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문화미디어

정열적이고 활동적인 다세계의 교차로 멕시코 (영상+자료)

운영자 0 2,829

정열적이고 활동적인 다세계의 교차로 멕시코 Mexico

멕시코는 북아메리카 지역 고급 원주민 문명들의 거점으로 출발해 오랜 역사를 이어 온 나라로서,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300년간 식민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후 개발 독재 정치를 거쳐 멕시코혁명으로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회 정치적으로 계층별 빈부 격차가 심하고 마약카르텔과의 전쟁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는 어두운 이면을 갖고 있는 반면, 열정적이고 낙천적인 국민성과 더불어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적 잠재력과 문화적 역량 등을 무기로 떠오르는 차세대 강국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멕시코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본다.



 

201602_132.jpg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멕시코(United Mexican States)는 북아메리카 남서단에 위치하며 북으로 미국과 3,200㎞의 국경을 접하고 있고 남으로는 과테말라, 벨리즈Belize와 접경해 있다. 국토는 세로로 북쪽에서 남쪽까지 3,000㎞ 넘게 펼쳐져 있다. 가로 폭은 위치에 따라 다른데, 북쪽에는 폭이 2,000㎞가 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남쪽 테우안테펙Tehuantepec 지협의 폭은 220㎞ 이하까지 줄어든다. 시에라마드레Sierra Madre 산맥이 남북으로 국토 중앙을 통과하고, 국토의 절반 이상이 고지대로서 해발 평균은 중부 2600m, 북부 1200m에 이른다. 바하칼리포르니아Baja California 반도는 멕시코 서쪽의 1,250㎞짜리 반도로서 코르테스Cortés 해(캘리포니아 만)를 구성한다. 동쪽에는 멕시코México 만과 멕시코의 또 다른 반도인 유카탄Yucatán 반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캄페체Campeche 만이 있다. 멕시코 중부는 광대하고 높은 고원 지대이다. 멕시코의 큰 강으로는 북쪽 국경의 리오그란데Rio Grande(리오브라보Río Bravo) 강이나 남쪽 국경의 우수마신타Usumacinta 강이 있다. 해안선의 길이는 9220㎞로 캐나다에 이어 아메리카대륙에서 두 번째 규모이며 국토 면적은 196만 4375㎢로 세계 14위(한반도의 약 9배) 크기이다.

멕시코는 고도에 따라 다양한 기후 분포를 보이는데, 열대 저지, 온대 고원, 냉대 침엽수림, 알프스형 초지, 만년설 고산대가 고도에 따라 관찰된다. 해안 지대는 열대성 기후로 연중 고온 다습하고, 북서쪽 연안의 저지는 반사막이 펼쳐지는 건조지대이다. 중부 고산 지대는 우기를 제외하고는 건조한 온대성 기후이며 나머지 국토는 아열대 기후이다. 해발 2,300m에 자리 잡은 수도 멕시코시티는 연중 온난한데, 6월~9월에는 우기로서 기온이 온화하고, 11월~1월은 기온이 낮은 겨울 기후이며, 나머지 2월~6월은 한국의 봄 기후와 비슷하다. 연중 기온은 통상 5℃~25℃ 사이를 기록하고 있다. 강우량은 일반적으로 적으나 남쪽으로 갈수록 많아져서 남부에서는 약 600㎜, 북부에서는 약 200㎜ 정도이다.

멕시코의 남부지역에는 지진이 자주 나며 대표적인 예로 1985년 멕시코시티 지진을 들 수 있다. 이 지진으로 사망자만 5,000명이 나왔지만 이 지진 이후 법이 바뀌어 많은 건물들이 내진 설계를 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지진은 거의 일본처럼 자주 일어나는 편인데, 특히 멕시코시티는 아스테카 왕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án이었을 때부터 호수를 매립하여 발전해왔기 때문에 시 전체가 지반이 약하여 다른 도시에 비하여 지진에 취약한 상황이다.
 

201602_134.jpg

멕시코의 역사


멕시코의 고전기 문명
멕시코 지역에는 BCE(기원전) 2만 년경에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있으며 빙하기 시대에 아시아인들이 베링해협을 건너와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BCE 1000년경 현재의 베라크루스 지방을 중심으로 멕시코 고원 최초의 문명인 올메카Olmeca 문명이 발흥하였다. 올메카 문명은 그들의 지배자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알려진 흑인 인종의 특징을 가진 거대한 석상 두상으로 알려져 있다. BCE 200년~CE 900년 사이에는 멕시코 중앙 고원 텍스코코Texcoco 호수 남쪽에 원형의 대형 피라미드로 알려진 쿠이쿠일코Cuicuilco 동쪽으로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 문명이 세워졌다. 멕시코 지역은 그 후에도 마야Maya 문명(전기 300~600년, 후기 11세기~16세기)과 메시카Mexica(아즈테카Azteca) 문명, 톨테카Tolteca 문명(1세기~11세기)과 같은 여러 고급 원주민 문명의 거점으로 ​​번영하였다.

메시카/아즈테카 제국
14세기 후반, 텍스코코Texcoco 호수 서쪽에 있던 테파넥Tepaneca 족 국가의 아스카포찰코Azcapotzalco에 테소소목Tezozómoc이라는 지도자가 등장하였다. 그가 이끌던 용병부대였던 아즈텍은 테소소목 사후, 15세기 초반에 텍스코코, 틀라코판Tlacopán과 함께 아즈텍 삼국 동맹을 맺었고, 텍스코코의 이름난 군주였던 네살왈코요틀의 사후에 비로소 완전한 지도력을 갖추고 주변국을 정복하여 아즈텍 호수 위에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án을 중심으로 아즈테카Azteca 제국을 형성하였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미주 도착 이후, 1519년에는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가 멕시코에 상륙하였다. 코르테스가 이끄는 정복자들은 아즈테카의 내분과 전승 신화를 유리하게 이용하여 전투를 벌인 끝에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하였으며, 1521년에 황제 쿠아우테목을 처형하고 아즈테카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후 스페인은 이 땅에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새로운 스페인)이라는 부왕령을 창설하였다. 페루 부왕령과 함께 인디아스 식민지의 중심으로 멸망된 테노치티틀란 위에 멕시코시티Mexico City가 건설되었다. 이후 약 3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스페인어와 가톨릭교가 보급되고, 인디오와 스페인인 사이에 혼혈이 진행되었으며, 스페인 기원의 봉건적 대토지 소유 제도가 생겨났다.

