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도장이야기

[자료] 가족신앙이 이룬 조화의 도방(오산대원도장 유재합, 김동열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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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 신앙은 깊은 인연과 음덕이 작용하는 축복의 신앙이다. 현실의 삶에서 진리에 감화되어 도문에 들어왔더라도, 나중에 알고 보면 보이지 않는 조상의 공력이 음양으로 작용한 사례가 많음을 확인하고 종종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있다. 때때로 경탄을 넘어 두려움을 안겨 주기도 하는 신도神道의 작용을 생각하다 보면, 참 하느님의 대도 진리 신앙에는 반드시 일정한 원인과 결과가 그림자처럼 수반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어릴 적의 추억 속에 하느님을 공경하고 영성으로 가득 차 있었던 가족이나 가정의 모습이 떠오른 적이 있는가. 맑은 정화수를 앞에 두고 읊조렸던 할머니의 기도 소리가 정겨움과 평온의 리듬으로 기억에 남아 힘든 내 자신에게 문득 위로가 된 적은 없었는가. 만일 있다면, 바로 그것이 현존하는 나의 신앙에 신성한 자양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도방은 바로 그러한 영성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건실하고 강력한 신앙의 터전을 다져 나가고 있는 가족의 사연이다. 오산대원도장 유재합(남, 77세, 교무종감), 김동열(여, 72세, 녹사장) 부부 도생이 이룬 가정도장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신앙의 유전자를 온전히 현재적 삶에서 구현하고 승화시키고 있는 도방이다. 이들의 신앙 역정에는 여러 현실적 난관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코 허위와 낙망에 빠지지 않고 꿋꿋하게 발걸음을 옮긴 끝에 증산도 진리의 성문에 진입을 했다.

어려서부터의 영적 배움과 단련이 진리를 향한 평생의 이정표 역할을 했고, 가족신앙의 굳건한 기틀 안에서 성직聖職의 기회를 만나 가족 중에 천지의 일을 집행하는 봉직자를 낳기도 한 도방의 흥미로운 신앙 이야기를 펼쳐 보고자 한다. 이 가족의 삶, 이 가가도장의 신앙 스토리에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란다.


지난 7월 둘째 주 목요일 오후 취재진은 경기도 평택시 서정동에 소재한 이 부부의 가정도장을 찾아갔다. 아파트 4층에 있는 가정도장 입구에 들어서서 오른편에 있는 거실로 진입하니 태을랑 티셔츠를 똑같이 갖춰 입은 유재합, 김동열 도생과 장녀 유정선 도생, 그리고 다섯 살배기 귀여운 외손녀 김연교 초립동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방에 조성된 도방은 한쪽 벽면 전체에 신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중앙에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 그리고 태상종도사님 존영이 함께 모셔져 있고, 오른편에 천부경과 염표문 족자가 걸려 있으며 하단에는 조상선령신 신위와 “나는 오직 신앙을 위해 생존한다”는 태상종도사님 말씀이 적힌 패가 놓여 있다. 또한 별도의 왼쪽 벽면에는 평택기지신과 덕암산신 신위도 따로 모셔져 있다.

전체적으로 틀이 잡히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도방에서 예를 갖춘 후, 취재진은 네 가족과 거실에 마주 앉아 어릴 적 어머니의 신앙 이야기부터 하나씩 보따리를 풀어 가며 듣는 시간을 가졌다. 참고로, 신앙생활 이야기의 주된 줄거리는 도방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김동열 도생의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음을 밝혀 둔다.


신앙의 근원과 진리 안착의 여정


어머니로부터 배운 신앙 문화
김동열 도생은 충남 대천(현재는 보령)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성장했다. 김 도생의 어머니는 동학 계열의 ‘수운교’ 신앙을 하신 분이었다. 매일 새벽마다 청수 모시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성장한 탓에 김 도생은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의 틀을 이해하고 익숙해졌으며 자연스럽게 정착이 되었다고 말한다. 시루떡을 쪄서 머리에 이고 이른 시간에 기도하러 집을 나서시는 어머니를 보며 ‘정성’이라는 것이 뭔지를 이해했고, 남을 돕고 봉사하며 음덕을 베푸는 일을 좋아하는 지금의 성향도 모두 성장 시절 가정의 환경과 분위기에 영향 받은 바가 컸다는 것이다.

