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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국의 후예, 초원의 나라 몽골 (영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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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제국의 후예, 초원의 나라 몽골

몽골은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의 후예로 중앙아시아 북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몽골고원 지역에서 흉노와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등 북방 유목민족들이 명멸해 간 후, 13세기 초엽 흩어진 부족들을 통합하고 강력한 정복전을 벌여 진정한 세계제국을 형성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등장해 동서문화 교류의 큰 물길을 놓았고, 이후 대원大元 제국을 거쳐 명明과 청淸에 복속되는 시련을 겪은 뒤 1921년 중국으로부터 독립해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다가, 1992년 민주공화국으로 정체를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유의 유목문화와 개방적 국민의식, 그리고 고유의 예술성 보존을 문화자산으로 삼고 지정학적 균형 외교를 펼치고 있는 몽골의 현재와 미래를 만나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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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몽골의 정식 명칭은 몽골리아Mongolia다. 중앙아시아 고원지대 북방 지역에 있는 국가로 북위 41도 35분~52도 09분, 동경 87도 44분~119도 56분에 걸쳐 위치해 있으며,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이다. 몽골Mongol이란 용어는 원래 ‘용감함’이란 뜻을 지닌 부족명이었다. 그런데 몽골 부족이 칭기즈칸Chingiz Khan에 의해 통일된 이후 계속 발전해 나가자 부족명 자체가 민족명이 되었다. 몽골을 ‘몽고蒙古’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이름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북방 민족으로부터 전쟁에 시달려 온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하기 위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흔히 통칭해 부르는 몽골은 대개 외몽골外夢古(현재의 몽골국)을 말하는 것이며, 내몽골內蒙古이라고 부르는 내몽골 자치주는 중국 국경 안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분단 국가다. 그러나 분단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민족적 친근감이나 통일에의 의지는 거의 없는 편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Ulaanbaatar는 ‘붉은 영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해발고도는 1,350m에 이른다.

몽골의 영토는 한반도의 약 7.4배에 해당하는 1,564,116㎢에 달하며, 서쪽 알타이 산에서 동쪽까지는 2,394㎞, 남북의 거리는 1,259㎞의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몽골은 북쪽으로는 러시아, 동서 및 남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러시아와는 3,485㎞, 중국과는 4,677㎞의 접경을 이루고 있고, 국경선의 총길이는 8,162㎞이며 평균 해발 고도는 1,600m이다.

몽골은 국토 전체가 고원국가(평균고도 1,580m)로서 전 국토의 40%가 사막지대이고 10%가 산림지대이다. 전체적으로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으로서 가장 높은 곳은 서부 알타이 산맥의 위쪽 끝에 있는 멍힝하이르한산의 주봉 후이틍 어르길Khuiten orgil로 해발 4,374m, 가장 낮은 곳은 동부 도르너드Dornod 지역의 허흐 호수Huh nuur의 저지대로 522m이다. 몽골의 주요 산맥으로는 알타이Altay, 항가이Qangghai, 헨티Khentii 산맥이 있고 알타이 산맥에는 만년설로 덮여 있는 산이 20개 이상 존재한다.

몽골 전역에는 6,0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강과 내가 있고 3,000개 이상의 호수가 산재해 있다. 주요 5대 강은 셀링게Selenge, 오논Onon, 오르혼Orkhon, 헤르렝Kherlen, 톨Tuul 강이며, 거의 모든 강줄기가 남에서 북으로 흘러들어 북쪽의 바이칼Baikal 호수로 모여든다. 3대 호수로는 아시아에서 가장 깊고 몽골인들이 ‘바다’라 부르는 헙스걸Huvsgul 호수를 비롯해 옵스Uvs, 햐르가스Hyargas 호수가 있고 이들 호수는 모두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몽골의 기후는 건조한 냉대성 기후이고, 평균기온은 -2.9℃이다. 명확한 계절 구분과 적은 강수량(연간 350mm), 길고 추운 겨울(10월~4월)과 짧고 더운 여름 등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 특성을 갖고 있으며, 1년에 구름 없는 날이 257일에 달한다. 또한 심한 온도 변화를 보이기도 하는데, 수도 울란바타르의 월간 평균기온은 1월에 -24.3℃(기록된 최저온도 -48℃), 7월에는 16.6℃(기록된 최고온도 39℃)로 전 세계 수도 중 가장 추운 지역이다. 5~6월의 봄은 아름다운 초원을 보여주나, 날씨의 변화가 심하고 때로는 심한 돌풍을 수반하기도 한다.
 

