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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생추살 중] 총각판 씨름은 제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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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세월을 간 제2차 대전

1937년 7월 7일 북경 교외의 노구교(蘆溝橋) 인근에서 야간훈련 중이던 일본군이 중국군을 공격한 것이 계기가 되어 중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중일전쟁으로 시작된 제2차 대전이 바로 총각판 씨름이다.

그 당시에 일·독·이(日獨伊) 3국이 동맹을 하여 세계를 제패해서, 일본의 도조(東條),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지구를 삼분천하(三分天下), 세 쪽으로 나누어 갖기로 했다. 그 싸움이 10년을 갔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기 위해서 방랑생활을 하였다. 동으로 서로, 오늘은 조선 내일은 만주, 모레는 북지로 내가 다닐 수 있는 데를 그렇게 많이 돌아다녔다.

그러면서도 내가 일본이 쫓겨 들어가는 날짜까지도 알고 있었다. “세월여유검극중(歲月汝遊劒戟中)인데 왕겁망재십년호 (往劫忘在十年乎)아”,‘ 세월아, 네가 전쟁 가운데서 흘러가는데 그 전쟁하는 세월이 10년을 간다는 것을 잊었느냐’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10년 전쟁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10년째 되는 해에 손을 들 것 아닌가!

그러면 10년 되는 해에 전쟁이 끝난다는 것은 알았는데, 과연 그 날짜는 언제인가? “칠월칠석삼오야(七月七夕三五夜)요 동지한식백오제(冬至寒食百五除)라”, 상제님이 세상 비결이라 면서 일러주신 말씀이다.

‘칠월칠석삼오야’, 이게 일본이 손드는 날짜다. 음력으로는 7월 7일, 양력으로는 8월 15일! ‘삼오’, 석 삼자 다섯 오자를 더하면 8이다. 또 삼오를 곱하면 15가 된다. 그러니까 삼오라는 글자가 8월 15일을 가리킨다. 밤 야 자는 어조사 야(也)자와 발음이 같은 자로 쓴 것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는 8월 15일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일본이 을유년 8월 15일에 쫓겨 들어간다’는 상제님의 공사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 머리맡에 그 비결을 써서 붙여놓고 날마다 읽어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나는 그 전쟁이 그렇게 짜여져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해방 1년 전 갑신년 하절기에 그때까지의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던 방랑생활을 다 접었다. 그러고서는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면사무소 식량계의 면서기였던 삭녕(朔寧) 최씨 최우전 이라는 친구에게 식량을 도움받아 반려자인 처(妻)를 더불고, 그곳 양촌면의 어느 집 협실 한 칸을 얻어 안주하면서 광복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과연 8월 15일을 맞이해서 일본이 항복을 하고 우리 나라가 광복을 되찾았다. 이렇게 하여 총각판이 끝이 나고, 국제적인 불량 국가를 제지하고 징계하기 위한 기구로 국제연맹을 강화하여 국제연합(UN)을 발족시켰다.

배사율에 걸려 망한 일본

일본이 어떻게 해서 망했느냐 하면 배사율(背師律)에 걸려서 망했다. 등 배(背) 자, 스승 사(師) 자, 선생님을 배반한 율법에 의해서 망했다.

우리나라는 본래 일본의 선생님 나라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 네들의 혈통조차도 우리나라 혈통이다.

내가 일본에 가서도 그런 교육을 시켰는데, 백제 사람들이 백제국의 통치 체제에 의해서, 또는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의 백성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서 대거 일본으로 이주해 갔다. 그래서 일본의 본토민은 아이누족이지만, 일본사람 90퍼센트 이상은 우리나라 혈통이다. 그러한 일본이 우리나라 문화를 배우고 싶어서 백제국에 요청을 했다.“ 학자를 보내서 우리도 글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이다.

