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통관(수부관)

종통관 관련 강좌를 시청하시고자 하는 경우 진리 주제별 강좌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바로가기 

[관통 증산도 중] 용화동의 증산교(2변 도운)

운영자 0 495

 

전북 김제군 용화동에 자리한 증산교는 해방후 대부흥의 전성기와는 달리 이제 몰락한 교단이 되어 신도의 90% 이상이 60~70대의 노년층으로(1년 4대치성절에 수십명 정도 참석), 모악산자락에 자리한 소규모의 한 교파집 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이곳을 증산교본부라 자칭하고 있다. 그들이 교주로 내세우는 이상호(李祥昊, 1888~1966, 호는 靑陰)와 이정립(李正立, 1895~1968,호는 南舟)은 형제간이다. 이들은 일찍이 [보천교]신도로서 후에 60방주(方主)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들의 말로는 형 이상호는 27세(1915), 동생 이정립은 20세(1914)에 각기 보천교에 입교했다. 이 신앙연대를 사실로 받아들이면 이 때는 보천교가 아닌 고수부님의 태을교 교단시대이다. (보천교는 실제로 1922년부터의 명칭임)

 

당시 최남선이 경영하던 시대일보를 갑자(1924)년 정월 보천교에서 인수하여 운영할 때 경영이 뜻대로 되지 않자 차교주의 불신을 사서 이 해(1924) 7월에 방주인(方主印)을 회수당하고 교직(敎職)을 박탈당하였다. 8월에 이상호·이정립 형제는 보천교의 운영에 불만을 품고 보천교혁신회를 조직하여 차경석에게 난법을 달리는 교정(敎政) 혁신을 요구하였으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보천교를 탈퇴하였다. 이상호는 보천교 신앙당시 상제님의 언행을 수집하여 경전을 편찬해야 할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차경석 성도로부터 상제님의 성훈말씀 과 행적을 구술받아 자료를 수집했는데, 그 분량이 극히 적었다. 다시 보천교를 탈퇴한 이듬해(을축,1925) 9월에는 태운 김형렬 성도의 교단(미륵불교)에 입문하여 드나들면서 태운장으로부터 대부분의 상제님 말씀을 전해들어 자료를 정리해 병인(1926)년 7월에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미륵불교 교단 간부들과 갈등이 생겨 무진(1928)년 3월에 이곳 교단을 탈퇴하여 다시 상제님의 법언성적(法言聖跡)을 수집하기에 일심하였다.

 

상제님의 성도들의 교단을 순회하며 상제님의 말씀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교단들의 실정을 터득한 그는 설 자리가 없음을 깨닫고 무진(1928)년 동지(11월 22일)에 용화동(龍華洞)에서 동화교(東華敎)를 독자적으로 창립하였다. 그로부터 4개월 후에는 증산천사공사기를 보완하여 기사(1929)년 3월에 대순전경을 간행하게 되었다.


신미(1931)년이 되자 이상호·이정립 형제는 당시 김제 조종골에서 둘째 교단살림을 주재하고 계신 고수부님에게 달려가, “이제 때가 된 것 같사오니 용화동으로 옮기시는 것이 가한 줄 아옵니다”고 간곡히 말씀드려 마침내 용화동 교단으로 모셔왔다. 이로써 고수부님의 주재 하에 조종골교단과 동화교가 통합되어 상제님이 열어주신 고수부의 세 살림의 셋째살림 교단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용화동 통합교단의 교주로 계시던 고수부님은 2년 후(1933) 용화동을 떠나 임피군 오성산으로 들어가실 때 이상호에게 앞일을 일러 주시며,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龍鳳旗)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며 엄명을 내리셨다. 이는 일찍이 증산 상제님께서『사람은 뒤에 다시 나온다』고 하신 말씀이며, 또한 상제님으로부터 도통을 받으신 고수부님께서 일어나 앉으시며 하신 첫 말씀,“추수할 사람은 후에 다시 있느니라”고 한 바로 그 새 인물一도운(道運)을 결실할 지도자一이 이곳에서 자리잡고 새 시대를 여는 첫 발을 뗄 것을 내다보고 하신 말씀이다.

 

고수부님이 용화동의 셋째살림을 정리하고 떠나신(1933)후 10년이 지난 계미(1943)년에 임경호, 문정삼과 동아흥산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은밀히 종교운동을 하던 이정립은 일제에게 발각되어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수감되었다. 그 후 대구형무소에서 8·15해방을 맞이하여 8월 17일에 풀려나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사는 최위석을 방문하였다. 그와 교단개창의 뜻을 합의하고 전북 정읍에 내려와 형 이상호와 김규찬을 만나 교단운동 방침을 협의한 뒤 9월 19일에 최위석의 집에서 치성을 올리고 대법사(大法社)를 조직하고 임시사무소를 서울 필운동에 두었다. 이 때 을유해방의 시운을 타고 기두하신 지금의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께서 음력 8월 15일 추석절에 상제님의 이념을 새로이 선포하고 사방을 주유하시다 대세를 보시고 용화동의 이상호 형제의 교단개척 운동에 참여하여 신도들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병술(1946)년 11월에 대법사 본부를 용화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는 처음 개척하신 중심무대를 일찍이 고수부님이 통합교단의 교주로 계신 바 있는 그 용화동에 두고 새 일판을 벌렸고, 해방후의 제2변 용화동 증산교 대부흥시대의 개척에 중심역할을 하셨다.