몽골의 역사
북방 유목민족 시대(BCE 20C ~ CE 12C)


몽골에서는 약 6천 년 전부터 옛 부족 민족들이 갈라짐으로써 현대의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알타이족에서 몽골의 조상으로 보는 여러 유목 민족들이 중앙아시에서 유목을 하며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몽골 역사에 있어 북방 유목민족 시대는 BCE(기원전) 20세기부터 CE(기원후) 12세기까지로 보는데, 이 시대는 기마유목민 시대와 몽골고원에 건설되었던 유목제국 시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기마유목민
기마유목민은 기원전 2천 년~1천 년 사이에 몽골초원과 카스피해 사이의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중에 흉노인에 대해 기술한 내용이 있고,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에도 기마유목민인 ‘스키타이Scythai’인을 묘사하는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일정한 거주지가 없이 집을 가지고 다니고 남자들은 힘이 세며 말을 타고 활을 쏠 줄 알았고, 농사가 아니라 가축을 키우며 산다는 등의 내용이 등장한다. 이들은 기마騎馬 군사력을 이용, 부족국가 또는 소小국가를 형성하였으며, BCE 8세기부터 약 500년간은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에서 스키타이 문화가 융성하기도 하였다.

몽골고원에 건설되었던 유목제국
현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주요 북방 유목민족의 계통은 크게 몽골 계통인 선비鮮卑 유연柔然 거란契丹 몽골蒙古과 튀르크 계통인 흉노匈奴 돌궐突厥 위구르維吾爾(韋紇;回紇), 그리고 퉁구스 계통인 여진女眞(肅愼;靺鞨) 만주滿洲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유목민족으로서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한 것은 흉노匈奴족(훈Hun족)이었다. BCE 209년 건국한 흉노는 지도자인 묵돌선우冒頓單于가 등장해 흉노 제국을 본격 건설하게 되는데, 통상 이 시기부터를 몽골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흉노 제국은 꾸준히 세력을 넓혀 나가 동으로는 한반도, 서로는 터키, 남으로는 만리장성, 북으로는 바이칼호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흉노의 시조에 대한 기록은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고조선 3세 가륵단군 재위 6년에 “임금께서 열양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둬 놓았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흉노족들은 경마와 씨름을 즐기고 천지일월과 조상을 숭배하는 동방 제천문화를 생활화한 민족이었다. 흉노는 그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불렀고 휘하에 좌현왕, 우현왕 등을 두어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며, 만기-천장-백장-십장으로 나누어진 ‘십진법十進法’ 단위의 군사조직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흉노족은 BCE 1세기 중반에 내분이 일어나 동흉노와 서흉노로 분열되었다가 한 세기 뒤에 오환의 공격 등으로 다시 남·북 흉노로 분열된 후 후한에 투항하였다. 이후 몽골고원은 흉노의 뒤를 이어 2세기부터 선비鮮卑족이 지배자로 등장했고, 선비국은 4세기 말경 화북 지역에 진출하여 북위北魏를 건국하였다.

유연柔然은 4세기 초 선비족의 한 부족인 탁발부拓跋部에 복속되어 가축이나 담비 가죽을 공물로 바쳤다. 402년 유연이 점차 발전하여 북위와 대립하게 되자 북위는 유연을 토벌하였고, 유연의 족장 사륜社崙은 몽골 고원 북부로 도망갔다. 사륜이 죽은 뒤에도 유연은 약 140년 동안 지속되다 북위 및 돌궐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555년 와해되었다.

보통 ‘투르크Turk’로 불리는 돌궐突厥은 본래 유연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토문土門 카간Kagan(大汗: 몽골이나 투르크 계통 국가의 황제)이 553년 돌궐제국을 건국하였다. 제3대 무한Mukhan 카간은 북중국 북주와 북제의 분열을 이용하여 돌궐제국의 토대를 만든 인물로, 이른바 ‘동돌궐 카간국(돌궐 제1제국)’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중가르Jungar, 이리伊犁 강, 추Chu 강, 탈라스Talas 강 등지를 물려받은 토문 카간의 동생 이스테미Istemi는 ‘야브구Yabgu’라는 칭호를 얻어 ‘서돌궐 카간국’을 건립하였다. 동돌궐 카간국과 서돌궐 카간국을 합친 돌궐제국은 만주에서 카스피해Caspian海 북쪽 연안의 광대한 튀르크계 유목제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581년경 동·서 돌궐 카간제국으로 분열되어, 동돌궐은 630년에, 서돌궐은 657년에 각각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하지만 이후 반 세기 만에 쿠틀룩Qutlugh 카간이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음산陰山 산맥을 중심으로 막남漠南 지역에 거점을 둔 돌궐 제2제국(682년~745년)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돌궐의 역사가 기록된 고대 튀르크 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돌궐인들은 북방 유목민족 중 최초로 독창적인 문자를 사용하였다. 돌궐 제2제국은 통치 부족 내부의 지속적인 분쟁으로 인해 몰락하였다.