201602_135.jpg멕시코의 독립 시대
스페인의 통치는 300년간 이어졌으며, 18세기에 들어서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의 영향을 받아 토착 크리올료Criollo(스페인 본국인들이 식민지 태생 자녀들을 지칭하던 말)들 사이에 독립의 환경이 급증되었다. 크리올료들은 생김새는 본국인과 똑같지만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차등대우를 받았다. 이들이 유럽 각지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유행이던 프랑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고 자신들이 스페인의 신민이라기보다는 식민지 땅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하면서 독립의 싹이 태동하였다.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가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를 스페인 왕 호세 1세로 즉위시켰다. 그것에 반발하는 스페인 민중 봉기를 계기로 스페인 독립 전쟁이 시작되면서, 인디아스Indias(라틴 아메리카; 중남미) 식민지도 가짜 왕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였다. 1809년부터 1810년까지 키토, 라파스, 산티아고, 카라카스, 보고타,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인디아스 각지에서 크리올료들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런 가운데 멕시코에서도 1810년 9월 15일 오늘날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크리올료 출신의 미겔 이달고Miguel Hidalgo 신부 등이 최초로 독립을 선포하는 종을 침으로써 멕시코 독립 전쟁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멕시코의 크리올료는 페루의 크리올료와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의 민중 반란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독립 운동에는 소극적이었고, 이달고 신부와 그 뒤를 이어 독립운동을 주도한 메스티소의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José María Morelos 신부도 스페인 왕당파 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모렐로스의 난이 진압된 후 1820년경에는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와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등이 이끄는 해방군이 남아메리카 각 지역을 해방시켰고, 인디아스에 남는 식민지는 도서 지역과 브라질을 제외하면 페루, 중미, 멕시코 만밖에 없었다.

1821년 9월 15일에 독립 지도자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가 멕시코시티에 침투하였고, 반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멕시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독립해방군을 격파한 스페인 왕당파군의 사령관이었지만 이후 본국에 반기를 들고 멕시코에 주둔하던 스페인군을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투르비데가 멕시코 왕으로 추대하고 싶었던 반대파 전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가 멕시코 입국을 거절하였으므로, 이투르비데가 스스로 멕시코 제1제국의 초대 황제(아구스틴 1세)에 올라 멕시코 제1제국(1821~1823)이 건국되었다.

공화정 시대와 대외 전쟁
멕시코 독립 이후 1823년에는 아구스틴 1세 황제가 중앙아메리카 원정 실패 등의 이유로 재위 10개월 만에 산타 아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가 지도하는 공화혁명에 의해 퇴위하고 제국이 붕괴하면서 멕시코연방공화국República Federal de Mexicanos(멕시코제1공화국, 1824~1935)이 성립되었다. 연방공화국 초대 대통령에는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 장군이 취임하였다. 멕시코는 독립 후 내전에 의한 농업 생산력의 저하, 광산의 생산력 저하, 카우디요Caudillo(독립과 함께 탄생한 돈과 권력을 가진 지방 실력자) 등의 군웅 할거로 인한 유통의 혼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가 이어졌다. 그리하여 1835년에는 1824년에 제정된 연방공화제 헌법을 폐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인 멕시코공화국República Mexicana(República Centralista)으로 전환되기도 했으나, 1846년 8월에 이전 헌법이 부활하여 다시 합중국으로 복귀하였다.

201602_136.jpg멕시코는 코아우일라이테하스Coahuila y Tejas 주에 미국 이주민의 정착을 인정하였는데 1835년에 앵글로색슨 계 이주민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멕시코령 코아우일라이테하스는 1836년에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을 하였다. 그 후 미국이 1845년 텍사스를 합병하자, 1846년에는 텍사스를 둘러싸고 멕시코와 미국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하지만 멕시코는 멕시코시티를 점령당하고 1848년에 패배하면서 텍사스를 매각하고 뉴멕시코 주, 캘리포니아 주 등의 땅을 1,50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게 팔았다. 뒤이어 1854년에도 지금의 뉴멕시코New Mexico 주와 애리조나Arizona 주를 미국에 매각(1,000만 달러)하였다. 결국 멕시코는 리오브라보Río Bravo(리오그란데Rio Grande) 강 이북의 영토(이른바 멕시코 할양지)를 상실하였다.

영토 상실 과정에서 미국과의 갈등이 깊어졌지만, 멕시코는 한편으로 국가적 위기에서 미국의 결정적 도움을 받기도 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발발한 틈을 타서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를 차지하기 위해 출병하여 1863년 멕시코시티가 함락되고 말았고, 나폴레옹 3세가 내세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막시밀리안Maximilian 황제가 멕시코를 통치하는 멕시코 제2제국(1864~1867)이 세워졌다. 이에 맞서 원주민 인디오 출신으로는 최초로 1858년 멕시코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군에 항전하였고, 1867년 멕시코군에 의해 막시밀리안 황제가 처형됨으로써 괴뢰 황제는 종말을 맞이하고 멕시코는 주권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두고두고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1871년 재선에 성공한 후아레스 대통령은 자유주의자로 레포르마Reformar(개혁)을 추진하였지만 1872년 재직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후아레즈의 뒤를 이은 테하다Sebastián Lerdo de Tejada 대통령은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지도력의 부족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201602_137.jpg개발 독재 시대와 멕시코 혁명
이 틈을 타서 1876년 프랑스 개입 전쟁의 영웅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디아스는 자유적 보수주의자와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받아 7번씩이나 재당선을 하며 35년 동안 강압적인 개발 독재를 펼쳤으며 외자를 도입하고 경제를 확장시켰지만 비민주적인 정권 운영으로 국내 각지에서 소요를 유발시켰다. 1907년 미국에서 일어난 공황(금융 위기)의 영향이 멕시코에 미치자 각처에서 농민반란, 노동쟁의 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1910년에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다. 이 때 디아스가 상대 후보인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Madero를 선거일에 체포 감금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계기로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멕시코 혁명Mexican Revolution’이 일어났다. 판초 비야Pancho Villa,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 알바로 오브레곤Alvaro Obregon 등이 이끈 혁명군은 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부군을 물리치고 1917년에 혁명 헌법을 반포하면서 혁명은 완료되었다. 멕시코 혁명 헌법에는 삼권분립, 노동자의 제 권리, 봉건적 토지소유(아시엔다hacienda) 해체 규정 등 기존과 다른 혁신적 조항들이 명기되었다.

