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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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찾는 한문화코드 | 오늘은 궁궐 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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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에서 온 초대장

안녕! 나는 조선의 궁궐이야. 반가워. 우리 서울에는 다섯 곳의 궁궐이 있단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덕수궁), 그리고 경희궁이지. 궁궐은 늘 다양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 도심 속에서 자연의 운치를 즐길 수 있고,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느끼게 해 주는 곳이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궁궐을 단순한 공원 정도로만 생각하는 게 안타까워. 그 안에 살던 사람들과 거기에 담긴 이야기와 다양한 문화 코드를 알면 참 좋을 텐데. 그래서 오늘부터 궁궐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려 해. 자 이제 출발해 보자고!
 

조선 궁궐이 터 잡은 한양 도성


궁궐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궁궐이 터를 잡고 있는 서울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울은 한강으로 모여드는 크고 작은 물줄기와 이에 짝을 이루는 산줄기들이 서로 보듬고 뒤엉켜 만들어진 기름진 터전 위의 거대한 태극 형상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과거 백제의 500년 도읍지였고, 고려 시대에는 남경南京이라 하여 중요하여 여겨졌습니다. 조선 왕조에서도 서울은 한양이란 이름으로 전국의 중심이자 정치, 경제,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한양이 도읍이 되게 하는 핵심 요소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임금이 자신의 조상님을 받드는 종묘宗廟의 존재입니다. 이곳은 조상님께 효성과 공경의 마음을 다하여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조상님에 대한 제사 의례는 임금님이 모범이 되어 시행하였습니다. 이는 하늘의 상제님께 드리는 천제 문화와 함께 인류의 본래 신앙 형태인 신교神敎 문화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과 인간이 만나는 신전인 종묘는 가장 존중받고 신성한 공간이 됩니다. 두 번째가 우리가 살펴볼 궁궐이고, 세 번째는 한양 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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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 원리를 바탕으로 조성된 한양漢陽 도성


백악산, 타락산, 남산, 인왕산의 내사산內四山을 따라 한양 도성이 만들어졌습니다. 성이 있으면 성안과 밖을 연결시켜 주는 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도성 문을 들어서는 게 곧 서울에 가는 것입니다. 도성에는 동서남북에 네 대문大門을 내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문(소문小門)을 내어 모두 여덟 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사대문의 이름은 음양오행설에 근거를 둔 유교의 오상지도五常之道(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취하였습니다.

어질 인仁에 해당하는 동쪽 대문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입니다. 다른 문과 달리 이름이 넉 자인 이유는 좌청룡에 해당하는 타락산 지세가 다른 산에 비해 약해서 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갈 지之 자를 첨가한 것입니다. 기운이 약한 곳은 돋우는 우리 고유의 비보裨補 풍수의 모습입니다. 성문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서쪽은 옳을 의義에 해당해서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합니다. 초기에 돈의문이라 했다가 새로 문을 내고 서전문西箭門이라 했습니다. 다시 세종 때 서전문을 헐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워 다시 돈의문이라 하였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그래서 새문 혹은 신문新門이라 하여 신문로라는 지명이 유래하였습니다. 돈의문은 일제 강점기 도시 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버렸습니다.

한양 도성의 남문은 명실공히 숭례문崇禮門입니다. 남쪽은 예禮에 해당하고 현존하는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큽니다. 현판이 다른 대문과 달리 세로로 서 있는 이유는 서울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잠재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남녘은 화火에 해당하는데, 관악산 산세가 불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맞불 작전으로 숭례문 현판을 세우고, 그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두었습니다. 이 남지는 메워져 흔적만 남았는데,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인하여 석축을 제외한 남문의 목조 건물이 붕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보 1호 숭례문의 위상에 금이 갔고, 국보 1호 변경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2013년에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숭례문은 서 있습니다.

한양 도성의 북문 숙정문肅靖門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합니다. 북쪽이니 지智자가 들어가야 하겠으나, 정靖자를 넣었습니다. 꾀 정 자가 슬기 지 자와 뜻이 통하기 때문에 살짝 변화를 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북쪽은 음기가 강해 이 문을 열어 두면 한양 여인들이 음란해진다는 이유 등으로 항상 닫아 두었습니다. 실제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였고, 동소문인 혜화문을 거치는 게 서울로 들어오기 편리하였습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는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습니다. 이는 북쪽은 음 기운이 강하고 남쪽은 양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북의 음 기운을 돋우어 비를 부르는 음양오행 사상에서 나왔습니다.