돌궐 제1제국이 붕괴된 후, 당나라가 대돌궐 지배를 통해 몽골고원으로 진입하자 같은 투르크 계통인 위구르Uyghur(維吾爾; 韋紇; 回紇)가 새롭게 세력화되었다. 위구르는 745년 쿠틀룩 빌게 카간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840년까지 만주와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유하였다. 위구르는 당나라 ‘안사의 난(755년~763년)’을 제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카간의 직계 계승을 통해 정치적 안정성을 도모하였으며, 오르혼 강 지역에 시장경제가 발전되었던 카라발가순Kara Balgasun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위구르 문자를 창제하였다. 카라발가순은 위구르 제국의 수도였던 오르두 발릭Ordu Baliq이 폐허가 된 뒤 붙은 이름으로, ‘폐도廢都’를 의미한다. 카라발가순은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오르콘 계곡 문화경관(Orkhon Valley Cultural Landscape)’의 일부이다. 위구르는 840년 북쪽의 키르기스Kirgiz에 의해 멸망하였다. 우수한 문명을 지닌 초원 유목제국으로 발전한 위구르는 이후 건립된 유목제국들에 ‘초원 유목 사회가 농경 정착 사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답안’과 ‘문명 부흥의 본보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몽골 제국 시대(1206년 ~ 1271년)


칭기즈칸이 이룬 대제국
9세기 중반 위구르가 붕괴된 후 몽골 지역은 12세기에 거란契丹족의 요遼나라(916~1125)와 여진女眞족의 금金나라(1115~1234)에게 예속되는 시기를 거쳤는데, 당시 몽골 초원은 여러 큰 부족 국가들 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때 몽골 지역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여 거대한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몽골뿐 아니라 전 세계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강력한 지배자로 등장한 것이 몽골 부족의 수장 칭기즈칸Chingiz Khan이다.

몽골족은 본래 헤이룽 강(흑룡강黑龍江) 상류의 남쪽, 흥안령 북부 지역에 거주하며 수렵과 원시적 농업을 병행하다가 위구르의 몰락 이후 대규모의 민족 이동을 시작하여, 12세기 중·후반에 몽골 오논Onon 강 상류 보르항 할동 산 인근에 정착하였다. 이들 몽골족의 여러 부족들 가운데 하막 몽골(Хамаг Монгол) 부족이 강력해져서 다른 부족들을 주도하기 시작했는데, 하막 몽골 부족의 수장이었던 예수게이가 1171년 타타르족으로부터 독살을 당한 후 그의 아들인 테무진鐵木眞이 여러 부족을 통일시키고 1189년 하막 몽골의 칸Khan(汗: 몽골이나 투르크 부족의 왕을 가리키는 칭호)이 되었고 모든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1206년에 몽골 집단 전체의 카간Kagan(大汗)으로 추대되어 ‘우주의 지배자’라는 의미를 지닌 칭기즈칸Chingiz Khan(成吉思汗)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칭기즈칸은 곧 눈길을 초원 밖으로 돌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복해 나갔고, 칭기즈칸이 1227년에 사망한 뒤 그 후계자들은 정복의 범위를 더욱 넓혔다. 2대 카간 오고타이Ogotai(窩闊台, 1229~1241 재위), 3대 카간 귀위크Güyük(貴由, 1246~1248 재위), 4대 카간 몽케Möngke(蒙哥, 1251~1259 재위), 5대 카간 쿠빌라이Khubilai(忽必烈, 1260~1294 재위)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여 중국 북부의 금金나라를 정복하고, 금 멸망 후에는 네 방향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 유럽 원정(1236~1242) 후 중동을 공격하여 카프카즈 지역과 셀주크 투르크를 속국으로 삼고(1243) 바그다드를 점령하였다(1258). 고려 역시 일곱 차례에 걸친 몽골의 공격(1231~1270)을 받아 오랜 기간 항쟁하다가 결국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왕성한 정복사업의 결과 몽골 제국은 칭기즈칸의 자손들이 통치하는 여러 개의 분봉 왕국을 거느리게 되었다.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 ‘오고타이 한국汗國’이다. 칭기즈칸이 중앙아시아 원정을 떠나기 전 중앙아시아 일대의 땅을 여러 아들에게 분봉하였는데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에게 천산북로 북쪽 땅을 주었다. 이것이 오고타이한국이 되었다. 칭기즈칸의 차남 차가타이는 사마르칸드 일대의 땅을 분봉받아 ‘차가타이 한국’을 세웠다. 장남 주치에게는 이르티시강 서쪽의 영지를 주었는데, 유럽 원정 이후 남러시아 땅을 추가하여 ‘킵차크 한국’이 되었다. 그 후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가 1258년 바그다드의 칼리프 제국(압바스 왕조)을 멸망시킨 후 이란과 이라크 일대에 ‘일 한국’을 세웠다.

