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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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위서론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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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위서론 비판.

주류사학계에서 민족사학을 ‘사이비 역사학’ 운운하며 일본 제국주의 시절보다도 더 혐오하고 탄압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중심에는 식민사학을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는 민족사서 『환단고기』가 있다. 『환단고기』는 왜곡된 우리 역사의 진실을 소상히 밝혀 주고 있어,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학계가 식민사관을 그대로 추종해 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식민사학계가 누려 온 학문적 위상과 권력을 위협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환단고기』는 그들이 반드시 없애야 할 눈엣가시와 같은 책이요, 『환단고기』가 담고 있는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는 민족사학은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민족의 고대사와 국통 맥을 밝혀 줄 사서들이 중국과 일본 등 외세의 침탈과 내부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정통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이다.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李陌 (1455~1528)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행촌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자는 정부井夫,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1474년(성종 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는데, 장숙용張淑容(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믿고 분에 넘치게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리다가 미움을 사서 50세(1504)에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

이때의 귀양살이에 대해 이맥은 ‘근신해야 할 처지였기에 아주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고 하였다.〔處宜謹愼 頗爲無聊〕『태백일사』, 이맥은 그 먼 곳으로 집안에서 간직하던 책 상자를 가지고 갔다. 그 상자에 담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역사책과 귀양살이 하기 이전에 노인들에게 들은 역사 이야기를 기록한 문서를 살피며 2년의 세월을 보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사간원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이의를 제기한 대신들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머물렀다. 성품이 강직한 탓에 조정에 적이 많았던 까닭이다. 1517년(중종 12)에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려 할 때에도 이맥은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66세 때인 1520년, 이맥은 실록을 기록하는 찬수관撰修官이 되었다. 찬수관이라는 직책은 이맥에게 일생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지난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춰 두었던 상고 역사서를 마음껏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맥은 그 금서들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 시절에 정리해 둔 글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고,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라는 뜻으로 『태백일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서 태백은 큰[太] 밝음[白]이란 뜻으로 태백의 역사란 ‘동방 한민족의 대광명의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 위배되는 학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이렇게 비장된 『태백일사』는 고성이씨 27세손이던 해학海鶴 이기李沂에게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안함로의 『삼성기』는 운초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고, 원동중의 『삼성기』는 태천에 살던 백관묵白寬默에게서 구하였다. 『단군세기』 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뱃골 사람 이형식李亨植의 소장본이었다. 『태백일사』는 운초의 스승인 해학 이기李沂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다.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쓰인 이 다섯 권의 사서를 한 권의 『환단고기』로 묶은 인물은 바로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1864~1920)이다. 자신의 집안에서 보관해 오던 책과 지인들로부터 구한 책을 한 권으로 엮어 편찬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중국과 일본이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로, 동북아 역사의 진실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땅의 주류 강단사학자들은 실증사학을 부르짖으면서도, 짧게는 1백 년 전에서 길게는 수천 년 전부터 유적지로 보존돼 내려온 곳을 답사조차 하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환단고기』에서 사용한 몇몇 술어와 문구만을 트집 잡아 『환단고기』를 부정한다. 이로 인해 많은 중고등학교 역사 교사, 일부 국민들까지 일본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뿌려 놓은 『환단고기』 위서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환단고기』는 위서’라고 떠들고 있다.

그들은 이유립李裕岦이, 계연수桂延壽라는 가공인물을 내세워 평생을 『환단고기』 위작에 힘썼다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이유립은 1980년에 『환단고기』의 원문에 현토를 달고 주석을 붙인 『환단고기정해』를 발표하였다. 이 글을 읽어 보면 이유립도 『환단고기』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잘 모르겠다고 한 표현이 여기저기 등장한다. 이유립 자신이 만든 책이라면 왜 잘 모르겠다고 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한다. 바로 그가 지어낸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립은 원전과 차이가 나거나 문맥에 문제가 있을 경우 『환단고기정해』에서 원문 글자를 고친다고 주석에서 밝혔다. 따라서 이유립이 오랫동안 『환단고기』를 연구하며 일부 교정을 봤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다.

『환단고기』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여타의 사서에 없거나 그동안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위서론자들이 『환단고기』를 위작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기간은 일반인이 전문서적을 구하기 쉽지 않던 시절인데 어디서 그 많은 책들을 구해 읽었고, 전문 역사학자들도 잘 몰랐던 내용들만 어떻게 꼭 집어 찾아내 『환단고기』를 엮을 수 있었을까? 더구나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삼신오제본기」나 「소도경전본훈」 등에 담긴 심오한 사상과 철학적인 내용을 과연 이유립이 창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만 가져도 절대로 한 사람이 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천문현상, 역사기록, 고도의 우주관과 정신철학 및 동양철학의 음양오행, 상수학, 종사문철宗史文哲(종교,역사,인문, 철학)을 두루 꿴 학문의 깊이에 감탄이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이유립 선생이 혼자 창작을 한 위서라면 오히려 천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인간이 일생을 살며 이렇게 방대한 영역을 공부하고 깊이 있게 깨우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과연 환단고기를 일고의 역사적 가치도 없는 위서라고 비판하는 자들은 『환단고기』를 비판할 만한 학문적 소양은 있는 사람들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돼지에게 보배를 던진들 가치를 알겠는가?

우리는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고,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조선상고사》를 현대사에 쓰여졌다고 하여 위서라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고서를 충분히 고증하여 고조선의 역사를 복원하였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사서들은 고려중기 이후 사대주의자들이 대권을 잡은 이래 어쩔 수 없이 비장하여 전수되었고, 1911년 계연수 선생에 의해 합본이 된 것이다. 『조선상고사』처럼 기존 사서를 근거로 하여 새로 쓴 사서도 아니다.

전대의 사서를 총합하여 쓴 청나라 때 쓴 『사고전서』가 후대에 쓰여졌다고 하여 위서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현존하는 경전과 역사서도 원본 그대로 전하는 것은 없다. 현존하는 경전들이 후대에 보정을 하여 주석을 붙여 쓴 경전이라고 하여 위서라고 하지 않는다. 『성경』도 20세기 초 위서론 논쟁이 휘말렸지만 인류사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역사란 그렇게 이어져 가고 시대에 맞게 재해석되어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위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면 왜 사람들이 주류사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생명력이 사라진 박재된 학문처럼 돼가는 것일까? 핵심은 주류사학이 민중과 민족을 떠난 역사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나라와 역사를 지키고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지사들의 뜨거운 충정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주류사학은 민족혼을 느낄 수 없는 민중과 괴리되어 있는 죽어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 위서론 비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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