혜화문惠化門은 한양 도성의 동소문東小門으로 본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입니다. 창경궁이 세워지고, 동문 이름이 홍화문이 되면서 혜화문으로 바뀌었습니다. 늘 닫아 두는 숙정문 대신 실질적인 북쪽 관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문루에 봉황을 그려 놓은 특징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4년 복원되었습니다.

광희문光熙門은 한양 도성의 남소문南小門으로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柩門이라 했습니다. 이는 도성에서 죽은 사람의 운구 행렬이 나가는 곳이라 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석축 부분만 남은 것을 1975년 복원하였습니다.

소의문昭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소문西小門으로 소덕문昭德門입니다. 이 문은 오늘날 서소문 고가 도로의 시작점에 서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어 현존하지 않습니다. 소의문 밖은 죄수들의 사형 장소로 자주 이용됐고, 광희문처럼 도성 시신들을 도성 밖으로 내가는 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창의문彰義門은 한양 도성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하였습니다. 숙정문은 늘 닫혀 있었기에 그 문 역할도 함께했는데, 서쪽으로는 인왕산 성곽이 돌고, 동쪽으로는 백악산을 끼고 돈의문까지 한양 도성 서쪽 절경을 품고 있습니다. 도성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었기에 이용이 많았습니다. 이 문 근처에 상서로운 자줏빛 안개가 자주 끼어 자하문이라 하였는데, 4소문 중 유일하게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 문의 특징은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 것입니다. 문밖 지세가 지네와 닮아 이를 제압하기 위해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의로움을 드러내는 문’이라는 이름은 이미 인조반정을 예견한 듯 인조반정과 관련이 깊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며 서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정변입니다. 그때 반정군은 이 창의문을 진군하여 문을 열고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며 정변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래서 창의문 누각에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도성 가운데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종을 설치하여 인의예지신 중 나머지 믿을 신信 자를 넣어 보신각普信閣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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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로 가는 발걸음


이제 한양 도성의 관문인 숭례문을 지나 한양의 길을 걸어가 봅시다. 문은 길을 연결하여 사람과 물산을 소통시켜 줍니다. 조선 시대 한양 안의 길은 지금의 종로와 새문안로를 합해 운종가雲從街라 불린 가로 부분과 숭례문을 지나 오늘날 남대문 시장 쪽으로 해서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왼쪽으로 한국은행을 끼고 돌아 광교廣橋를 지나오는 세로 부분이 만나는 길을 중심축으로 하였습니다.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십자로에서 북으로 난 길을 걷다 보면 지금의 광화문 광장이 나오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우리를 맞아 줍니다. 이곳은 경복궁의 주인인 임금이 나라의 주인인 백성들과 만나 소통하는 장소였습니다. 광화문 광장이 있는 이곳은 주요 관서들이 모여 있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에 우리나라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겠죠. 임금님은 이곳에서 출정하는 군인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기도 하고, 백성들에게 의사를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반대로 백성들 역시 임금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집단적으로 표시하기도 하였던 소통하는 광장이었습니다.
 

궁궐이란?


궁궐에 들어가기에 앞서 궁궐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궁궐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궁宮은 방이 많은 집을, 궐闕은 문 좌우에 세운 망루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보면 방이 많은 큰 건물, 혹은 모여 있는 건물들 좌우에 망루와 같은 보호 시설을 갖춘 곳을 궁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의미로 궁궐은 왕과 왕실 사람들이 사는 생활 공간입니다. 그와 함께 정치와 행정의 최고 단계의 결정과 집행이 이루어지는 공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또한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과시하면서, 당대 최고 수준의 문화가 집약된 곳이기도 합니다.
 

궁궐의 짜임새들


궁궐은 왕실 사람들의 사적 생활 공간과 정치적 행위를 하는 공적 공간이 공존하는 곳이기에 엄격하게 구역을 나누어 놓았습니다. 기능에 따라 구역을 나누어 놓았고, 각 공간들이 어울려 하나의 큰 짜임새를 가지는 유기체적인 모습을 하고 있죠. 그래서 궁궐 구조의 전체 큰 틀을 아는 것은 어둠 속에서 등불과 지도를 얻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궁궐은 크게 여섯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외전, 내전, 동궁, 궐내각사, 생활 기거 공간, 후원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외전外殿은 궁궐 정문을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공간입니다. 크게 세 개의 문을 지나면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넒은 마당이 나옵니다. 마당 주위를 둘러싼 건물은 사람들이 다니게 트여 있어 이를 회랑回廊이라고 부르죠. 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을 조정朝廷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그 궁궐의 중심 건물이 자리하는데, 이를 정전 또는 법전法殿이라고 합니다.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등을 말합니다. 궁궐 전체에서 가장 높고 크며 화려한 건물로 임금님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한껏 권위를 갖춘 건물이죠. 이 법전은 조정과 연결되어, 국가적인 의례 행사를 하는 장소로 사용합니다. 또한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공식적인 큰 연회를 벌이거나, 과거 시험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내전內殿은 궁궐의 한복판에 위치합니다. 임금님이 실제 기거하고 활동하는 대전大殿과 왕비가 기거하는 중궁전中宮殿을 합한 구역입니다. 대전은 내전의 정전을 중심으로 그것을 보좌하는 건물들이 주위에 있고, 부속 건물과 담장이 경계를 이룹니다.