대원大元제국 시대(1271~1368)
5대 카간 쿠빌라이 때, 몽골의 정복사업은 절정에 달하였다. 쿠빌라이는 카간이 되기 전에 이미 티베트와 베트남까지 공격하였다. 1259년에 형 몽케 카간이 병사한 후, 막내아우와 겨룬 끝에 도읍을 연경燕京(지금의 북경)으로 옮기고 1271년 원元나라를 개국하였다. 1279년에 원나라는 남송을 마침내 멸망시키고 중국 땅 전체를 다스리는 대통일 제국이 되었다. 그 후 일본과 자바를 공격하여 실패하였으나, 동남아시아 일대는 점령하였다. 쿠빌라이는 중앙아시아 출신 등 다양한 인종을 실력 위주로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에서 기원한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죽자 대칸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실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라마승의 횡포로 국가 재정이 파탄되었다. 또한 가뭄, 홍수, 지진 등 잇따른 자연 재해가 발생하였다. 1333년 원나라의 마지막 11대 황제 토곤 테무르Togun-Temur(순제)가 즉위하였으나, 1368년 주원장朱元璋(홍무제)이 이끄는 명明나라 군대에 의해 몽골고원으로 패퇴하면서 대원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1483년에는 몽골의 러시아 지배가 종료되었다.

201606_138.jpg몽골제국의 역사적 의의
몽골제국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제국’과 ‘세계사’를 실현하였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육상·해상 교통로를 발달시키고 인터넷보다 700년 앞서 국제통신망을 건설함으로써 동서 간 경제 문화 교류를 촉진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동방에 전파하였다. 또한 지리학 천문학 역학 수학 지도제작법 등을 전래하였으며, 신항로의 발견을 촉진하였다.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탄생인 셈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지 1995년 송년 특집호는 지난 1천 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하였다.
 

북원과 만주 지배·청 복속 시대 (1368~1911)


북원北元과 몽골고원의 정세
1368년 명나라에게 밀려 몽골 고원의 초원지대로 돌아간 원나라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 정권은 북쪽으로 근거지를 옮겨 망명국으로 ‘북원北元’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북원은 연이은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계속 쇠퇴를 거듭하였고 군주의 명맥도 방계 혈통으로 승계되면서 황제라는 칭호를 폐지하여 칸으로 고쳤고, 국호도 타타르韃靼라 불리기도 하였다. 북원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명맥을 이어가다가 1635년 청나라에 완전히 정복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 시기에 몽골고원은 정치적 분열과 내분으로 ‘6만 호 몽골(동몽골)’과 ‘4만 호 오이라트Oirat(서몽골)’로 나누어졌다가, 다시 ‘6만 호 몽골’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3개의 독립국을 형성하였다. 오이라트는 15세기 말, 캅카스Kavkaz 산맥 북쪽에 정착하여 현재 러시아연방공화국 내 칼미크Kalmyk 공화국을 형성하였다. 오이라트Oirat는 몽골고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한때 에센Esen(也先) 타이시太師가 대칸에 등극하기도 하였지만 그가 1455년에 사망한 후 급속히 와해되었다. 또한 할하Khalkha(동몽골: Халх 1388~1635)는 명나라 중엽 때 일어난 외몽골의 부명部名인데, 내內할하와 외外할하로 나뉘었으나 청淸대에 다 같이 복속되었다.