멕시코 혁명에 성공한 마데로는 이듬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17년에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가 최초로 혁명 헌법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20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은 의회 존중, 농지 개혁 추진, 노동조합 장려, 교육 문제 등에 주력해 근대화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1933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라자로 카르데나스Lázaro Cárdenas 정부(1934~1940)의 업적은 멕시코 근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카르데나스는 1910년 혁명 후 혼란스럽던 노동자, 농민 조직을 와해시키고 정부 여당인 국가혁명당(PNR)의 지휘 아래 모든 노동자 조합을 복속시킴으로써 오늘날 정부-노조 관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석유산업 국유화를 단행하여 디아스 정부 시절 외국 자본에 종속되었던 경제구조를 재편하고 국가주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근대화 이후 멕시코의 정세
멕시코는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전쟁 특수로 경제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46년에는 미겔 알레만 발데스Miguel Alemán Valdés 대통령이 취임하여 외자 도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본격적인 공업화 시대로 전환하였다. 1968년 멕시코는 올림픽을 개최하였는데, 이 해 10월 2일 틀라텔롤코Tlatelolco 광장에서 진행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는 사건으로 인해 공식 사망자 25명, 인권단체 추정 사망자 350명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멕시코는 2009년부터 민주화 시위에 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1985년 9월 19일에는 멕시코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으며, 1986년 5월 ∼ 6월에는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렸다. 1988년에는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Carlos Salinas de Gortari 대통령이 취임하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s)을 체결하는 등 과감한 시장개방 및 민영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1994년 12월에 취임한 에르네스토 세디요Ernesto Zedillo Ponce de León 대통령은 개방정책의 지속 추진과 더불어 긴축재정, 물가 안정, 구조 조정을 통한 경제 안정화에 주력하였다.

2000년의 멕시코 총선에서 여당인 제도혁명당PRI은 만연한 부패와 침체된 경제 실책,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의 봉기 등에 대한 책임론의 여파로 야당인 국민행동당PAN(Partido Acción Nacional)에게 패배하였고, 같은 해에 치러진 대선에서도 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 케사다Vicente Fox Quesada가 승리를 거두어 같은 해 12월 1일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멕시코는 71년 만에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룸으로써 멕시코 정치 발전과 민주화 성숙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2010년 7월 전국 32개 주 중 14개 주에서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 야당인 제도혁명당(PRI)이 압승(지사 선거가 실시된 12개 주 중 10개 주에서 당선)함으로써 10년 만에 제1당의 위치를 회복했다. 또한 2012년 7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도 제도혁명당(PRI)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가 당선되어 12월 1일에 6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16년 현재 집권 4년째를 맞은 니에토 정부는 대통령의 주도로 제2, 제3 야당인 국민행동당(PAN) 민주혁명당(PRD)과 ‘멕시코를 위한 협약’을 체결하고 정치, 교육, 통신, 에너지, 조세 등 각 분야의 개혁 법안을 마련해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교육대 학생 43명이 경찰과 결탁한 갱단에 의해 집단으로 피살된 치안 불안 사건과 대통령 부인 리베라가 고가의 주택을 관급공사를 수주한 업체로부터 제공받고 대통령의 오른팔 격인 루이스 비데가라이 재무장관도 같은 기업으로부터 주택을 취득한 정경유착 스캔들이 드러나자 정권에 대한 불신이 커졌고 페냐 니에토 대통령의 입지도 많이 위축된 상태이다.
 

정치 및 행정


정치현황
멕시코의 정치는 대의민주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삼권분립제와 연방제를 2대 원칙으로 하는 공화정치 체제이다. 정부형태는 1917년 헌법에 따라 대통령 중심제를 취하고 있으며 2016년 1월 현재 대통령은 제도혁명당(PRI)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이다.

행정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은 멕시코 군의 통수권자이고, 상원의 승인을 받아 내각의 각료와 여러 공무원을 임명할 수 있으며, 법을 집행하고 법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임기는 6년이고, 직접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연임을 금지한다. 부통령 및 수상제도는 없고, 대통령 유고시 의회에서 임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을 두고 있다.

입법부
입법부인 의회는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임기 6년의 상원 128석과 임기 3년의 하원 500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회 의원은 상하원 모두 연임이 금지되어 있다. 상원의원은 96석을 32개 주에서 각 3명씩 직선으로 선출하고 나머지 32석은 비례대표제로 선출하는데 3년마다 2분의 1씩 개선한다. 하원의원의 경우 300석은 직선으로 200석은 비례대표제로 선출한다. 의회는 연 2회(1차: 9월 1일 ~ 12월 15일, 2차: 2월 1일 ~ 4월 30일) 정기 회기를 열며 개원 시 대통령이 참석하여 국정 전반에 관한 교서를 발표한다. 휴회 중에는 37명(18명의 상원 의원, 19명의 하원 의원)으로 구성되는 상설위원회(Comisión Permanente)가 기능을 대행한다.

상원(Cámara de Senadores/Senado de la República)은 일반 입법 활동을 하며 외교정책을 검토한다. 또한 행정부 주요 인사(장관, 대사, 장성 등) 임명을 인준하며 대통령의 전쟁 선포를 사전 승인한다(하원의 동시 승인 필요). 이 외에도 대통령 해외 방문 승인 및 군대의 해외 파견을 승인하며 조약을 비준하고, 요청이 있을 경우 행정부 간의 분쟁 조정을 한다. 고위공직자 부정심판소 재판관을 선출하고 주정부에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임시 주지사 임명의 인준과 대법관 임명의 인준을 맡는다.

하원(Cámara de Diputados)은 일반 입법 활동을 하며 예산을 심의한다. 또한 상원에서 인준된 행정부 주요 인사를 인준하며 대통령의 전쟁 선포를 사전 승인한다.

멕시코 헌법은 상·하원 의원이 유고(사고, 휴직, 사망, 부재) 등으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총선 시 상원 의원 및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 및 하원 의원대행(suplente)을 동시에 선출하도록 하고 있다. 이 의원대행제도는 의원의 유고 시 보궐선거를 하지 않고도 신속히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의원들이 장관 등 타 직무를 맡으면서도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도 이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느 하원 의원이 장관직을 맡을 경우, 의원대행으로 하여금 의원직을 대신하게 하고 입각하였다가,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다시 의원대행에게서 의원직을 이어 받아 하원 의원으로 계속 재직할 수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제도혁명당(PRI), 국민행동당(PAN), 민주혁명당(PRD), 노동당(PT) 등이 있다.

지방행정
멕시코는 31개의 주와 1개의 특별구(연방관구)로 나뉘어 있다. 멕시코의 각 주에는 의회(Congreso Local)가 있으며, 인구 규모별로 21명∼75명의 의원(Diputado Local)들이 있다.

사법부
멕시코의 사법부는 대법원(Suprema Corte de Justicia)과 고등법원, 지방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은 11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며 대법관의 임기는 15년이고 연임은 불가하다. 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하며, 상원의 인준이 필요하다. 대법원장의 임기는 4년이며 연임은 불가능하다. 대법원장은 임기가 개시되는 해 1월 1일 대법관회의에서 선출된다.

고등법원은 11개 순회재판소로 구성되는데 6개는 일반, 민사, 형사사건을 담당하고, 5개는 인권 보호를 담당한다. 지방법원은 각 지방에 자리 잡고 있다. 멕시코는 헌법재판소를 따로 두고 있지 않고 미국식으로 대법원에서 헌법 사건을 담당한다. 대법원이 맡는 전체 사건 중 헌법 사건은 약 40%에 달한다.
 