실제 임금님이 관원을 만나서 국정을 논의하고 운영하는 공간이죠. 중궁전은 중전中殿, 곤전坤殿이라고 합니다. 위치상으로 궁궐의 중앙부에 있는 내전에서도 가장 깊숙한 부분, 더이상 뒤편에 건물들이 없고 산자락이나 숲이 받쳐 주는 곳에 있습니다. 이곳은 여성의 공간답게 그윽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허락받지 않은 남성은 여기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왕비도 역시 공인公人입니다. 왕실 가족을 챙기고, 친자식뿐 아니라 후궁이 낳은 자녀들을 포함한 임금의 모든 자녀를 보살핍니다. 그리고 임금의 후궁과 궁녀를 포함한 궁궐 안 여성들을 다스리는 내명부를 주관하고, 출가한 임금의 딸이나 종친의 처나 관원의 처 같은 외명부를 맞이하고 응대합니다. 필요하면 국가 행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외전과 내전 사이에 편전便殿이 있는데, 임금과 관원들의 공식 회의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선정전 같은 곳입니다. 편전은 내부가 넓은 마루방으로 되어 있어 많은 인원들이 모여 회의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동궁東宮은 차기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의 활동 공간입니다. 왕세자는 떠오르는 태양처럼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 때문에 내전의 동편에 거처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이를 동궁이라고 하죠. 동궁은 왕세자가 활동하는 공간이자, 왕세자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교육과 보좌를 맡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호위를 맡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등의 관서들이 함께 있습니다.

궐내각사闕內各司는 궁궐 안에 들어와서 활동하는 관서를 가리킵니다. 임금님은 특별한 일이 아닌 한 궁궐을 벗어나지 않고, 궁궐에서 모든 행위를 합니다. 그래서 관료들은 궁궐로 들어와서 임금님을 뵈어야 하죠. 그래서 임금님을 측근에서 모시는 관서의 청사들도 궁궐 안에 있습니다. 궐내각사에는 관원들의 활동 공간, 경비와 호위 등의 군사 관계 업무를 맡는 기구, 왕실 시중과 궁궐 시설 관리를 맡는 부서 등이 있습니다. 궐내각사가 있다면 궐외각사도 있겠죠. 궐외각사는 궁궐 밖에서 궁궐과 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관서를 가리킨다. 바로 광화문 앞에 있는 행정관서들이죠. 이들은 궐내각사를 통해 임금님과 연결되어, 정치와 행정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습니다.

생활 기거 공간은 임금과 왕비 그리고 왕세자 이외의 왕실 가족들을 위한 공간이죠. 그리고 그들을 시중드는 궁녀, 내시, 노복, 군병들의 활동 공간으로 내전 뒤편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넓은 자리에 수많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후원後苑은 위치에 따라 북원北苑,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금원禁苑이라고 합니다. 일차적으로 임금을 비롯해 궁궐 사람들의 휴식 공간입니다. 하지만 후원은 단지 휴식 공간에 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과거 시험을 치르거나, 군사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가끔은 종친들과 모임을 갖기도 했죠. 조선은 농본 국가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내농포內農圃라는 소규모 논을 만들어 임금이 농사를 직접 체험하는 실습장으로 삼기도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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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건물의 자격