신앙을 생활의 일부로 삼으며 성장한 김 도생은 결혼 적령기를 맞으면서 인근 동네에 사는 분과 중매로 만나 결혼을 했다. 이렇게 맺어져 함께 가정을 이룬 배우자가 도방의 가장인 유재합 도생이다. 두 사람은 대천에서 신혼 살림을 꾸리다가 첫딸을 낳고서 1972년 평택 근교로 이주해 왔고 이후 우여곡절의 정착 과정을 거치며 평택시 서정동 현재의 주거지에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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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기에 만난 수상한 진리 단체
나름대로 열성을 다해 최선의 가정 생활을 영위하였지만, 이 가족은 경제적 문제 및 가정사로 많은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빚을 내어 평택시 외곽에 땅을 사서 집을 짓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여 부채가 점차 늘어났다. 더구나 살림에 도움을 주고 있던 큰딸마저 일시적으로 몸이 아파서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었기에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이런 상황을 알게 된 한 지인이 조상님 천도식을 집에서 해 보자고 권했다. 김 도생은 원래 어려서부터 불교 신앙을 했고 절에서도 천도식을 여러 번 해 보았기에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고, 낯선 장소에 갈 일 없이 집에서 한다는 말에 큰 부담이 없을 것 같아서 하겠다고 했다. 천도식을 올리기로 한 날 지인과 함께 제물 진설 및 예식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왔다. 그런데 구체적인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절에서 왔다는 말만 하고 자세한 내용은 회피하는 반응을 보여 이상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후 안성, 포천 등지의 기도하는 곳에 가자고 해서 동행했으나 묻는 말에 제대로 응답을 하지 않고 자꾸 감추려 하며 생소하고 이해도 안 되는 의식에 참여케 하는 등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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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알려 준 증산도 신앙
김 도생은 그 당시 조계종 스님이었던 시동생의 도반이 되는 분과 교분이 있어 그분이 집에 자주 왔었는데, 그 스님께 당시 겪은 상황을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그랬더니 스님은 단번에 그곳은 ‘OO진리회’라며 서점에 가서 『OO진리회의 비극』이라는 책을 직접 사다 주면서 읽어 보라고 했다. 책을 읽고 나서야 그곳이 어떤 단체인지 알게 됐고, 김 도생은 바로 그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다시는 찾아오지도 전화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마무리를 지었다. 지면이 있는 스님 덕분에 화를 면한 셈인데, 그 스님은 OO진리회의 실상에 대해 얘기를 해 주었고, 증산도가 바른 곳이라며 도장에 대해 알려 주고 증산도의 태을주 주문이 신비한 주문이라는 말을 하면서 태을주 수행과 기도를 하면 어려운 일들도 잘 끌러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아가 직접 114를 통해 도장에 연락을 해 주기도 했다. 또한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잘 모르지만 스님도 예전에 진리를 찾아 방황하던 시절 증산도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치며 당시 평택신장도장과 연결이 되었고 도장의 포정님이 집에 방문하면서 비로소 진리를 찾는 여정은 종지부를 찍었다. 김 도생이 도장에서 파란색의 『다이제스트 개벽』 책을 받아 왔고, 이 책을 전부 읽어 본 막내딸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이 가족은 증산도 진리로 성큼 다가서게 된 것이다. 얼마 뒤 간단한 교육을 거친 후에 김 도생은 큰딸(태안도장 유정선 도생) 및 막내딸(본부도장 유선희 도생)과 함께 2000년 8월 무사히 입도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셋째 딸(오산대원도장 유경희 도생)과 아들(오산대원도장 유상훈 도생)이 입도하였고, 1년 후에는 남편 유 도생까지 입도를 함으로써 가족신앙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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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길로 인도한 영적 체험


“너 하느님 믿어라. 하느님 믿어라.”
김 도생은 입도 전 동네에 있던 절에서 거의 매일 새벽마다 5년여 기간 동안 기도를 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받은 신앙 유전자 덕분일까? 김 도생은 뜻을 두고 마음을 정해 기도를 시작하면 반드시 끝을 볼 정도로 단단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 정성이 끊어지지 않게 지속하는 일도 근기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절에서 기도하던 그 시절에 김 도생은 이상하게도 대웅전이 아닌 산신각에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증산도 입도 얼마 전에 꾼 꿈속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낯선 세 사람이 “너 하느님 믿어라. 하느님 믿어라.”라고 등 뒤에서 계속 얘기하면서 집까지 따라오는 모습을 보았다. 김 도생은 ‘절에서 기도를 했는데 하느님을 믿으라니, 참 묘한 꿈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냥 넘겼다. 하지만 두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게 되자, 이상한 마음이 든 김 도생은 집에서 아이들에게 “우리 교회 다녀야 하나 보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절의 부처님 말고 ‘하느님’을 믿는 곳은 교회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집에 방문하신 도장 포정님이 “증산 상제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김 도생은 “이제 내가 바른 길을 찾았구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고 한다.