경제


경제구조와 동향
멕시코 경제는 20세기에 세 가지 측면에서 주요한 변화를 겪었다. 우선 농업 경제에서 제조업 경제로 바뀌며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에서 차지하는 농업 비중이 1940년대 19%에서 1999년 5%로 축소되었으며, 폐쇄경제에서 개방경제로 바뀌면서 1980년대 초반에 수입 대체형 산업 전략을 포기하고 무역 장벽 완화 및 수출 증대를 추진하였다. 또한 국영 기업에서 사유 기업으로 바뀌며 1990년대에 공기업 대부분이 민영화되었다.
 

201602_142.jpg

멕시코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됨으로써 고도로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되면서 크게 성장하였지만 경제 기반이 수출 가공산업 위주인 탓에 글로벌 차원에서 경쟁력 있는 국민 기업을 육성하는 데 소홀히 하는 등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 시장이 인접해 있다는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대對미 제2위 수출국의 지위를 2003년 중국에 넘겼으며,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했으면서도 제조업의 기술 개발 등 혁신 능력이 취약하고 경제 전반이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대외 충격에 취약하여 1980년~1990년대에는 경제 위기가 반복되었다. 이러한 멕시코의 경제 위기는 1982년 라틴아메리카 외채 위기의 진원지, 1987년 ‘블랙먼데이’, 1994년 외환 위기(테킬라 파동), 2001년 미국 경기 침체에 따른 동반 침체 등으로 요약된다.

세계 은행에 따르면 멕시코의 경제 규모는 표면적으로 13위이고 구매력 기준으로 11위에 있다. 1994년 위기 이후로 행정 기관들은 국가의 거시경제 여건을 개선해 왔다. 멕시코는 2002년 남미 경제 위기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2001년의 짧은 불경기 이후로 저성장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또한 물가상승과 이자율을 낮추고 인구 소득을 증가시키는 등 전례가 없는 거시경제적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도시와 지역 인구간의 격차는 상당한 편이다.

향후의 전망
하지만 멕시코 경제는 꾸준한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전 세계에서 경제성장이 가장 빠른 국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거의 타격을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순항 중인 소수의 국가 중 하나이다. 제조업 기준으로는 중남미 최대로 브라질보다 규모가 크고 업종도 의류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항공기 제작 같은 첨단 분야까지 두루 망라되어 있다. 멕시코는 세계적인 금융 기관과 언론 등에서 멕시코의 잠재력을 주목하면서 세계경제의 차세대 강국으로서 빈번히 언급되고 있다. 그 예로 멕시코는 2010년 1월 칠레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 확정되기 전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한 경제개발협력기구 회원국이었으며, 미국의 경제 전문 사이트인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가 향후 10년간 주목할 나라로 지목한 마빈스MAVINS(Mexico, Australia, Vietnam, Indonesia, South Africa)의 일원이었다. 2006년에는 골드만삭스가 브릭스BRICs(Brazil, Russia, India, China) 이후 떠오를 나라로 꼽은 넥스트11(Next11)의 일원이었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2015년 멕시코의 경제성장률을 2.5%로 발표하였고, 2016년에는 중남미 국가 평균보다 높은 2.8%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은행측은 2016년 멕시코 경제가 재정지출 긴축으로 영향을 받더라도, 지속적인 대미달러 대비 페소화 환율의 상승으로 인한 수출 호조에 따라 긍정적 효과가 경제를 뒷받침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에너지 분야 등 외국인 투자유치가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멕시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조치의 이행으로 성장의 걸림돌을 제거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은행측은 멕시코의 경제성장을 2017년 3%, 2018년 3.2%로 각각 예상하면서 점진적 성장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와 문화


사회문화적 특성
멕시코 사회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중성과 극심한 빈부 격차의 공존, 혼합 문화 속 계층별 양분화 경향, 낙천적이고 보수적 성향의 국민성 등을 들 수 있다.

201602_144.jpg멕시코에서 죽음은 금기의 단어가 아닌 삶과 더불어 함께하는 존재의 또 다른 측면이며, 멕시코인들은 죽음을 희롱하면서 삶을 달관하고자 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11월 첫 번째날과 두 번째 날을 죽음의 날(Día de Muertos)로 정하고 죽은 친지나 친구를 기억하면서 명복을 비는 성대한 행사를 치르는데, 설탕이나 초콜릿, 아만토 등으로 해골모형을 만들고 이를 제단에 놓고 죽은 이의 명복을 빈다.

멕시코는 2010년 빌 게이츠를 제치고 세계 제1위 부호로 발표된 카를로스 슬림Carlos Slim과 하루 1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원주민이 공존하는 극심한 빈부 격차가 있는 곳이며, 혼합된 문화 속에서 계층별로 양분화되어 있는 사회적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정치나 언론 및 경제계에는 주로 백인들이 진출해 있고 상류층은 스스로를 북아메리카나 유럽 사람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멕시코시티에서 길거리 동냥을 하거나 신호대기 중인 자동차에 다가와 앞 유리창을 즉석에서 닦아주고 푼돈을 버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원주민이며, 사회적 신분이 출신 인종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멕시코 사람들은 친절하고 매우 열정적이며 낙천적이지만 성이나 가치관에 관해서는 보수적이며 배타적이기도 하다. 대가족 위주이며, 핵가족으로 살아도 사촌들과 교분이 두터워 주말에는 친척 생일파티나 돌잔치, 교회 의식 등 많은 모임이 있어서 청소년, 어른 할 것 없이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경향이 있다.

인종 및 종교
멕시코의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약 1억 1950만 명이다. 종족 구성은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계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 60%, 원주민인 인디오 30%, 백인 9%, 기타 1%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 지도층은 대체로 백인이다. 사탕수수 농장으로 인한 노예 무역의 결과로 베라크루스Veracruz 주, 오악사카Oaxaca 주에는 소수지만 흑인들이 분포한다. 밀림이라는 지형적 요인으로 스페인의 정복이 19세기에서야 이루어진 유카탄Yucatán반도 일대와 오악사카에는 상대적으로 원주민 인구 비율이 높은 편이다.

멕시코는 스페인 식민 경험의 영향으로 대부분 토착화한 로마가톨릭을 믿으며(83.9%), 기독교는 7.6% 정도이다. 이 외 원주민 고유의 토착 종교도 소수 남아 있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1911년 멕시코혁명 전까지 기득권층을 형성했으나 혁명정부의 사회개혁으로 기득권을 잃었으며 혁명정부는 로마가톨릭 교회 성직자의 투표 참여를 막아 교회가 정치 문제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3세계의 종교가 다 그렇긴 하지만 원주민 문화의 영향으로 멕시코의 가톨릭은 토착화된 측면이 많다. 최근 중남미 지역의 전반적인 동향에 따라 멕시코도 주류 가톨릭 교세는 정체되거나 줄어들고 개신교, 독립교회나 기타 그리스도교 종파 인구가 늘어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가톨릭교회가 절대적인 다수를 유지하고 있다.