궁궐은 여러 건물이 어울려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궁궐을 비롯한 전통 건물을 볼 때는 개개 건물을 보기보다는 건물과 건물 간의 관계, 건물들이 만들어 내는 질서를 알아보는 게 중요합니다. 경복궁 같은 경우에 현재는 30여 채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19세기 후반 중건된 당시만 해도 170채 내외였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냐면 비가 내려도 전각 사이로 다니면 비를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궁궐 전각들의 이름은 그 뜻이 모두 좋지만,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이고 여러 고전에서 그 출처를 가져왔기 때문에 제대로 알려면 오랜 시간 공을 충분히 들여야 합니다.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건물 이름을 통해 그 건물들의 기능을 알아보는 선에서 그쳐야겠습니다. 건물의 정면 위쪽 판자 위에는 건물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이를 편액篇額이라고 합니다. 편액 글씨 중 맨 마지막 글자를 보면, 그 건물의 성격과 기능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해서 이야기하면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여덟 글자만 알면 되겠습니다. 무슨 주문 같죠. 이 여덟 글자의 내용만 알면, 건물의 외형, 주인의 신분, 건물의 용도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전殿은 가장 격이 높은 건물입니다. 임금과 왕실 직계 가족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에 쓰입니다. 규모도 크고 품위 있는 치장을 갖추었습니다. 일상적인 기거 활동보다는 의식 행사를 비롯한 공적 활동을 하는 데 쓰는 건물입니다. 경운궁의 중화전, 경희궁의 숭정전 등이 그 보기입니다. 궁궐 외에는 종교의 교조들을 모신 곳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단군성조 및 동명성제를 모신 평양의 숭령전崇靈殿 등 개국시조를 모신 곳에 쓰이곤 합니다.

당堂은 전에 비해 한 단계 낮은 건물입니다. 민가에서는 ‘당’이 가장 격이 높은 건물입니다. 당당한 건물이죠. 궁궐에서는 조금 더 일상적인 활동에 쓰였습니다. 창덕궁의 침전인 희정당, 경복궁의 자선당 등이 있습니다.

합閤이나 각閣은 대개 전이나 당 부근에서 그것을 보위하는 기능을 합니다. 평범한 건물보다는 격이 높죠.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합’은 여성이 주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경복궁 왕비 침전인 교태전의 부속 건물인 흠경각이나 제수합 등이 그 보기입니다. ‘전’에서 ‘각’까지는 그 뒤에 하下를 붙여서 그 주인을 높이는 이인칭 대명사를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의 주인, 다시 말하면 임금님을 가리켜 ‘전하殿下’라고 부릅니다. 황제는 ‘폐하陛下’라 부르는데, ‘폐’는 섬돌, 즉 기단을 올라가는 계단으로 부르는 자신을 한껏 낮춘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각하, 합하라는 호칭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대통령님을 대통령 각하라고 부르기도 했죠.

재齋와 헌軒은 가장 흔하게 사용합니다. 평균적인 등급의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공간입니다. ‘재’는 숙식 등 일상적인 주거 혹은 조용하게 독서나 사색을 하려고 쓰는 건물이고, ‘헌’은 대청마루가 발달되어 있는 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거보다는 여러 사람이 모여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쪽이 많습니다. 조선 후기 왕실 가족 중 주로 여인들이 기거했던 낙선재와 효명세자가 독서를 즐겼다는 창덕궁 후원의 기오헌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루樓는 땅으로부터 사람 높이 정도의 마루로 되어 있는 집을 말합니다. 경복궁 경회루나 남원의 광한루처럼 큰 다락집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亭은 연못가나 개울가 또는 산속이나 바닷가 경관이 좋은 곳에 있어, 휴식이나 연회 공간으로 사용하는 작은 규모의 집입니다. 주변의 경치를 보기 위한 곳이므로 거의 벽이 없습니다. 정자는 자연 속의 인공 구조물로 경복궁의 향원정,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이 대표적입니다.

지금까지 조금 지루했지만, 궁궐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구체적으로 5대 궁궐 안에 들어가서 그 안에 담긴 한문화 코드와 의미에 대해서 함께 거닐며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 명당에 어우러져 만들어진 서울


한 나라의 도읍은 그냥 정해지지 않습니다. 방어의 유리함, 교통의 편리함과 함께 당대 사람들이 지닌 최상의 가치가 집약된 사상적 배경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우리 서울은 우주 원리가 투영된 풍수지리 사상이 도읍 선정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풍수란 말 자체는 바람을 저장하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에서 왔습니다. 내 삶의 바탕은 실제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좋은 땅에서 살고, 좋은 땅에 묻히길 원합니다. 좋은 땅이란 햇빛을 잘 받아 농사가 잘 되고, 식수원을 얻기 편하고, 배수가 잘 되는 곳을 말합니다. 햇빛을 잘 받기 위해서는 남쪽이 확 틔어야 하고, 맑은 물이 내가 사는 옆으로 흐르고, 더러운 물은 저 멀리에서 배출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양은 명당자리입니다.