절체절명의 사고에서 목숨을 건지고
입도 당시 남편 유 도생은 화물을 배달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입도한 지 얼마 후 유 도생은 자전거로 화물을 배달하던 중에 대형 화물 차랑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부딪치면서 유 도생이 차 밑으로 들어가 버린 상황이라,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거의 살아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 도생은 찰과상만 입었고, 그 외에는 골절상 하나 입은 곳이 없었다. 김 도생은 지금도 남편 유 도생이 그런 절체절명의 위중한 상황에서 기적처럼 목숨을 건진 것은 평소 늘 태을주를 읽고 다니는 생활을 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라 확신하고 있다. 유 도생은 김 도생의 생각에 수긍하면서, 자신에게는 무엇보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상제님 신앙을 하는 그 자체가 가장 좋은 일이며, 도장의 도생들과 친교를 나누는 일도 신앙을 유지해 나가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신도와 교감을 한 영적 체험들
평소 영성에 밝은 편인 김 도생은 입도 후 2001년 태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충의핵랑 출정식에 첫째와 셋째, 그리고 막내딸과 함께 참석을 했다. 당시 행사장인 충무체육관에 들어서는 입구에 이르자 누군가가 “어서 오너라.” 하며 크게 감싸 안아 맞아 주는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져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또한 그날 현장에서 처음으로 도공道功을 했는데 그간 병원에서 병명조차 모를 정도로 이유 없이 앓고 있던 몸이 치유가 되었고, 다리가 아팠던 장녀 유정선 도생도 아픈 곳을 두드리는 도공을 통해 같이 치유가 되는 은혜를 받았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외손녀(5세 김연교)가 전선을 만지고 있어 크게 만류하는 꿈을 꾸고서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보니 실제로 외손녀는 열이 펄펄 끓는 심각한 상태였다. 이에 김 도생은 밤새 주문을 읽으며 신유를 했고, 아침이 되자 잠시 열꽃이 피다가 결국 치유가 되었다고 한다.

도장에서도 영적 체험이 이어졌다. 한 예비도생이 21일 정성 공부를 마치고 제물치성과 함께 입도식을 한다고 해서 장을 보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그 도생이 “어떻게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골라서 사셨느냐?”며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김 도생은 그저 감각적으로 마음이 가는 대로 제물을 구입한 것인데, 치성을 올릴 당사자 도생은 조상님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만 골라서 신단 제물을 구입해 온 것에 놀라움과 신기함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종통의 틀을 잡고 심법을 닦는 삶
영적인 진리 인식과 관련하여 김 도생은 종통에 관한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 평소에 늘 “우리는 상제님, 태모님을 직접 뵙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법적, 진리적으로 보면 현실에서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이 상제님, 태모님을 대신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두 분을 최고로 존귀하게 모시고 따라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틀입니다.”라고 말하곤 한다는 김 도생은 지난 3년 정도의 기간에 걸쳐 38만 배례를 달성했다. 정성을 잃지 않고 심법을 닦는 방편으로 배례를 올리면서 김 도생은 “저는 지식도 없고 능력도 부족하지만 저를 필요한 데에 써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올린다고 했다. 김 도생이 어떤 의식과 자세로 신앙을 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말이다.

도방은 가정신앙의 보루요 신앙력의 원천


신앙과 정성 유지를 위해 만든 도방
김 도생은 처음 신앙을 시작했을 때는 집에 차도 없었고, 집의 위치도 시 외곽이었던 탓에 도장에 가려면 상당한 신경을 써야 했다. 하루에 10여 차례만 운행하는 버스를 그것도 한 번 더 갈아타고서야 도장에 갈 수 있었기에 새벽에는 물론 낮에도 수행을 하러 가는 것이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가족들과 상의하여 방 한 칸을 비워 간소하게 신단을 꾸민 후 청수를 모시고 수행과 기도를 하며 신앙을 지속해 갔다. 그때는 도방이란 생각을 가지고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바로 가정도방의 시작이었다. 평소에 늘 신앙을 지키고 정성 유지에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김 도생은 가족의 안정과 모든 일을 풀어가는 기반을 가정도방에 두고 있었다.