언어와 교육
멕시코의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로 인구의 97%가 사용하고 있으며 원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토착어는 65개이다. 전 세계에서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의 3분의 1이 멕시코에 살고 있다. 멕시코에서 사용하는 스페인어는 스페인에서 쓰는 스페인 스페인어와는 다른 어휘와 어법을 사용하는 멕시코 스페인어라고 하는 별도의 방언을 사용한다. 원주민들은 아메리카대륙에서 쓰이는 케추아Quechua 어, 아이마라Aymara 어, 과라니Guaraní 어와 대표적인 토착어인 나우아틀Nahuatl 어(사용 인구 150만 명)를 사용한다. 멕시코 정부는 일부 원주민 지역사회에 2개 언어를 병용하는 초등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멕시코는 유치원 2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6년으로 구성된다. 사립학교를 제외하고는 중학교까지 무상교육이며, 이 가운데 초등교육 6년은 무상의무교육, 중학교 3년은 무상교육이다. 사립학교의 학비는 공립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으며 일반적으로 등록금 수준이 학교의 평판과 일치한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대학이자 라틴아메리카 최대 규모의 대학인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 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는 1551년에 설립된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대학으로 노벨상 수상자 3명 및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몇몇 학과에서는 세계 20위권 안의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멕시코가 2010년 현재까지 배출한 3명의 노벨상 수상자는 1982년 평화상을 수상한 알폰소 가르시아 로블레스Alfonso García Robles, 1995년 화학상을 수상한 마리오 호세 몰리나 엔리케스Mario José Molina Henríquez, 1990년 문학상을 수상한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등이다. 이 가운데 알폰소 가르시아와 옥타비오 파스는 외교관 출신이다.

문학과 미술
멕시코 문학은 스페인어 권의 영향력 있는 문학 국가들인 스페인, 아르헨티나, 쿠바와 더불어 왕성한 창작과 파급력 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이자 시대를 뛰어넘는 지식인의 표상으로 멕시코 문학에서는 17세기 바로크 시의 절정을 여실히 보여준 시인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Juana Inés de la Cruz 수녀와 1990년 멕시코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를 꼽을 수 있다.

멕시코에서는 20세기 초 멕시코혁명 이후에 국가의 주도로 멕시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프로젝트가 사회, 문화, 예술에 걸쳐 이루어졌다. 문맹률이 높았던 민중들에게 메스티소 혼혈 인종의 긍정과 멕시코 역사에 대한 자긍심, 정체성을 불어 넣기 위한 목표로 공공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벽화 운동’이 멕시코국립자치대학UNAM 총장과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바스콘셀로스José Vasconcelos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계몽운동은 예술 분야에 그치지 않고 사회, 문화, 정치적 분야에까지 파급력을 보였는데, 근대 멕시코의 3대 벽화 운동가로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1886∼1957),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é Clemente Orozco(1883∼1949),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1896∼1974) 등을 들 수 있다. 벽화 운동 이외의 현대 멕시코 화가로는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루피노 타마요Rufino Tamayo(1899∼1991) 등이 있다.

축제문화와 대중음악 마리아치
멕시코는 거의 매달 주요한 국경일과 축하 행사가 있으며, 각 마을마다 수호성인의 날이나 축제가 개최된다. 2월 하순 또는 3월 초순경의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근처에 열리는 카르나발carnaval(카니발)은 40일간의 사순절 전까지 커다란 축제가 된다. 멕시코의 대표적인 축제로는 과나후아토 세르반티노 축제, 과달라하라 국제도서전 축제, 디아 데 로스 무에르토스(죽은 자들의 날) 축제 등을 들 수 있다.

멕시코에는 ‘마리아치Mariachi’라 불리는 전통 대중음악 문화가 있는데, 멕시코 전통 선율을 연주하는 5~10명 사이의 민속악단 혹은 그들이 연주하는 민속음악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광장이나 고급 레스토랑 등지에서 멋진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은 뮤지션들이 낭만적인 연주와 노래를 들려주는 모습은 사진이나 영상 등을 통해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들이 바로 마리아치 악단이다. 마리아치는 국경을 넘어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멕시코의 전통 기악합주단이며 멕시코의 상징이자 멕시코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처음에 마리아치 음악은 결혼식이나 마을의 다양한 행사를 빛내는 향토색 짙은 음악으로 출발했으며, 낭만적인 멕시코 사람들은 마리아치 밴드를 동원해 한 밤중에 사랑하는 사람의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전하기도 한다. 마리아치의 레퍼토리는 매우 광범위해서 전통적인 노래 이외에도 여러 지방의 노래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연주된다. 기본적인 리듬은 물론 멕시코인의 생활과 감정들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 가사 또한 멕시코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총체이다. 아울러 마리아치 음악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고전 레퍼토리를 통합하였고, 시각적인 효과와 함께 음악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비우엘라Vihuela와 기타론Guitarrón 등 기타를 개량한 악기를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포함시키고 있다. 멕시코인들의 사랑과 슬픔 등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대중음악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볼레로’와 ‘란체라’이다. 볼레로Bolero는 멕시코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열정 및 인생의 희로애락이 낭만적으로 표현된 음악으로 멕시코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스페인어권 국가에서 사랑받고 있는 음악이며, 란체라Ranchera는 농민의 춤곡에서 비롯된 향수와 염세적인 감성이 지배하는 음악을 말한다.

스포츠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 복싱, 야구, 레슬링 등이다. 멕시코는 북중미에서 축구를 가장 즐기는 나라로서 그 수준은 북중미카리브 지역에서 미국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야구도 미국의 이웃 나라답게 인기가 많고 상당히 잘하는 편으로 동남부 유카탄Yucatán 지방과 서북부 바하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 반도 지방에서는 축구보다 야구가 매우 인기가 있다. 미국 영향을 많이 받아서 농구도 상당한 수준급이며 구스타보 아욘Gustavo Ayon을 비롯한 정상급 NBA 리거도 보유하고 있다. 멕시코는 루차 리브레Lucha Libre(자유로운 싸움이라는 뜻)라는 형태의 프로레슬링을 하는 루차도르들의 본고장이기도 한데, AAA와 CMLL의 양대 단체를 축으로 자체 흥행도 활발하며 수많은 훌륭한 레슬러들을 배출해 왔다.