당시 교단의 원로로서 환갑을 바라보는 이상호(1888년생 )는 이 때 눈이 어두워져 청맹과니가 되어 있었고 교단의 대표자로 있었다. 종도사님의 참여와 더불어 용화동에서 교체조직(敎體組織)에 들어가 이전의 대법사조직은 모두 해체되었고(대법사라는 이름은 그 후로 구습으로 붙어다녔을 뿐이다), 비록 교체조직은 되었으나 당시의 용화동에는 이렇다 할 본부건물도 없었고 다만 명목만이 남아있었을 뿐이다. 제1차 난법시대가 끝나고 이제 제2변의 새로운 교단시대의 개척의 큰 소명이 눈앞에 놓여있는 새 시대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때 교단의 대표자로 있던 이상호는 60을 바라보는 고령이었고, 해방과 더불어 출옥한 그의 동생 이정립은 51세였다. 그러나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당시에 인생의 황금기인 청년기로서 도운의 황무지시절이었던 이 때 최일선에서 대세를 돌리는 개척의 일꾼으로 직접 뛰셨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개척의 일선에서 총사수(總師首)로서 인사의 대권을 쥐고 포교에 전력하여 이때부터 상제님의 진리가 사회에서 증산교로 널리 불려지게 되었다. 이후 교세는 구름일듯 하여 경인(1950)년 6· 25남북전쟁 전까지 충청도·경기도 등을 중심으로 대세를 굽이치게 되었다.

 

그 후 안운산 태상 종도사님이 거처를 옮겨 교단을 떠나 은둔하신 뒤에, 형을 계승해 용화동 교단의 대표자(종사)로 있던 이정립은 신축(1961)년에 교파 연합체인 동도교(東道敎)를 결성하여 교명을 동도교라 하다가 계묘(1963)년 동지 때 지금의 증산교로 다시 바꾸었다. 그런데 당시 개척과정에서 신도가 많아지자 금산사 아래의 용화동 땅을 모두 사서 신도들을 집단 이주시키자는 이상호씨의 주장이 나오는 등, 인사대권을 쥐고 계셨던 개척의 총사수 운산과 시시비비가 자주 생겨 기운이 갈먹기 시작했다. 세운의 상씨름(6.25남북전쟁)이 발발한 이듬해 신묘(1951)년 동지절에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총사수)은 시운의 한계에 이르렀음을 내다보시고 대휴게기를 설정하고, 신도들에게 전쟁중에 더 이상의 포교활동을 중단하고 현상을 유지하며 대기할 것을 공표하셨다. 그리하여 갑인(1954)년 후반기로부터 20년 동안 ‘20년 말도 도수’로 제3변 도운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은둔하였다가 을묘(1975)년에 기두하여 교세를 점검하니 교단이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할 정도로 과거의 중진간부 신앙인들이 모두 개인신도로 전락해 있었다. 더욱이 남아 있는 신도들의 정신상태가 본연의 종교적 자세와 사제지의(師弟之義)는 사라지고 서로 교묘한 잔재주와 사욕으로 대립과 갈등만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 이 곳 제2변 도운시대의 용화동의 묵은 기운을 털어버리고, 상제님이『묵은 기운은 애처없이 버리고 새 배포를 꾸미라. 만일 아껴서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몸까지 따라서 망하느니라』,『내 일은 판 밖의 콩밭(太田)에서 새 판이 벌어진다』고 하신 대전에서 새 판을 개척하신 것이다. 이것이 고수부님의 1변 도운시대와 태상종도사님이 친히 개척하신 2변 도운의 증산교시대를 계승하여 지난날 두 차례의 대부흥의 역사의 묵은 기운을 개벽하여 새 시대를 열고 있는, 대전에 본부를 둔 오늘의 증산도(甑山道)의 개창과정이다. 이러한 흥망사의 경험을 간직하고 마무리 3변 도운을 태전(대전)에 여신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한 세기에 걸친 증산도의 흥망의 역사를 오늘의 세인은 물론 상제님의 신앙인들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증산교의 초대 대표로 있던 이상호는 병오(1966)년에 79세로 죽고 그를 계승한 동생 이정립이 2대종사로 추대되었으나 2년 만에 74세(1968)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용화동 증산교 교단은 노인들 몇몇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이 용화동에서 몸담고 제2변 도운을 개척하신 이후(53년 휴전 이후)에 용화동 교단에 입문한 사람들은 용화동 증산교의 개척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풍문으로만 겉넘어 왜곡된 소식을 알고 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앙의식이 성숙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묵은 아성을 버리지 못했던 2변 도운의 일꾼들과는 진법도운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상제님께서 『삼천(三遷)이라야 내 일이 이루어지느니라.”』고 도운공사를 보신대로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시간과 공간을 태전으로 옮겨서 마무리 상씨름 3변 도운을 열게 된 것이다. 증산 상제님의 도사(道史)의 핵심맥을 바로 보려면 고수부님의 첫 교단 개창과정으로부터 제3변 도운의 성숙기에 이르기까지, 제1변 도운의 난법시대를 청산하기 위한 중간마디에 해당하는 용화동 증산교의 개척사를 바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상제님 천지공사의 대의를 모르는 이들은 [용화동 증산교]에서 때가 되면 상제님 일이 자연적으로 성사된다는 허구에 빠져있다.

 

『관통증산도2』-12-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Comments

글이 없습니다.
글이 없습니다.





State
  • 오늘 방문자 399 명
  • 어제 방문자 1,067 명
  • 최대 방문자 3,354 명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