도방을 가꾸는 건 신앙의 기쁨
김 도생은 도방의 형성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가정도장이 그렇게 마련된 후로 우리 가족의 신앙 중심은 늘 도방이었습니다. 지역도장에서 도정을 받들고 조직과 함께 신앙을 하는 것은 도생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생활 가까이서 함께 숨 쉬며 신앙을 지켜 내고 항상 가족신앙을 지켜준 것은 가정도방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는 청수 올리고 수행만 하다가,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으면 봉청수에 더하여 간단한 제물을 올리거나 고사치성을 올리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처음엔 작은 가정용 어진을 모시다 좀 더 큰 어진으로 바꾸고, 청수 그릇도 바꾸고, 모시는 신위도 늘리고, 이렇게 도방을 좀 더 잘 갖추고 가다듬는 것이 신앙의 작은 기쁨이었어요.”

가정도방의 유래와 의미를 설명하는 김 도생의 말에는 짙은 감회와 연륜이 묻어 있다. 왠지 모를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에 이어 하느님을 받들면서 오랜 세월 정성스럽게 신앙의 길을 찾아 온 김 도생의 공력이 고스란히 전이된 탓일 것이다.

김 도생 가족은 지역도장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2003년 오산대원도장과 가까운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집을 옮겨 오자마자 안방을 도방으로 꾸몄고 아이들 세뱃돈을 모아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을 구입했다. 천지부모 어른을 안방에 든든하게 모시고 늘 새벽에 일어나 청수를 올리고 배례와 수행을 하는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또 한 달에 한 번씩 꼭 가정에서 제물치성을 올리며 신앙을 돌아보고 가정신앙을 굳건히 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때때로 이런저런 사건들이 괴로움을 안겨 주는 일도 있지만, 김 도생은 그때마다 가정도방에서 봉청수를 하며 척신들을 향해 강단 있는 각오 몇 마디를 남긴다고 한다.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 봐라. 내 신앙은 절대로 흔들지 못한다. 나는 청수 모시다 죽을 거다.”

정성으로 가꾸고 보은하는 신앙을 해야


김 도생은 처음부터 어떻게 해야겠다고 작심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서 만든 도방이 아니었기에 조금은 미흡하고 부족한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의 도방 운영 계획을 밝혔다. 처음부터 그래 왔듯이 이 가족의 신앙 출발이나 가정도방의 형성 과정에는 모두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운 마음과 근본신앙의 실천 행동이 개입돼 있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들이 가족들로 하여금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일어서게 했고 어느 정도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신앙하면서 도방을 정성스레 가꾸어 나가는 것은 곧 가족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김 도생은 그러한 믿음과 확신으로 도방을 관리할 생각이라고 했다.

김 도생은 향후 신앙의 각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간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도방을 중심으로 한 가족신앙으로 극복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가정도장을 소중히 잘 가꿔서 포교와 신앙의 보금자리로 만들어 천지일월 사체 하나님과 조상님께 보은하는 참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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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직의 경위와 사명, 그리고 가족 이야기
가족의 응원으로 걷게 된 봉직의 길 김 도생은 가족과 친인척, 지인, 개척 등에 걸쳐 다양한 포교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가족포교 상황이 두드러지는데, 부부간의 신앙을 바탕으로 자녀 넷과 사위에 이르기까지 7명의 도생이 합심해 신앙을 하고 있다. 이들 가족 대부분은 지역도장에서 최선을 다해 건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중 막내딸인 유선희(본부도장, 37세, 종감) 도생은 지역도장이 아닌 태전 본부에서 일정한 책임을 맡아 봉직을 하고 있다. 그리 흔치 않은 본부 봉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유선희 도생을 만나 봉직의 경위와 소감을 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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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희 도생은 본부 문화경비대에서 부서 책임자로 봉직하고 있다. 2000년 어머니, 큰언니와 함께 입도하였고, 2003년 성녀포교단에 입단하여 소정 교육을 이수한 후 문화경비대 봉직을 시작해 지금까지 줄곧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다. 도문에서 성직에 종사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결정과 각오가 기반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 여건, 특히 가족들의 동의 내지는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성사되기 어려운 일이다. 삶의 여러 조건과 방식 중에서도 사상이나 진리, 종교 등의 문제는 개개인의 성향과 가치관의 문제라서 가까운 가족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재단하고 좌우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유선희 도생은 가족신앙이라는 배경이 긍정적으로 작용을 했다. 다 함께 상제님 진리를 따라 증산도 신앙을 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봉직 결정에 별다른 난관은 없었다.