청 지배기
17세기 몽골은 몽골고원의 알타이Altai 산을 경계로 서부의 오이라트, 동부의 할흐몽골, 고비 남쪽의 내몽골로 분리되었다. 동몽골 차하르Chakhar 부족의 링단칸Lingdan Khan은 통치력을 강화하고 전 몽골인의 통합 통치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를 견제하고자 공격해 온 후금의 홍타이지와 전쟁을 벌이던 중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다. 이에 내몽골의 16개 아이막Aimag, 49개 호쇼의 왕공들은 1636년 홍타이지를 몽골의 대칸으로 인정하고, 내몽골은 만주(후금)에 복속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이라트 부족 출신들의 연합체인 중가르Jungar(1635~1758)가 등장하여 청에 굴복한 몽골 할흐부와 청나라를 공격했다. 이후 80여 년간 계속된 중가르와 청의 전쟁은 결국 청나라 건륭제의 친정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1689년 청과 러시아는 네르친스크Nerchinsk 조약으로 양국 간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부리야트 몽골을 비롯한 북부지대는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1691년에는 할흐몽골, 내몽골 왕공들의 회맹을 통해 몽골은 청에 복속되었고, 1717년에는 청이 몽골 전역을 장악하였다. 몽골과 중국 명나라를 차례로 정복한 청나라의 강희제(재위 1661년 ~ 1722년)는 몽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리시켰다. 만주족의 발흥 과정에서 내몽골은 부족들이 일찍 후금과 연합을 이룬 지역, 외몽골은 후에 복속된 지역이다.

1727년 청과 러시아는 캬흐타Kyakhta 근처의 보오린Bohlin 골에서 ‘보오린 조약’을 체결해 현재 몽골과 러시아 간의 국경선을 확정하고, 캬흐타에서 ‘캬흐타 무역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은 한족과 만주족을 몽골 지역에 이주시키는 등 동화同化정책을 추진하였다.
 

몽골 독립과 인민공화국 시대 (1900년대 이후)


1755년 이후 몽골은 반청·반봉건·반식민지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이 붕괴되자 외몽골인 현 몽골 지역에 거주하던 몽골인들은 기회를 잡고 그 해 12월에 혁명(제1차 혁명)을 일으켜 자치를 인정받았다. 당시 몽골의 왕공(지도자)들은 몽골 불교의 수장인 접준담바 호탁트Jebtsundamba Khutuktu를 혁명의 정신적 지주로 세우고 외몽골의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이렇게 탄생된 것이 복드 칸국Bogd Khaanate이며 정식 국호는 대몽골국이다. 외몽골이 청나라로부터 지배를 받기 시작한지 약 200년 만에 선언한 독립이었다. 1912년 11월 외몽골의 고륜Kùlún(庫倫) 정부와 러시아 간의 협약을 통해 내몽골은 포함하지 않는 독립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몽골인들은 내몽골과 외몽골의 통합 독립을 희망하였으나 러시아와 일본의 사전 협약에 따라 실패하였다.

201606_139.jpg1912년부터 몽골은 러시아의 보호하에 자치주로 존립하였으나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중국 국민당이 1920년에 외몽골의 자치를 철폐시켰다. 하지만 그 해에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담디니 수흐바토르Damdinï Suhbator는 반중국 민족해방을 목표로 몽골인민혁명당을 창당하였으며, 혁명군을 조직해 제2차 혁명을 일으켜 중국군을 몰아내고 1921년 7월 11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몽골은 현재 매년 7월 11일을 혁명기념일로 정하고 7월 11일 ~ 13일을 몽골 민족 최대의 축제인 ‘나담Naadam 축제’ 기간으로 시행하고 있다. 몽골은 1924년 11월 26일 새로이 제정된 헌법에 따라 몽골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는데, 이로써 몽골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후 소련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몽골은 중소 국경 분쟁 발생 시 소련을 지원하였다. 1939년 5월~8월에는 일본이 몽골 지역에 침입해 할힌골Khalhin Gol 전투가 발발했는데 이때도 몽골은 소련과 연합하여 일본을 격퇴하였다. 중국은 1946년 2월 외몽골을 몽골인민공화국으로 인정하였으나, 내몽골은 1947년 5월에 중국의 자치구로 편입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몽골 민주화 운동과 개혁 개방 시대(1990년 이후)


1960년 몽골인민공화국은 신헌법을 승인하여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향후 공산주의를 건설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등 사회주의 건설이 완료되었음을 선포하였고 1961년에는 국제연합UN(United Nations)에 가입하였다. 몽골인민공화국이 추진한 사회주의 체제 건설 및 유지의 과정에서, 한편으로 일당독재 체제에 따른 관료주의와 상명하복 체제가 내부적으로 이완과 쇠락을 초래하는 문제점들을 드러내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에 구舊소련이 시행한 개혁 개방 정책의 물결은 이웃 몽골에도 영향을 미쳐 몽골 민주화 운동의 외적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실질적인 개혁 개방 정책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인민혁명당은 1988년 몽골판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개혁)인 신칠렐Shinechlelt 정책을 채택했고 1989년 12월 10일에는 몽골민주연맹 결성을 공식 선포하였다. 1990년 2월 18일에는 제1차 몽골민주연맹 대회의에서 몽골인민혁명당에 이어 몽골 역사상 두 번째 정당인 ‘몽골민주당’이 창당을 선언하였다. 1990년 5월 10일 몽골인민공화국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합법적인 다당제 체제를 인정하고, 같은 해 7월 29일에는 민주적 절차에 의한 최초의 자유선거를 실시하였다. 다당제가 현실화되었고, 몽골인민혁명당의 푼살마긴 오치르바트Punsalmaagiyn Ochirbat가 몽골인민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치르바트는 민주화 및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가속화하였다. 1991년 마르크스·레닌주의 포기를 선언하고, 사유화 규정을 확정하여 사유재산을 인정하였다. 1992년 1월에는 신헌법을 제정하여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로서는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건설’ 문구를 삭제하였다. 이와 함께 국호를 몽골인민공화국에서 몽골국(Mongolia)으로 변경하고 자유시장경제체제 지향 및 중립 비동맹 민주국가를 표방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치 및 행정