전통의상
멕시코 전통의상으로는 ‘우이필’과 ‘레보소’가 있다. 우이필Huipil은 멕시코의 토착 원주민이나 멕시코의 농사일을 하는 여자들이 입는 민족 의상으로서, 소매 없는 블라우스 모양의 관두의貫頭衣 또는 중남미, 특히 과테말라의 토착 원주민 여성들이 이용하는 폰초식의 의복이다. 레보소Rebozo는 얼굴을 감싸는 일 및 숄이나 베일의 의미인 스페인어인데, 멕시코 등 중남미의 여성이 머리나 어깨를 덮거나 얼굴의 일부를 덮어서 사용할 수 있는 무지나 자수를 한 긴 스카프를 말한다.

201602_147.jpg멕시코를 상징하는 모자는 솜브레로Sombrero라 불린다. 솜브레로는 ‘넓은 챙이 있는 모자’를 말하는데, 본래 스페인의 코르도바Cordoba 지역에서 만들어져 ‘솜브레로 코르도베Sombrero Cordobés’라고 불리던 것이 멕시코로 건너가면서 현지 기후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화한 것이다. 멕시코 솜브레로는 머리, 얼굴뿐 아니라 목과 어깨까지 햇살로부터 보호할 만큼 챙이 넓은데, 한편으론 멕시코인의 여유와 낙천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게으름과 무력함을 상징하는 소재가 되고 있다.

음식문화
옥수수가 주식인 멕시코에서는 말린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 얇게 밀어 만든 토르티야tortilla에 다진 고기 등 각종 음식을 넣어 먹는 타코Taco를 대표 음식으로 친다. 멕시코식 케밥이라 할 수 있는데 동그랗게 부쳐낸 토르티야에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각종 육류 및 고추, 피망, 선인장 등 다양한 야채들을 각기 볶아낸 것을 쌈처럼 싸먹는 전형적인 멕시코 요리다. 손에 들고 다니면서 먹기 쉬워 한 끼를 간편하게 때우기에는 최고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타코는 대중적인 멕시코 요리이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가게를 찾을 수 있다. 아주 전형적인 멕시코 음식으로는 우리의 감자탕과 비슷한 포솔레Pozole가 있으며, 주요 음료는 오르차타Horchata가 있는데 식혜와 비슷한 음료이며 약간 계피향이 난다. 주류는 메스깔Mezcal 등이 있고, 그 종류 중에 잘 알려진 술로는 선인장의 일종인 아가베(용설란)의 줄기를 쪄서 발효시킨 테킬라Tequila가 있다.

언론과 한류 문화
멕시코의 주요 일간지로는 엘유니버설El Universal, 레포르마Reforma, 라호르나다La Jornada, 엘 솔 데 멕시코El Sol de México (OEM) 등이 있고, 주요 주간지로는 프로세소Proceso, 시엠프레Siempre, 임팍토Impacto, 에포카(Época) 등이 있다.

TV방송은 카날Canal 11, 카날 22 등 2개 공영 채널과 텔레비사Televisa, TV 아스테카Azteca가 운영하는 7개 민영 채널 이외에 외국 TV 방송, 유선 중계 방송망 등 전국 220여 개의 TV 방송국이 있다. 멕시코는 특히 브라질과 함께 한국의 드라마에 해당하는 텔레노벨라Telenovela가 강세를 띤다. 멕시코에서는 그동안 한국 드라마가 수차례 방영되었다. 수도권 지역 방송인 TV 멕시켄세(카날 34에서 방영)에서는 월드컵 직후인 2003년부터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기 시작하여, ‘별은 내 가슴에’를 시작으로 ‘이브의 모든 것’, ‘겨울연가’, ‘내 이름은 김삼순’, ‘대장금’ 등을 방영함으로써 멕시코 한류 열풍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멕시코의 한류 팬클럽들은 한국 문화 전반에 큰 관심을 표명하며, 한글은 물론 사물놀이, 부채춤 등 한국 전통 문화의 습득과 전파에 힘쓰고 있다. 멕시코시티에는 현지 한류 팬클럽 회원으로 구성된 사물놀이팀 ‘휘모리’가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 2개월마다 지방을 순회하며 한국-멕시콘 문화 교류전을 개최하고 있다. 한편 멕시코의 어린이 드라마 ‘천사들의 합창’(원제 Carrusel)이 1990년경 한국 KBS 2TV를 통하여 국내에 방영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관광산업
멕시코는 세계 10위의 관광국으로 관광이 국내 3대 산업 중 하나이다. 광활한 영토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동식물 생태계, 아스테카와 마야문명으로 대표되는 인류학 및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 식민지 시대에 300년간 건축된 식민지풍의 도시, 교회, 수도원 등의 문화유산이 풍부하다. 멕시코는 나라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마야, 올멕, 아스텍 문명 지역과 에스파냐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종교 건축물까지 자그마치 27곳의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2008년 멕시코를 찾은 관광객은 2300만 명이었으며(이 가운데 미국 관광객이 80%) 총 130억 달러의 관광 수익을 올렸다. 2009년 관광 부문의 외화 수입은 글로벌 경기 침체 및 4월에 발생한 신종인플루엔자 사태로 전년 대비 15.2% 감소하였다.
 

한국과 멕시코의 관계


기본 관계
멕시코는 1948년 12월 12일 한국을 정식 승인하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UN 정회원국 자격으로 UN의 대한對韓 지원 결정에 따라 물자 원조를 한 역사가 있다. 1962년 1월에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62년 7월 주멕시코 한국상주대사관이, 1978년 3월 주한 멕시코상주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85년 8월 2일에는 멕시코 대외무역청(IMCE) 서울사무소를 개설하였다. 멕시코는 보편주의 외교라는 기본 원칙 아래 북한을 포함한 세계 모든 나라와 관계를 수립하고 있으며, 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 원칙에 따라 한국 문제는 한국인 스스로가 해결하여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반도 문제는 원칙적으로 남북한 간의 대화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의 경제 발전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특히 아시아 제3의 경제 파트너로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멕시코는 경제, 교역, 기술 협력 등 제반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함으로써 ‘21세기 공동 번영을 위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1991년 9월 노태우 대통령이 멕시코를 최초로 공식 방문하였고, 멕시코에서는 1996년 11월 일 에르네스토 세디요Ernesto Zedillo Ponce de León 대통령이 공식 방한하였다. 이후 1997년 6월 김영삼 대통령 멕시코 공식 방문, 2001년 6월 비센테 폭스 케사다Vicente Fox Quesada 대통령 공식 방한, 2002년 10월 김대중 대통령 멕시코 방문(APEC 정상회의 참석),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 멕시코 공식 방문, 2005년 11월 비센테 폭스 케사다 대통령 방한(APEC 회의 참석), 2008년 7월 이명박 대통령과 펠리페 칼데론Felipe Calderón 대통령의 정상회담(일본 G-8 회의 계기), 2010년 7월 이명박 대통령 멕시코 국빈 방문, 2012년 6월 이명박 대통령 멕시코 방문(G20 정상회의 참석), 2013년 10월 박근혜 대통령과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 대통령의 정상회담(인도네시아 APEC 정상회의 참석 계기)에 이어 2015년 11월에도 박근혜 대통령과 엔리케 페냐 니에토Enrique Peña Nieto 대통령의 정상회담(필리핀 APEC 정상회의 참석 계기)이 이루어졌다.