그래서 전라도 영암에 살던 왕인(王仁), 성은 왕씨고 이름은 착할 인 자, 외자 이름인데, 왕인이라는 학자를 일본에 보내서 사무라이들을 교육시켰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문화를 일본에 전수(傳授)해줬다. 그들 문화의 뿌리가 우리나라 문화인 것이다. 왕인 박사는 우리나라로 다시 건너오지도 못하고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고서 한 천2백 년 후에 정유재란 때 일본이 강항(姜沆, 1567∼1618)이라는 전라도 사람을 납치해 데려다가 미진한 것을 더 배웠다.

그래서 일본 문화라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를 그대로 송두리째 전수받은 것이다. 또한 일본의 과학문명, 생활이기(生活利器)와 같은 신문명은 전부 서양 사람들한테 배운 것이다. 이등박문(伊藤博文) 같은 사람도 서양에 가서 유학을 한 사람이다.

명치유신이 그렇게 해서 열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들어서 잘 알 테지만, 2차 대전 당시 세상은 다 일본 제국주의 세상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였으니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이 만주 땅을 다 차지하고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 1906∼1967)를 업어다가 강덕(康德)이 라는 연호 하에 만주국(滿洲國)의 허수아비 통치자로 앉혀 놓았고, 또한 중국도 거의 다 먹어치웠다. 그래서 장개석 주석이,『삼국지』에 나오는 서촉(西蜀)이라고 하는, 지금의 중경(重慶) 까지 쫓겨 들어갔다.

일본이 또한 대만도 1894년 청일전쟁 후부터 점령하고 있었고, 그리고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슬로건 아래, 인도차이나,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미얀마), 필리핀 등도 다 함락시켰고, 남양군도(南洋群島)의 한 천 개 되는 섬도 다 먹어치웠다. 다 일본인 세상이었다. 그러니 그때 일본이 망한다는 건 누구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했건만 배사율에 걸려서 망하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선생님 나라인데, 선생님 나라를 30년 이상을 깔고 앉아서 못살게 했으니 신명계에서 그걸 용서할 리가 있나.

상제님이 말씀하시기를“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 이었나니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저희들(일본)에게 일시의 영유(領有)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고 하셨다.

또한 일본이 과학문명을 서양한테 배워서 서양을 치러 달려 붙으니 그것도 역시 배사율이 아닌가. 상제님이“일본 사람이 미국과 싸우는 것은 배사율을 범하는 것이므로 장광(長廣) 팔 십 리가 불바다가 되어 참혹히 망하리라”고 하신 것과 같이, 일본이 하는 짓이 너무 불의해서 신명들이‘일본 족속은 그냥 둘 수가 없다’하고 배사율의 율법에 의해 나가사끼(長崎)와 히로 시마(廣島)에 원자탄 세례를 퍼부었다. 불의한 행위에 신명계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우리나라에 와서 역사(役事)만 죽도록 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신명들의 공의로 중국이 공산화되다

상제님이 청국 공사를 보시는데 공사 보실 당시 중국 이름이 청나라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구상에서 가장 인종 씨알 많은 데가 중국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본래 한족(漢族)과 55개 소수 민족들이 뭉쳐서 구성된 나라다. 지금 중국의 공식적인 인구가 12억이니 13억이니 하지 않는가. 그때도 역시 그 비례로 인구가 많았다.

그런데 상제님이 청국공사를 봐야겠는데 청국을 가자 하니 길이 너무 멀고, 또한 청국 기운이 응기되어 있는 청주 만동묘 (萬東廟)에 가서 공사를 보려 하니 역시 길이 멀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이 사대주의 사상으로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극정성으로 받들던 사당이다. 그렇게 모셔놓고 대명조선(大明朝鮮)이라고 해서, 명나라는 대국이요 조선은 스스로 소국으로 자처를 했다. 지금도 몇 백 년 전의 명묘대지(名墓大地)를 다니면서 비석을 살펴보면, 연호가 대명조선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래서 청주 만동묘 대신에 상제님이 공사를 보시던 구릿골 근처 청도원(淸道院)이라는 마을에 가서, 청국 기운을 그곳에 응기시켜 청국공사를 보셨다. 그때 잠시 조시더니 일어나 말씀 하시기를“아라사 군사가 내 군사니라. 청국은 아라사 군사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노라”고 하셨다. 상제님이 잠깐 조신 게 뭐 냐 하면, 청국을 어떻게 심판하느냐를 두고 역사적인 신명들의 공의를 지켜보신 것이다.

