시 문자도 없이 야만 상태에 머물던 한민족에게 문화를 전해준 존귀한 스승이자 은인’으로까지 숭배했습니다. 고려 시대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그대 나라에 기자의 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우리 관료들은 송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평양에다 가짜 기자묘와 사당을 짓기까지 했습니다. 동방의 대철인이라 불리는 이 율곡과 이 퇴계 마저도 한 목소리로 기자를 높이 찬양했습니다. 다행히도 근래에는 국내 학계에서 기자조선설을 조작된 기록으로 보고, 더 이상 단군조선의 역사에 기자조선을 끼워 넣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송호정교수는 EBS 교육방송에 나와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의 계승자라고 가르칩니다. 기자조선의 망령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하나의 역사 조작극은 위만 조선설입니다. 삼조선三朝鮮은 바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상고사를 모독하는 또 다른 왜곡이 바로 위만정권을 위만조선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위만이란 인물은 한마디로 배은망덕의 표상입니다.
위만은 본래 연나라 왕 노관의 심복 부하였습니다. 한 고조 유방의 고향 친구인 노관은 서기전 195년에 한 고조가 죽고 여태후의 숙청이 시작되자 흉노로 도망을 하였습니다. 이에 갈 곳이 없어진 위만은 상투를 틀고 조선인 복장을 하고서 부하 1천명을 데리고 번조선으로 들어와 거짓 투항을 했습니다. 마음이 착한 준왕은 그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박사로 임명하고 서쪽 변방인 상하운장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였습니다. 상하운장은 지금의 난하 서쪽 지역에 위치한 국경 요새이고, 난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 근처를 흐르는 강입니다. 전국시대 이후 진한교체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족이 피신 와서 살고 있던 그곳의 수비대 책임자로 같은 한족인 위만을 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위만은 그곳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이듬해에 왕검성을 쳐서 한순간에 준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BCE 194 그로부터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번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을 내쫓고 왕검성을 차지했습니다(서기전 194년). 이렇게 자기를 구해준 주군인 준왕을 쫒아내고 시작된 위만정권을 일본은 위만조선이라 하여 단군조선의 정통 계승자로 둔갑시켰습니다『북부여기』. 송호정 교수는 일본의 식민사학 그대로를 추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군조선을 신화의 나라로 왜곡하고 위만조선으로부터 조선의 실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기자조선이 중국이 내세우는 조선이라면, 위만조선은 일본이 내세우는 조선입니다.

단군조선의 실체를 부정하고 위만조선을 내세운 일본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조선의 역사를 일본 역사보다 더 짧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에 개국하였고 위만조선은 서기전 190년경에 시작되었으니, 이 위만조선설로 한국의 역사를 무려 2,150년이나 잘라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이 조선(2,200년)보다 더 장구한 역사(2,600년)를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부각시킨 위만조선은 광복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 교과서에 버젓이 살아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하나같이 위만을 준왕의 계승자로,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이은 것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역사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는 위만조선이 아니라 서기전 239년에 해모수 단군이 세운 북부여입니다. 삼조선(삼한: 진조선·번조선·막조선)으로 구성된 단군조선의 중앙정부는 만주의 진조선(진한)이고, 그 진조선을 이은 나라가 바로 북부여인 것입니다. 위만이 차지한 번조선은 진조선의 서쪽 날개였을 뿐입니다.

「북부여기」에 따르면 위만이 준왕에게 망명할 무렵(서기전 195년), 동북아의 천자인 해모수 단군은 늙고 병들어 임종 직전에 처해 있었습니다. 해모수 단군은 부단군인 번조선(번한)의 준왕에게 ‘위만을 결코 받아주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심성이 착하고 우유부단했던 준왕은 해모수 단군이 붕어한 뒤 위만을 받아들여 한나라와의 국경 지역에 있는 상하운장의 수비대장을 맡겼습니다. 이에 몰래 무리들을 모아 세력을 기른 위만은 1년 뒤 왕검성을 쳐들어와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후 약 90년 뒤 손자 우거에 이르러 위만정권(소위 위만조선)은 한나라의 침략 때 지도층의 내분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한마디로 위만정권은 한민족의 국통맥이 단군조선에서 북부여로 이어지던 때에 서쪽 변방을 잠시 찬탈했던 반란 정권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쳐들어온 강도가 우리 부모를 내쫓고 안방을 차지하고서 ‘오늘부터 내가 너희들의 부모다’라고 한 패악의 역사가 바로 위만정권인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한국의 주류사학에서는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의 정통 계승자라는 것입니다

 

『한민족과 증산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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