정치현황
몽골은 1924년부터 1991년까지는 공산주의 국가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후 1992년의 선거를 통해 공산주의를 폐기하였다. 1992년에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여 의원내각제의 성격이 강한 이원집정부제를 운영 중이며, 국가의 상징으로 외교, 국방, 사법을 관할하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별도의 총선을 통해 승리한 의회 다수당의 당수가 총리직을 맡아 행정을 통할하는 정치체제가 시행되고 있다. 또한 형식적으로 입법 사법 행정 3권이 분리되어 있으나, 국가 주요기관이 긴밀히 연결되어 주요 기능이 3부에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
몽골의 대통령은 직선제를 통해 선출되고 임기 4년에 연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은 외교 국방 사법권을 보유하며, 국회에서 총리나 각료 임명 시 제한적인 동의권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이사회(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의장 겸 군 최고통수권자이고 국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데, 대통령의 행위가 헌법 규정에 위배되었을 때 국회는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탄핵이 가능하다. 현행 대통령은 2009년에 이어 2013년 연임에 성공한 민주당 출신의 차히아긴 엘벡도르지Tsakhiagiin Elbegdor이다.

입법부
헌법상 국가권력의 최고 기관이며 입법권을 가지는 유일한 대의기관인 국가대회의Great Hural(국회)는 국내외의 주요 정책에 관하여 심의 결정한다. 국가대회의는 의원 76명으로 구성되고 임기는 4년이다. 정기회의는 통상적으로 춘계(4월~7월)와 추계(10월~익년도 2월)에 한 번씩 년 2회 개최되고, 임시회의는 재적 의원 3분의 1 이상 발의 혹은 대통령이나 의장의 발의에 의하여 소집된다. 7개의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으며 각 의원은 통상 2개의 상임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다.

몽골의 정당 흐름을 살펴보면, 1921년 독립과 동시에 출범한 몽골인민당이 1925년 인민혁명당MPRP(Mongoli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으로 개칭하여 1990년대 초까지 헌법으로 보장된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하였다. 1990년에 헌법 개정으로 최초의 다당제 민주총선이 실시되었고, 1996년 6월 총선에서는 야당연합(민족민주당+사회민주당)인 민주연합의 압승으로 인민혁명당의 75년 장기집권 통치가 종식되고 민주연합 연립정권이 출범했다. 이후 몽골의 정국은 인민당(구 인민혁명당)과 민주당의 경쟁과 연립의 구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최근 2012년 6월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인민당을 누르고 제1당을 차지하였다.

행정부
행정을 집행하는 내각은 형식적으로 각 부처의 행정권이 분산되어 있으나 내각회의를 통해 집단적으로 의사를 결정한다. 내각회의는 매주 수요일 오전에 개최하고 매주 월・화요일은 국회 상임위, 매주 목・금요일은 국회 본회의를 개최함으로써 내각과 국회가 사실상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운영되고 있다. 내각 각료는 총리의 제청으로 국회에서 임명하고, 임기는 4년이나 임기 만료 전이라도 불신임 결의에 의하여 퇴진이 가능하다. 최근 치러진 2012년 6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여 치메딘 사이한빌렉Chimediin Saikhanbileg이 2014년 11월 총리로 취임하였다.

