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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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과 증산도 중] 삼한관경제의 쇠퇴와 무너지는 고조선

운영자 0 491

삼신三神의 신교사관神敎史觀으로 국가를 운영하던 단군조선은 21세 소태 단군 말, 개국 후 처음으로 국가 위기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고조선 개국 이후 첫 번째 국가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국가 운영의 근간인 삼한관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개사원 욕살(지방장관) 고등高登과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 사이에 일어난 권력 투쟁이 그 발단이었습니다.

소태단군은 순행 길에 옥좌를 이양할 의사를 밝히며 서우여에게 제위를 넘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보위에 오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색불루에게 국새를 넘겨주었습니다. 이에 서우여가 마한, 번한의 군대와 연합하여 색불루에게 강력히 저항하면서 삼한의 군대가 서로 맞서 싸우는 내전이 발발하였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져서 내전은 가까스로 종결되었지만, 자칫 삼한관경제가 붕괴될 뻔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정권을 탈취하고 22세 단군으로 즉위한 색불루단군은 백악산 아사달(길림성 장춘)로 천도하여 고조선의 제2왕조 시대를 열고 국정쇄신을 위해 삼한(진한, 번한, 마한)을 삼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삼조선 체제에서도 삼한 체제와 마찬가지로 진조선이 병권을 가졌지만, 이미 예전의 삼한관경제가 아니었습니다. 삼신의 덕으로 국가를 운영하던 성인정치 시대에서 쿠데타를 통한 패권정치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때는 중국에서는 은, 주 교체기로 BCE 1,286년이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색불루 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습니다. 8조금법은 여덟 가지 죄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 시대 최초의 성문법입니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회 분위기와 경제 질서가 그만큼 통제가 안 되고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단군조선 제2 왕조 시대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병권은 예전처럼 진조선의 대단군이 가졌지만, 삼조선의 결속력은 점차 약해졌습니다. 당시 고조선은 신교 문화의 성소聖所인 소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약해지고 빈부 격차와 계급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43세 물리단군 때에 이르러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냥꾼 우화충于和冲의 역모가 그것입니다. 장군을 자칭한 우화충이 무리를 이끌고 도성을 공격하자, 단군은 피난에 나섰다가 도중에 붕어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반란군을 평정하기 위해 백민성白民城 욕살 구물丘勿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구물은 도성에 큰 물이 들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평정하고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마침내 장당경 아사달(요령성 개원)에서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44세 구물단군은 국력 회복을 위해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말에서 부여夫餘는 ‘아침에 어둠이 걷히면서 먼동이 부옇게 밝아오는 것’으로 ‘광명光明’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대부여는 예전의 진한 또는 진조선과 같은 통치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부단군이 다스리는 번조선·막조선도 독자적인 병권을 갖게 되어, 진조선과 대등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앙의 진조선의 대단군의 통제력이 약화된 이때부터 조선은 급속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바로 『고려사』 「김위제전」에 실린 조선의 번영과 몰락을 노래한 「서효사」는 삼한관경제를 보존하면 국가가 흥륭하고 무너지면 몰락한다는 것입니다.

『규원사화』 「단군기檀君紀」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넷째 아들 부여를 서쪽 땅에 봉해 그곳을 부여라 불렀던 사실이 있습니다. 제3왕조를 연 구물단군이 초대 단군 시절의 부여를 취하여 국호를 정한 데에는 ‘고조선 초기의 국력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국가 재건과 중흥의 의지 표명이 담겨 있습니다.

44세 구물단군은 재위 이듬해 대영절을 맞아 친히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의 보살핌을 간절히 서원하였습니다. 제도를 고치고, 아홉 가지 맹세[九誓之盟]를 정하여 백성의 화합과 교화를 도모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부여는 예전의 진한 또는 진조선과 같은 막강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부단군이 다스리는 번조선과 막조선도 병권을 가지게 되어, 중앙의 쇠약해진 진조선과 대등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약 2천 년 동안 고조선을 지탱하던 삼한관경제는 와해 직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고조선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45세 여루단군 이후 고조선과 국경을 접한 연나라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46세 보을단군 때는 번조선 68세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 자객에게 시해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보을단군의 보위를 찬탈하는 내란까지 발생하였습니다.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점령,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것입니다. 이때 장군 고열가高列加가 내란을 진압하고 추대를 받아 즉위하니, 이분이 바로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47세 단군입니다.

하지만 고열가단군은 우유부단하였고, 장수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BCE 238년, 마침내 단군이 오가에게 새 단군을 천거할 것을 부탁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니, 고조선은 2,096년으로 그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서기전 238년, 47세 고열가 단군은 마침내 오가五加(중앙부처의 장관이자 다섯 지역의 행정 우두머리)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로써 2,096년간의 단군조선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조선이 제 2왕조 시대인 백악산 아사달까지 지속되고 제3왕조인 장당경 시대서부터 대부여시대로 바뀐 것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44세 단군부터는 나라 이름을 대부여(188년 지속)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아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를 살았다고 한다.〔송화강 아사달(제1왕조 1,048년: 1세~21세)과 백악산 아사달(제2왕조 860년:23세~43세단군) 시대를 총 합치면 1,908년입니다〕

그런데 고조선의 멸망 과정에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고조선 역사 2,096년은 고조선의 중심 세력인 만주에 있던 진한(진조선)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고열가단군은 퇴위하였지만, 고조선 전체가 한꺼번에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쪽의 번조선은 그 후 40여 년(BCE 238~BCE 194)을 존속하다가 위만에게 찬탈당하였습니다. 현재 강단사학에는 단군조선의 국가 경영에 대한 정신사관이 결여 돼 있습니다. 역사를 연구하면서 그 시대의 정신문화나 종교문화를 모른다면 유물이 나온다 해도 역사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정신문화가 역사로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강단사학에서는 이런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단재 신채호선생의 삼한관경제 조차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신三神 문화에 바탕을 둔 고조선의 국가 경영 체제를 모르면 고조선 망국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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