그 신명들의 공의가 어떻게 나왔느냐?

‘중국은 아라사로 붙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을, 신명을 부정하는 공산 종주국 아라사에 맡겨서 공산화시킨다

는 것이다. 아라사가 러시아다. 아라사는 공산 종주국이 아닌가. 유물론자의 종주국이다. 상제님이 중국을, 신을 부정하는 아라사에 붙여 보내셨으니 중국은 신명을 부정하는 유물론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신명들이 청국을 왜 그렇게 심판을 했는가?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은‘낙양(洛陽)은 천하지중(天下之中)’이라고 해서, 북경, 남경 등 자기네들 도읍하던 수도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사는 타민족들을 가리켜 버러지 같고, 짐승 같고, 오랑캐 같고, 야만인 같다고 했다.

남만(南蠻)이라고 해서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버러지 같고, 북적(北狄)이라고 해서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개짐승 같고, 동이(東夷)라고 해서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미개한 오랑캐이고, 서융(西戎)이라고 해서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천박한 야만인이 라고 했다. 중국권외의 각색 인종들은 물건으로 말하면 미완성품이고 자기네들 족속만이 완성품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여러 천 년 동안 타민족을 멸시하고, 학대하고, 죄악시하고, 인간 이하 취급을 했다.

또 그들은 문명의 창시자인 태호 복희씨도 사람 취급을 안했다. 태호 복희씨가 팔괘를 그어 천하를 문명케 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또한 그네들도 그 문화권에 수용을 당해서 생존해 왔건만, 문화의 창시자를 원시 자연인의 백두(白頭), 맨 머리에“인두사신((人頭蛇身)”,‘ 사람 머리에 뱀의 몸’으로 그려 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농(神農)씨는 어떻게 만들어 놨냐 하면, “우두인신(牛頭人身)”,‘ 소머리에 사람 몸뚱이’로 전락시켰다.

그러면서도 역사적으로 그 뒤에 나온 자기네 나라 치자(治者)들은 면류관도 씌우고 곤룡포도 입혀서 아주 존엄한 위의 (威儀)를 갖춰 그려 놨다. 그네들이 역사를 그렇게 왜곡하였다.

그래서 4, 5천 년 역사 과정에서 같은 시대를 살면서 중국에 억울하게 당했던 신명들이 공의를 모아 중국을, 신명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한 10여 년 전에, 중국에도 새 진리의 씨앗을 좀 뿌려볼까 하고 중국에 간 사실이 있다. 상제님 공사를 뻔히 알면서도 인구가 하도 많아서‘얼마라도 살려야겠다’하고,『 다이제스트 개벽』을 비롯하여『도전(道典)』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해서 책 두 박스를 가지고 갔었다.

그런데 천진(天津) 공항에서 다 압수를 당했다. 많은 수작을 해 보았으나, 절대로 불통(不通)이었다. 해서“그러면 보관을 했다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에 찾아가겠다”고 했으나, 끝내 다 압수를 당하고 한 권도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고서 죄인 취급을 당했다.

그런데 상제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는 수밖에 없잖은가. 천지신명들이 그렇게 중국을 거부하고 내던져 버리려고 하니, 벗어날 무슨 재주가 있겠는가.

남의 나라 역사까지 빼앗으려 드는 중국

역사적으로 중국은 자민족(自民族)이 자기네 나라를 통치한 때가 거의 없었다.

