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 증산도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동학혁명 60만 대군이 일어난 지 한 세대 후, 증산 상제님의 도법을 이 세상에 선포하던 초기에 그 가르침과 단체를 보천교普天敎라 했습니다. 1910~20년대에 동학을 믿은 사람이 2백만에서 3백만이었으니 당시 조선 사람의 3분의 1 내지 4분의 1이 동학을 한 겁니다. 이 보천교 신도의 수가 조선총독부와 미국 국무성 공식 기록에 6백만이었어요. 그때 인구가 천9백만 정도였으니까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보천교의 조직과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했습니다. 당시 정읍井邑에 본부가 있었던 보천교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쓴 큰 자금이 보천교에서 흘러들어 갔어요. 독립운동 자금도 대부분 보천교에서 댔어요. 또 상제님을 모신 성도들, 보천교 핵심 간부 성직자들이 동학혁명 때 종군從軍했던 분들입니다. 교주 차경석車京石(1880∼1936) 성도라든지, 초기에 함께했던 성도들이 대개 동학 신도, 동학군 출신입니다.

 

 

보천교는 한마디로 독립운동의 심장부 역할을 했습니다.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중국에서 귀국을 할 때 비행기에서 내려서, 또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어요. 김구 선생의 비서실장 조경환이라는 분의 증언을 들어 보면 “우리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정읍 대흥리 보천교에 빚을 많이 졌다.”는 겁니다. 그 다음해 1946년에 이승만李承晩(1875~1965) 박사가 정읍에 내려와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겠다는 중대한 선언을 했어요. 그런데 왜 정읍에 와서 그런 선언을 했을까요? ‘우리가 정읍에 많은 신세를 졌다’는 고백, 그런 담론이 지금도 정읍에서 시정市政을 펴는 분들의 사석에서 오고 가고 있어요. 

 

 

 

 

보천교 역사를 보면, 처음에 교명을 선도仙道라고 했습니다. 보천교는 원래 강증산 상제님의 반려자 되시는 고高 수부首婦님이 창도를 하신 겁니다. 강증산 상제님이 지상에 오셔서 9년 동안 가을 우주 새판을 열어 놓으시고 천상 보좌로 가시고 난 2년 뒤, 정확하게 증산도 연호年號로 도기道紀 41년, 1911년 음력 9월에 성도들을 모아 놓고 도판을 여셨어요.

 

 

 

그러고서 태모太母님 즉 고 수부님이 8년 만에 정읍 대흥리를 떠나시고, 교권을 장악한 차경석 성도가 1921년에 경상도 함양 황석산黃石山에서 대천제를 올리고 보화교普化敎라고 그랬어요. 조화를 널리 펴는 무궁한 조화법, 천주님의 조화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형인데 이듬해 조선총독부에 공식 등록을 할 때, 천도교도 천 자를 쓰고 유교도 천을 중시하니까 보천교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등록을 한 뒤에 일본에서 보니까, 이게 독립운동의 심장부예요. 그래 이것을 박멸하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압을 했습니다. 3년 후인 1925년에 차 교주가, 중국 황제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앉는다고 십일전十一殿 공사를 벌였어요. 저것이 정읍 대흥리에 세운 십일전인데, 보천교의 진리 주제는 십일전이라는 세 글자에 다 들어 있어요.

 

 

 

9천 년 전 천부경天符經에 일적십거一積十鉅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태극一太極 우주의 조화에 의해서 하늘, 땅, 인간이 열리고 우주 가을이 되면 하느님, 삼신상제님의 조화법으로 십무극十無極 세상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 십일전을 가지고도 몇 시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한 지 4년 뒤에 낙성식을 올리려 할 때, 일본이 경찰 부대를 동원해서 궁전을 포위했습니다. 그래서 낙성식을 못 했어요. 그리고 극악한 탄압으로 들어갔습니다.

 

 

보천교의 독립운동

 

 

 

보천교는 1920년에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고, 1921년에 상해임정에 거금을 군자금으로 보내다가 걸려들기도 합니다. 1924년에는 김좌진金佐鎭(1889~1930) 장군 부대에 거금 2만 원을 지원하고 1925년에는 상해임정 정의부正義府에 거금을 보냈어요.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보천교의 진면목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화엄경을 번역한 탄허呑虛(1913~1983) 스님의 아버지가 김홍규金洪奎(1876~1959)라는 분인데, 보천교의 2인자로 조선의 북도北道 책임자였어요. 탄허 스님이 글재주가 비상하니까 보천교에서 차 교주의 후계자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탄허를 길렀다고 합니다.

 

제가 보천교의 독립운동 역사 관련 내용을 수백 페이지를 뽑아서 쭉 보니까 20~40년대의 종교단체 항일운동 기사의 54%를 보천교가 차지하고 있어요. 보천교에는 소년단 조직도 있었어요. 또 해외 선교 계획도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1925년에 언론에 보천교가 친일단체로 매도되고, 1930년에는 유사종교 해산령이 내렸습니다. 1936년에 차경석 성도가 윤 3월 10일 날 돌아가시자 일제가 즉각적으로 해산 명령을 내렸어요. 경관 40명이 보천교를 급습해서 해체를 시작했는데, 아시아 최대 궁전 십일전을 뜯어다가 지은 게 무엇인가? 대한민국 불교 조계종 본사, 서울 종로 2가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이에요. 역사가 이렇게 됐어요.

 

일제는 왜 보천교를 없애 버리려 했는가?

 

 

 

우리에게 개벽 소식을 제대로 들을 수 없게 만든 ‘역사의 단절’이 있었던 이유, 그것은 놀라운 이야기인데요. 당시 보천교 신도들이, ‘앞으로 일본은 미국에 의해서 멸망당한다’고 한 겁니다. 증산 상제님의 5만 년 개벽공사 도수 프로그램 말씀 가운데, ‘일본 사람이 미국과 싸우는 것은 배사율背師律을 범하는 것이므로 장광長廣 80리가 불바다가 되어서 일본은 망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쌀은 미국이고 솥은 조선이니, 밥을 지으려면 쌀이 솥단지로 들어오지 않느냐’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것이 간태합덕艮兌合德 도수입니다. 오늘날의 한미동맹에 대한 전략적 사고와 정책은 이승만 박사가 처음 낸 것이 아닙니다. 인하대학교 남창희 교수와 국민대학교 김원덕 교수가 나름대로 우리나라 근대사의 대가인데, 이분들이 두 달 전에 울산에서 열린 세계정치학회에서 이 문제를 발표했어요. 보천교에 대해서 10년 이상 연구한 남 교수는, 한미동맹 전략의 원형이라는 것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보천교 신도들이 말한 내용이라고 했어요.

 

 

미국이 해방군으로 들어오면서 일본 제국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지구촌에 새판 역사가 열린다는 겁니다. 이것을 오선위기五仙圍碁 상씨름판 도수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하나의 개벽 역사의 주제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정보를 입수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보천교를 제거해야 된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온갖 탄압을 자행했어요. 기독교, 불교, 유교 이것만 종교이고 나머지 민족종교, 자생종교라는 것은 다 사이비, 미신이라 했습니다. ‘너희들을 근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 큰형님 일본이 그 뿌리를 뽑아 주마’ 해서 해산령을 내린 겁니다. 그래서 보천교 신도들이 주문도 크게 못 읽고, 숨어서 목 안 소리로 읽고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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