사법부
몽골의 사법기관으로는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및 지방법원이 설치되어 있다. 사법부 체계는 대법원(The Supreme Court)과 지방법원(Aimag, Capital City Court), 지구법원(Som, Intersom, District Court)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법원에 법원협의회(The General Council of Courts)를 설치,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하고 있으며 대법원장과 재판관들은 일반법관위원회와 국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법원은 대법원장과 16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며 대법원 산하의 민사, 형사, 행정재판실은 독립적으로 활동을 한다. 국가 검찰청은 독립 기관으로 검찰총장, 검찰차장은 국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임기 6년)하며, 시市검찰청과 아이막 검찰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몽골 헌법은 사법기능을 법원에 전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사법부는 최고 상위 기관인 대법원과 다수의 항소법원 및 지방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법원은 범죄사건이나 법적 분쟁을 해결하며 하급법원의 항소소송 결정을 검토한다. 또한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와 검찰총장에 의해 양도된 인권사례를 검토하며 헌법을 제외한 법률의 유권해석을 제공한다. 헌법은 형사, 민사, 행정 법원같이 대법원이 감독하지 않는 특수화된 법원의 구성을 허용한다. 법원의 자문위원회 역시 사법부에 대한 독립을 위해 설립되었다. 법원 자문위원회는 판사를 임명할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

지방행정
몽골의 지방행정조직은 수도 울란바타르시와 21개 아이막Aimag(도道)으로 구성되고 그 산하에 다시 솜Som(군郡) 330개, 박Bag(면面) 1,568개로 이루어져 있다. 울란바타르시의 행정조직은 시정부와 시의회로 구성되며, 아이막의 행정조직은 아이막 도정부와 아이막 도의회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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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 개관
몽골 경제는 기본적으로 3C(Coal, Copper, China)와 외국인직접투자(FDI)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국제 자원가격의 급락과 함께 중국 경기 둔화 및 자원수요 감소 등으로 인해 구리Copper, 석탄Coal 등 몽골의 자원개발 및 수출에 어려움이 초래되고 있다. 또한 광산 개발 수익 감소와 함께 몽골 정부의 잦은 정책변경 등 투자 리스크 등으로 인해 외국인 투자이탈 상황도 지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한 자원 개발,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중국의 경제 성장에 힘입어 높은 경제성장을 지속해 오던 몽골은 최근 한자리수로 성장률이 급감하고, 물가와 환율의 상승 등 실물경제 어려움도 가중되고 있다.

한편, 몽골 국내산업은 광업, 농목축업에 한정되어 있으며, 국내 제조업 기반 부재로 불균형적 경제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세입 구조도 국영 광산회사의 법인세, 배당수익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개인소득세 및 부가가치세 등의 과세기반은 미흡한 실정이다. 낮은 국내저축률 및 국가신용등급에 따른 해외 자금 조달의 어려움으로 인해 광산개발, 인프라 건설, 제조업 발전 추진을 위한 자금조달이 향후 몽골경제의 숙제가 되고 있으며, 또한 내륙국가로서 물류상의 애로, 국제원자재 가격의 변동성, 외국인 투자자본 회복 및 주요 전략광산 개발 등이 향후 몽골경제 성장에 변수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리고 2010년 공무원 임금 30% 인상, 최저 임금 인상 등 임금 인상 압력과 포퓰리즘 성격의 대국민 현금 지급, 경제 규모에 비해 과다한 외화 유입으로 인해 몽골은 늘 물가 상승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 동향
몽골의 GDP성장률은 2011년 17.5%에서 2015년 현재 2.3%로 하락한 상황인데, 2016년에는 오유톨고이Oyu-tolgoi 지하광산 분쟁 해결 및 타반톨고이Tavantolgoi 전력 투자자 선정 등 광업 분야의 중심 문제들이 해결되면 외국인 직접투자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몽골은 동(매장량 5,500만 톤, 세계 2위), 형석(1,200만 톤, 3위), 석탄(1,750억 톤, 4위), 우라늄(6,300만 톤, 14위)등 풍부한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내륙국인데다 재원이 부족하여 광산 개발이 미흡하였으나, 광물가격 상승으로 외국인 투자자의 관심이 높아져 투자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몽골 광물자원의 최대 수요자이자 투자국인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수출에서 용이한 지리적 이점을 통해 진출이 용이하다. 이러한 성장 잠재력을 잘 발휘하면 경제 운용에 많은 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015년 말 기준 몽골의 교역규모는 총 84.7억 달러로, 수출이 46.7억 달러(석탄, 석유, 철, 구리 등 광물이 90%, 캐시미어 6% 등), 수입은 38억 달러(석유제품 21%, 중장비 및 부품 19%, 자동차 12%, 식품 7%)였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중국, 러시아, 영국, 한국, 일본, 독일 순이다.