멕시코와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유사한 경제 규모를 가진 중견 국가로서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G20, 동아시아·라틴아메리카 협력포럼(FEALAC, Forum for East Asia-Latin America Cooperation) 등 국제 무대에서 인권 안보 개발 환경 노동 금융위기 등 다양한 글로벌 이슈에 대해 유사한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대對멕시코 정책
한국은 멕시코를 한국 기업의 대미對美 수출 및 라틴아메리카 진출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대對멕시코 투자는 1988년 삼성전자의 티푸아나Tijuana 생산법인 투자가 효시이며,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와 함께 미국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국내 기업의 대미對美 수출과 라틴아메리카로 진출하는 활동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 멕시코는 2009년 한국의 대對라틴아메리카 수출액 267억 6000달러 가운데 26.6%인 71억 3000달러를 차지하여 라틴아메리카 무역 대상국 중 제1위 수출 대상국이었으며, 대對라틴아메리카 무역 흑자액 151억 1000달러 가운데 40.8%인 61억 6000달러를 차지하여 제1위 흑자 창출국을 차지하였다.

한국은 멕시코와 한국 양 국민 간의 문화 교류 증진 등 상호 이해 및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라틴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한인 이주 및 정착국으로서 역사적 문화적 유대를 활용하고 있다.
 

201602_150.jpg

교역 및 동포 현황
한국의 대對멕시코 수출은 97억 달러, 수입은 23억 달러(각 2013년)에 달하여 멕시코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12위의 수출국이자 제32위의 수입국이다. 우리의 대對멕시코 주요 수출품은 평판디스플레이, 칼라TV, 무선전화기,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동, 아연광, 무선통신기기 부품 등이다.

멕시코에 거주하는 한국 재외동포는 약 11,300여 명 수준으로 집계되고 있다(2014년 8월 기준). 지역별로는 멕시코시티, 과달라하라, 과나후아또, 바하칼리포르니아 등지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교민이 6,000여 명으로 가장 많고, 상기 주요 도시 이외의 기타 지역에 거주하는 약 2,900여 명은 1905년 멕시코 이주 한인 1,033명의 후손으로서 멕시코 국적을 소지하고 있다. 거주 교민 중 일부는 에콰도르, 과테말라, 아르헨티나 및 파라과이 등 중남미 초기 이민자들로서 멕시코에 재이주하여 거주하고 있다. 많은 수의 교민들은 한국에서 의류 및 악세사리 등을 수입, 판매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멕시코 시내 센트로Centro 시장에 밀집하여 도소매업에 종사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업종이 다양해져 소나로사Zona Rosa 일대에는 식당, 미장원, 수퍼마켓 및 학원을 운영하는 교민이 늘어나고 있다. 교민들의 주요 영업 지역은 치안이 다소 불안한 구역이어서 강도 등 강력범죄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데, 2015년에는 총기 강도사건으로 한국인 교민 여성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북한과의 관계
멕시코 정부는 다원주의 외교정책에 입각해 북한과 1980년 9월 수교한 뒤 1992년 3월 상주공관 설치를 허용하였다. 멕시코 정부는 1998년 1월 북한 공관원 2명의 코카인 35㎏ 밀반출 사건을 계기로 대사를 추방하고 공관원 숫자를 축소하였다. 또한 북한 외교관 체류 비자 기간 및 북한인 출입 제한 등 대對북 제재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 마약 밀반출 사건으로 북한 공관은 대사대리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한동안 양국 관계는 멀어졌다. 이후 북한은 2001년 8월 멕시코와 외교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였으며, 2002년 3월 북한 대사의 신임장 제정 후 양국 관계가 다소 정상화되었다. 2009년 5월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멕시코 정부는 북한 정부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북한의 핵 계획 포기와 6자 회담 복귀를 촉구하였다. 2010년 현재 멕시코는 주한駐韓 대사가 북한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201602_151.jpg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멕시코 남동부 최남단 과테말라 국경 지대에 있는 치아파스Chiapas 주는 멕시코 정부가 아닌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이라는 무장 세력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사실상의 해방구 지역이다. 1994년에 발효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미국, 캐나다와의 무역을 확대하고 멕시코의 제조산업을 강화하는 이점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빈부격차를 일시적으로 확대하고 전통적인 공동체에 사는 인디오의 공유지를 해체하며 미국산 옥수수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농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부작용도 발생시켰다. 이에 NAFTA가 발효되는 1994년 1월 1일에 마르코스 부사령관 등이 이끄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멕시코 최빈곤 지역인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하여 원주민의 권리 확대를 요구하며 12일간 정부군과 교전을 벌였고 수십 명의 사망자를 냈다. 1996년 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나 사파티스타의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고, 정부 측의 반응이 없자 사파티스타는 자체적인 사법, 보건,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다.

201602_139.jpg‘사파티스타’란 명칭은 멕시코 혁명 당시 남부 해방군(Ejército Libertador del Sur)의 사령관이었으며 국민적 영웅 중 하나로 칭송되고 있는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라는 이름에서 나왔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자신들이 그 이념적 계승자라고 보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투쟁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받던 원주민들의 생존권 수호 운동이지만, 더 크게는 가중되는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를 선포하며 세계적 저항을 호소하는 차원의 것이기도 하다.

사파티스타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측면에서 분석한 견해들이 회자되고 있다. 먼저 기존과는 다른 운동 자체의 성격 측면인데, EZLN은 여타의 정치운동들과 달리 국가권력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국제주의, 위계에 대한 반대, 소수자의 권리 등을 지향하는 탄력적인 운동이라는 점이며 이는 ‘새로운 권력개념’ 또는 ‘포스트모던한 반란’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두 번째는 운동 공간의 특성 측면으로, EZLN은 지구적 통신망을 새로운 운동 공간으로 잘 활용하는 능력과 가능성으로 그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코스는 “정부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보통신기술을 다루는 한 사람의 전문가”라고 이야기하며, “만약 칼 마르크스나 체 게바라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궁금하다”라는 한 리포터의 말도 인용하고 있다. 그밖에 EZLN 운동을 자율주의적 관점에서 ‘계급의 자기가치화’로서 해석하고 있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추가적인 담론의 소재가 되고 있다.