왜 그런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내가 사는 터전에서 한 걸음 물러선 외곽에서 감싸주는 산을 조산祖山이라 하고, 조산 가운데 마을이나 도시를 사방에서 감싸 주고 있는 뚜렷한 네 산을 일러 외사산外四山이라고 합니다. 조산에서 갈라져 나온 바로 뒷산을 주산主山, 바라보는 앞산을 안산案山, 주산의 좌측 즉 동편에 있는 산을 좌청룡, 우측인 서편에 있는 산을 우백호라 한합니다. 안산은 전주작(남주작), 주산은 후현무(북현무)가 되어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사신四神이 감싸 보호하는 셈입니다.

서울의 한양 도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산과 관악산이 마주 바라보는 사이에 앉아 있습니다. 이 북한산과 관악산이 서울을 외곽에서 받쳐 주는 조산이 되어 줍니다. 동쪽으로는 서울과 구리시를 가르는 용마산龍馬山 일명 아차산峨嵯山이 서쪽으로는 행주산성이 들어서 있는 덕양산德陽山이 감싸줍니다. 이들을 일컬어 서울의 외사산外四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북한산에서 한 가지가 갈라져 남으로 내려와 다소곳이 솟으니 흔히 북악이라고도 하는 지금의 청와대 뒷산 백악白岳입니다. 이 백악이 서울을 직접 품고 있는 산, 곧 서울의 주산입니다. 백악에서 동쪽으로 산줄기가 뻗어 나아가다가 한 봉우리를 이루니 이것이 매봉우리 즉 응봉鷹峯입니다. 백악과 응봉은 높이가 달라 짝짝이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서울을 품고 있는 어머니의 두 젖가슴과 같은 산입니다. 실제 조선 궁궐에서 중요한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그 아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응봉은 동편으로 나지막이 팔을 벌려 좌청룡 타락산駞駱山을 이루고, 백악은 서편으로 우뚝 팔을 쳐들어 우백호 인왕산仁王山을 이루었습니다. 앞에는 남산 즉 목멱산木覓山이 부드럽게 엎드리어 안산 노릇을 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직접 살을 맞대고 한양 도성을 형성하고 있는 이 네 산을 내사산內四山이라고 합니다.

내사산 안쪽은 자연히 분지 형태가 되고, 거기에는 물이 모여 흐르게 마련입니다. 이 물을 내수內水라 하고 내수는 안산 밖으로 흐르는 큰 강과 만나는데 이를 외수外水라 합니다. 도시에서 보자면 조산과 주산을 등지고 내수와 외수를 바라보는 모양이므로 자연스럽게 배산임수背山臨水가 됩니다. 북반구에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남향이나 동향이어야 햇빛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백악과 응봉 자락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은 남으로, 인왕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은 동으로, 목멱산에서 발원한 물들은 북으로 흘러들어 서울 한복판에서 한줄기를 이루니 이른바 청계천淸溪川입니다. 청계천이 서울의 내수입니다.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달려 중랑천中浪川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갑니다. 한강은 목멱산을 끼고 서울을 반 바퀴 휘감아 돌아 서해로 나아가니 서울의 외수입니다.

남산, 인왕, 백악, 응봉, 타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청계천, 중랑천, 한강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는 서로 감싸 안고 휘감아 태극의 모양을 이룹니다. 산과 물이 한데 어우러져 사람이 살기 좋은 땅, 많은 인구를 넉넉하게 품어 기를 만한 터전이 바로 우리 서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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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명당인 이유

지구의 혈 자리가 우리 한반도임을 밝혀주신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 서울이 명당임을 일러 주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리는 주산을 바탕으로 해서 청룡은 날아오르고 백호는 순하게 복종을 하고, 상대한 안은 바르고 중후하고 물은 감싸고 돌아서 큰 틀이 잘 갖추어 주어도 지리는 역逆으로 되어야만 흥하게 된다. 세상만사가 다 순해야 하는데 지리만은 역해야 된다는 말이다. 서울을 둘러싼 물줄기의 흐름을 볼 것 같으면 서대문, 서소문, 남대문 쪽 물, 즉 인왕산 줄기 안쪽 물과 북악산 골탱이서부터 남산 골탱이 안쪽 물은 전부 청계천으로 모여들어 거꾸로 치올라 가서 중랑천으로 빠져나가고, 인왕산 줄기 서쪽 물은 용산 쪽으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한강은 동에서 서쪽으로, 김포 강화도 쪽으로 흐르지만 청계천은 묘하게도 서에서 동으로 역하며 거꾸로 흐른다. 그 기운으로 서울이 조선 왕조 오백 년의 도읍지가 되었고 지금은 천여 만 인구를 수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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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홍순민, 눌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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