“저희 가족이 상제님 신앙을 함께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저에게 큰 버팀목이 되고 있어요. 당시에 가족 중 한 명 정도는 천록 봉직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가족들의 응원이 있었기에 큰 걸림돌 없이 23세부터 봉직 생활을 시작해 지금까지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가족과 봉직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며 유선희 도생이 들려준 말이다.

고교 시절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도 해 보았지만,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세상 속 일반인들처럼 잘나가는 직장을 목표로 뛰거나 특정한 세속적 가치를 지향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당시 가정 형편도 넉넉하지는 않았으므로 유선희 도생은 대학 진학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지역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생활해 나가려면 직업은 있어야 하고, 기왕 직업을 선택하려면 그런대로 사회에 도움도 되면서 자신의 기질과도 맞는 직업을 택하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결과 경찰공무원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19세인 고교 3학년 말부터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다 20살이 되어 증산도를 만났고, 진리 공부에 심취해 도장 중심의 생활을 하다 보니 경찰공무원보다는 성직 수행 쪽으로 자연스럽게 진로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충직과 보은의 삶을 살아갈 것 유선희 도생은 봉직을 시작한 스물셋이 그렇게 적은 나이가 아니지만 사회 경험이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몇 차례 좌절과 위기도 없지 않았지만 가족신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잘 극복해 왔다고 회고했다. 덧붙여 앞으로의 신앙생활과 이루고 싶은 소망에 대해 겸손함을 담아 이렇게 언급했다.

“이제 두 달 후면 봉직 햇수가 만으로 14년이 됩니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봉직기간 동안 특별히 변변한 성과도 없었고, 모범적인 봉직자로서의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한 것 같아 태상종도사님과 종도사님께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종통을 사수하는 충직한 봉직 생활을 바탕으로 수행과 기도를 꾸준히 하여 육기초를 완수하는 태을핵랑이 되어 천지일월 사체 하나님과 조상님의 홍은에 보은하는 일꾼으로 거듭날 것을 서원 올립니다.”

가족신앙의 힘이 보여 준 것들 취재진은 유선희 도생 인터뷰와는 별도로 김동열 도생에게 막내딸의 본부 봉직에 대해 어떤 소회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김 도생은 “뿌듯하고 감사하다.”는 두 마디의 말로 응답을 대신했다. 가족으로서 상제님의 천지 사업에 헌신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며, 제 스스로도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10년이 넘도록 한 길을 걷고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또 어렸을 때나 커 오면서, 그리고 입도 당시 진리를 대했던 모습 등을 떠올려 보면 막내딸은 진중하고 과감하면서도 묵묵히 제 일을 해내는 성격이라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가족끼리 신뢰를 갖고 서로 든든히 의지하며 이끌어 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한 폭의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다. 그래서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감사하고 흐뭇하다. 가족신앙의 힘과 능력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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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가가도장은 어려서부터 배운 신앙의 기본과 정성을 근기로 삼아, 참 하느님 신앙에 대한 영적 메시지를 바르게 실행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신앙의 길을 찾아 나섰고,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증산도 신앙에 진입한 유재합, 김동열 도생 부부의 도방 이야기를 만나 보았다.

이 도방은 가족 대부분이 신앙의 바른 자세와 영성을 품에 안고 함께 결속해 가족신앙의 기틀을 형성하였으며, 그 속에서 꾸준한 정성과 기도 수행을 통해 가족의 여러 문제들을 끌러 냈고 병마나 사고의 위협에 맞서 이를 극복해 내기도 했다.
특히 가족의 지원을 바탕으로 상제님 천지사업에 헌신하는 성직자가 나온 것은 가정도방과 본인 스스로를 위해 감사하고 영광된 일이며, 그것은 결국 신앙의 대의와 깊이를 더하고 신앙력을 한층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신앙을 하는 가족끼리 신뢰를 갖고 서로 든든히 의지하며 이끌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은 가족신앙과 가정도방의 미래, 그리고 개인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는 점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가족들은 가정도방에 정성을 쏟아 가꾸어 나가는 것이 결국은 가족의 신앙을 굳건히 지키는 방법임을 확신하고 있으며, 견실하고 조화로운 가가도장을 통해 신앙의 성공은 물론 진리의 은혜에 보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정성 기운과 신앙 의식을 토대로 반드시 천지일월 진리 주체에 보은하고 신앙의 큰 열매 맺기를 소원하며, 상제님과 태모님, 그리고 조상선령신과 천지성신의 은혜와 사랑이 이 가정도방에 가득하시기를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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