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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생추살 중] 두번째 판 우주변화원리로 상제님 진리를 체계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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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언제쯤 손을 든다 하는 것까지를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는 어려도 그때 이미, 득의지추(得意之秋)가 되면 반드시 상제님 사업을 하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스물네 살에 8·15를 맞이하고, 8·15 해방과 더불어 드디어 상제님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는 하지 중장이라는 미국 사람이 군정장관이라 해서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다. 당시 우리나라는 연합군 덕에 해방만 되었지 완전히 무정부 상태였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유엔 감시 하에 5·10선거를 하여 국회가 구성되고, 거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때 우리나라 국시(國是)가 반공이었다. 공산주의와 대결을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반공이지만, 그때는 더 강력했다. 그 당시에 박헌영이라는 사람이 모스크바 대학을 나와서 남쪽에 남로당을 조직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 그래서 경찰들이 사람 몇 명만 모이면 잡아다가 남로당 아니냐고 별의별 조사를 다 하고, 남로당 조직원이라고 죽도록 두드려 팼다. 그때 반공법에 걸려 잡혀가면 그냥 맞아죽는다. 살아 나와 봤자 이미 병신이 돼서 소용이 없다.

그리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할 때 숱한 고문을 행했는데, 그 중 쇠좆매라는 게 있었다. 점잖든 점잖지 않든, 매 이름이 그러니 달리 부를 수 없다. 소 자지 있잖은가. 나는 소 자지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아마 한 60센티는 되는가 보다. 그놈을 물에 불려 보들보들하게 만들어서 그걸로 한 대 치면, 살에 착 감겨서 살가죽이 홀딱 벗겨진다. 일본은 물러갔지만, 그때 경찰서라는 게 내내 일본 경찰의 재판(再版)이었다.

그런 세상에 우리나라 전 국민을 상대해서 나 혼자 포교를 했다. 그때는 오직 나 한사람뿐이었다. 아무리 불러보아도, 아무리 찾아보아도, 상제님 진리를 아는 사람은 이 하늘 밑에 어디에도 없었다. 참으로 적막강산이었다. 오직 내 그림자와 같이할 뿐이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개척자로서 정성을 다 바쳐 상제님 진리를 세상에 펴는 포교행각에 일로매진을 하건만, 상제님 천지공사라는 게 순전히 신명공사인지라,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명을 해봤자 신명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인류 역사를 통해서 처음으로 우주변화원리를 도표로 그렸다. 그게 내가 스물다섯 살 먹어서 그린 것이다. 충남 아산군(牙山郡) 배방면(排芳面) 남리(南里)라고 하는 곳에서 부락 청년들을 모아놓고, 우주변화원리 도표를 그려놓고서 포교를 했다. 그렇게 우주변화원리의 틀, 선후천 생장염장의 틀을 짜놓으니 비로소 상제님의 진리를 체계화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이 되었다.

또한 영적인 체험으로 포교를 하기 위해서 일곱 사람씩 조를 짜 가지고 방안에서 면벽단좌(面壁端坐), 얼굴을 벽을 향해 쪽 돌려 앉히고 수련(修鍊)을 시켰다. 일주일을 한도로 해서 시키는데, 빠르면 한 사흘, 오래 걸려도 한 오륙 일이면 누구도 다 광명을 체험하고 개안(開眼)이 되었다. 신안(神眼)이 열렸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 자신의 영(靈)이 하늘에 올라가 상제님을 뵙기도 하고, 자기 조상님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수련 공부에 들어가는 입공(入工) 치성을 모실 때에 절을 올리다가 터져 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입도(入道) 치성을 모실 때에 첫 절을 올리다가 엎어져서 그냥 터지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2변 때 30만 신도를 일으켰다.


[춘생추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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