EZLN 지역의 거의 모든 마을에는 에밀리아노 사파타, 체 게바라, 부사령관 마르코스가 함께 있는 벽화를 볼 수 있다. EZLN은 치아파스 주를 해방구로 선포하고 반세계화 운동의 최대적 존재로서 내외의 지원을 받아 현재도 정부군과 대치가 계속되고 있다.
 

멕시코의 마약전쟁(Mexican Drug War)

멕시코의 사회 문제 중 심각한 사안은 마약 전쟁 사태이다. ‘마약 전쟁’은 멕시코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라이벌 마약 카르텔들과 그들을 제압하려는 멕시코 정부군과 시민 자경단 간에 현재 진행 중인 무장 충돌을 말한다. 2006년 집권한 국민행동당의 펠리페 칼데론Felipe Calderón 대통령은 마약과 관련된 모든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을 최선의 과제로 삼고 군부를 동원해 강력한 마약 카르텔들을 와해시키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멕시코 마약 조직들은 현재 불법 마약 도매 시장을 지배하고 있으며 2007년에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코카인의 90%를 공급하였다. 거대 조직인 티후아나와 걸프 카르텔의 중심 인물들이 검거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더 심각한 폭력 사태들을 초래하였고 미국으로의 밀매 경로를 차지하고자 하는 카르텔들의 경쟁이 더욱 심해졌다. 마약 전쟁이 시작된 후로 마약 카르텔의 폭력으로 인해 4만 명 이상이 피살되는 참상이 벌어졌다. 칼데론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에서 군대에 심하게 의존하였는데, 단속에 참여하는 장교들의 많은 수가 부패 혐의가 있는 상태에서 대단한 성과를 내기는 힘들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제도혁명당(PRI)의 최장기 집권과 정권교체

멕시코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계속적인 집권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1929년에 국내의 다양한 혁명 세력을 하나로 묶어 국가혁명당(PNR)을 창당하였으며, 이 정당은 1938년 멕시코혁명당(PRM)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1948년 현재의 제도혁명당(PRI: 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으로 개칭된 후 2000년까지 71년 동안 집권하여 세계 최장기 집권 정당을 기록하였다. PRI는 국내에서는 일당 독재를 추진하고 미국과 서방의 자본에 의해 경제를 확대하였지만, 다른 한편 외교적인 면에서는 쿠바 등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권과의 관계도 밀접하게 가져갔으며, 정책이 모순된 체제면서도 냉전이 종결된 20세기 말까지 여당으로서 정치를 지배하였다. 멕시코는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석유와 실버의 생산과 수출로 큰 부를 획득했지만, 동시에 진행된 근대산업화 과정에서 막대한 대외 부채를 안게 되었다. 20세기 중반 산업화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만성적인 물가 상승과 일부 부유층에 집중된 부의 불균형, 그리고 자원 가격 폭락에 따른 경제 위기 등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민을 괴롭히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정책적 실패와 정치적 부담 등으로 인해 제도혁명당은 2000년 총선과 대선에서 국민행동당에 패배하면서 71년간의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The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은 1990년 3월 멕시코 살리나스 대통령의 제의로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 정부 사이에 1992년 조인된 자유 무역 조약이며 1994년 1월부터 캐나다-미국 자유 무역 협정이 확대 개편되면서 발효되었다.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동일한 노동법과 환경보전법 적용, 역내의 관세 및 수입제한을 낮추고 15년 이내에 원칙적으로 철폐할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미국의 자본, 캐나다의 자원, 멕시코의 노동력이 결합된 단일시장 구축이 NAFTA의 의미라 할 수 있다. 2013년 기준으로, 북미 자유 무역 협정은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 블록이며, 인구 4억 7천만 명에 이르는 단일시장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은 북미환경협력협정(NAAEC)과 북미노동협력협정(NAALC)이라는 2가지 보충협정을 가지고 있다.
 

201602_152.jpg

멕시코시티의 역사 지구와 소칼로 광장

멕시코시티는 끊임없는 볼거리로 관광객들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수도이다. 멕시코시티는 16개의 자치구와 300개 이상의 지역을 포함하는 거대한 규모를 갖고 있다. 멕시코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멕시코시티의 명소는 소칼로Zocalo 광장, 국립궁전Palacio Nacional, 메트로폴리탄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멕시코 예술궁전Palacioo de Bellas Artes(국립예술극장) 그리고 알라메다 공원Alameda Central 등이 있는 역사 지구에 집중되어 있다.

멕시코 예술궁전에서 북쪽으로 몇 블록 이동하면 멕시코시티에서 마리아치 음악을 듣기 가장 좋은 가리발디 광장Plaza Garibaldi이 있다. 역사지구 서쪽에 위치한 레푸블리카Republica 광장은 새롭게 개장된 혁명 기념물이자 국립박물관이다.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큰 차풀테펙Chapultepec 공원은 차풀테펙Chapultepec 성, 현대미술박물관Museo de Arte Moderno, 국립인류학박물관Museo Nacional de Antropologia으로 나뉘어져 있고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다. 소나 로사Zona Rosa, 로마Roma, 꼰데사Condesa, 꼬요아깐Coyoacan, 산 앙헬San Angel 등의 명소를 가볼 수 있다. 공원, 광장, 상점, 시장, 카페들과 유명한 관광지가 모여 있는 이 지역들은 특히 외래 방문객들과 외국인 거주민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근처 플랑코Polanco 지역에는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과 근사한 레스토랑이 있다.

보다 남쪽에 위치한 멕시코국립자치대(UNAM) 캠퍼스는 근대 건축물과 멕시코의 유명 화가들이 그린 벽화들로 유명하다. 대학의 문화센터에서는 다양한 이벤트와 공연이 열린다. 고대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로 불렸던 멕시코시티는 고대 텍스코코 호수 너머 멕시코 계곡에 건설되었다. 아즈텍인들은 도시로 항해하기 위해 복잡한 운하를 건설했다. 1519년 스페인의 정복 이후 아즈텍의 건축물과 운하들은 파괴되고 근대적인 건물과 도로로 대체되었다. 남쪽 소치밀코Xochimilco 자치구와 북쪽의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 유적지에서 당시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엿볼 수 있다. 도시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는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 피라미드 유적이 있다.

소칼로Zocalo 광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Comments

Hot

천부경 가요

운영자 0    283
Hot

민족의 하늘 뮤직비디오

운영자 0    270
Hot

임진강 뮤직비디오

운영자 0    241
Hot

어아가 뮤직비디오

운영자 0    302
Hot

염표문 뮤직비디오

운영자 0    266
Hot

하나되는 꿈 뮤직비디오

운영자 0    304
Hot

가족을 위한 노래

운영자 0    292
Hot

10월의 어느 멋진날에

운영자 0    335
Hot

샌 안드레아스

운영자 0    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