하나 예를 들면, 청(淸)나라 하면 그게 여진(女眞)족이다. 여진족 누루하치(奴兒哈赤)가 명(明)나라를 정복하고 청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우리나라 사람이다. 주원장이 중국에 들어가 원(元)나라를 정복하고 명나라를 세웠다. 또 원나라를 세운 칭기즈칸은 몽고족이다. 숱한 역사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중국이라는 나라는 자기 민족도 자력(自力)으로 통치를 하지 못한 나라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국이 우리나라를 정복하러 달려 붙어서 그들이 오히려 망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우선 수(隋)나라의 양제(煬帝)가 수륙대군 113만 명을 출병할 때, 식량 조달을 하는 보급부대와 같은 군속(軍屬) 130만 명을 포함해서 250만 대군을 거느리고 기세등등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살수 싸움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간신히 자기네 나라로 도망가서 군대를 점검해 보니 살아남은 군사가 겨우 호위병 2천7백 명에 불과했다.

동서양 전쟁사를 통해서 수백만 군대가 한자리 싸움에서 전멸을 당하고 겨우 몇 천 명만 살아남은 전쟁은 오직 그 하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수 양제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민심이 다 떠나 버린 것이다. 사람 하나 죽으면 거기에는 수십 명의 인간관계가 얽혀져 있는데, 아버지, 아들, 사위, 남편, 삼촌, 형, 동생, 조카, 당질 등을 데려다가 죽인 사람이니 당연히 민심이 떠날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전에 수 양제가 북경에서 항주까지 운하를 파는데 10년을 팠다. 그때 이미 수 양제가 적실인심(積失人心)을 해서 백성들이 다 등을 돌렸다. 그런데다가 백성을 다 징발해서 죽여 버렸으니 누가 좋다고 하겠는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위급한 때에는 세상을 엿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때 이연(李淵)이라는 사람이 아들 이세민(李世民)을 데리고 수 양제를 들이쳐 버렸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나라가 당나라다.

그 후에 당 태종 이세민이 생각하기에, 나라 하나 빼앗는 게 별로 어렵지 않게 여겨졌다. 그래서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도 정복하기로 결심을 하고, 정규군 30만에 군속 25만 해서 오륙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토벌에 나섰다.

승승장구하여 고구려의 요동지역을 함락시킨 당 태종은 안시성에 이르러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끈질긴 대항으로 싸움은 2,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연개소문의 대반격에 크게 패한 당 태종은 설상가상으로 그만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서 쫓겨 들어갔다.

요택(遼澤)을 건너서 군대를 점검해 보니, 겨우 호위병 3, 4천 명이 따랐을 뿐이었다. 그 후 당태종은 수 년 동안 화살 맞은 눈을 앓다가 그 여독으로 죽게 되었다.

중국의 역사가 이러하건만, 다른 민족들을 그렇게 짓밟고, 버러지만도 못하다느니, 짐승만도 못하다느니, 야만인이라느니 하면서 여러 천 년 동안 능욕을 가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네들이 우리나라를 얼마나 압박했는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국 사신 하나 맞으려면‘은혜를 맞는 문이다’해서 영은문(迎恩門)에 나가서 맞이하고, 그네들의 필요에 따라 미녀도 바치고, 그네들이 요구하는 물건이면 무엇이고 다 바치다 못해, 심지어 황색연(黃色煙)이라는 맛 좋은 담배까지도 다 바쳤다.
또 태자를 봉하려고 해도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왕이 등극을 할래도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나라 이름 짓는 것도 중국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 얼마나 남의 민족에게 부당 한 처사인가.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나라 고조선, 고구려 역사를 전부 다 자기네 부속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2002년부터 5년 간에 걸쳐 200억 위안(약 2 조 5천억 원)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날조하는 걸 합리화시키는 데에, 누가 봐도 그렇다고 타당하게 여기게끔 역사를 조작하는 데에, 그 공작금으로 2조 5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쓴 것이다. 허나 역사의 정의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그 틀이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추교역기에 천지에서 인간개벽을 하는데 역사를 천 번, 만 번 바꿔 쓴다고 해서 역사의 주체가 바꿔지는 것이 아니다.


[춘생추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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