몽골의 주요산업
몽골정부는 2006년 기존의 광물법(Law of Mongolia on Minerals)을 개정하면서 광산을 전략광산, 일반광산, 기타 광산으로 분류하였다. 특히 생산(가능)규모가 GDP의 5%를 넘고 사회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15개 광산을 전략광산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몽골 전략광산에는 구리, 금, 석탄을 비롯하여 철, 우라늄, 몰리브덴, 인, 아연, 은 등 주요 광물이 고루 포함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석탄은 주로 몽골 남부의 고비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수도 울란바타르에 가까운 바가노르Baganuur에도 석탄광산이 있다. 우라늄은 3개 광산이 모두 몽골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도르노드 아이막에 있는데, 이곳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지역으로 구소련 시절부터 이미 러시아와 연결하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구리는 남부 고비지역과 북부 에르데네트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15개 전략광산 중에서 석탄광산인 타반톨고이Tavantolgoi, 금과 구리의 오유-톨고이Oyu-tolgoi, 이미 오래 전에 개발되어 생산 중인 구리광산 에르데네트Erdenet, 이상 3개 광산이 규모와 경제성 면에서 월등한 것으로 평가된다.

오유-톨고이 광산의 생산은 2020년대에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며, 2020년 기준으로 구리 생산은 세계 생산량의 6%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몽골경제에 대한 영향으로는 2020년대에 이 광산의 금과 구리수출이 GDP의 55%에 이르고 정부 재정수입의 20%를 상회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이 광산 하나만으로도 막대한 자본축적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몽골정부는 나머지 전략광산을 국내외 경제, 환경 등을 감안하여 순차적으로 개발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사회와 문화


문화 예술의 특성
몽골인들은 전통적으로 5대 가축(소, 양, 염소, 말, 낙타)을 몰고 목초지를 찾아다니는 유목생활 문화를 영위해 왔다. 현대의 몽골은 계획적이며 집단적인 목축이 성행하고 있으며, 산업 발전과 경제 개발에 따라 이농과 인구 도시 집중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몽골인들은 스스로를 인종적으로는 아시아인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유럽인으로 간주하는 개방적 국민의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20세기 러시아의 영향도 있지만 유목생활과 자연환경에서 주로 연유한다. 몽골인들은 가축들과의 자유로운 이동, 광활한 땅, 기후조건 등이 어우러져 빠른 적응력, 자유로운 사고, 개방성 등을 자연스럽게 체득하였다.

몽골 문화는 고유의 예술성을 잘 보존해 온 특징을 갖고 있다. 예술 작품 속에는 유목생활의 색채와 대지의 기운을 담고 있고, 티베트와 중국 및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고유한 형태의 음악, 무용, 복식, 회화, 조각, 드라마, 필름, 공예 등을 발전시켜 온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문화 예술의 주요 분야
몽골의 전통음악인 허미khoomii(throat singing)는 후두, 목, 위 및 입천장 깊은 곳에서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동시에 내는 노래로서 몽골 서쪽 지역과 투바Tuva 자치공화국에서 주로 유행한다. 또 다른 형태의 전통음악인 ‘오르팅도urtyn duu(long songs)’는 두 개의 음조를 번갈아 가며 길게 반복하는 노래로서 사랑 혹은 전통적인 시골 생활을 표현한다. 말꼬리로 만든 현이 두 개인 전통악기 머링 호르morin khuur(horse fiddle, 마두금)는 국가적 축제, 결혼식 등 모든 행사에서 흔히 사용되는 악기이다. 많은 가정이 행복의 상징으로 집에 1개씩 간직하고 있다.

몽골의 전통 가면무용 ‘참Tsam’은 8세기에 처음으로 몽골에 소개되었다. ‘참’은 티베트 언어로 ‘춤(Dance)’ 혹은 ‘움직임(Movement)’이라는 뜻으로, 원래 사원에서 선택받은 어린 승려가 구경꾼 없이 비밀리에 추는 춤을 말한다. 선택받은 어린 승려는 반드시 ‘참’을 출 수 있어야 하고, 건강하여야 하며, 신체에 어떠한 상처도 없어야 한다. 가면은 신체에 비해 크고, 악마와 동물 및 인간 등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의상은 선명한 빨강, 노랑, 흰색, 푸른색 등의 원색과 수를 놓은 갖은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다.

대부분의 몽골 전통 예술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며, 티베트 예술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전통 조각과 족자그림(Thangka)은 주제, 색깔 및 비율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어 개성을 드러낼 여지가 희박하다. 초기 몽골 예술 작품은 공산정권하에서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1990년 후반부터 간단사Gangdan Monastery의 라마승이자 수석 예술가인 푸렙바트Purevbat에 의해 부활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몽골 미술은 사회현실주의가 주종을 이루었으나 최근 추상적 형태로 확대되고 있다.

몽골 사회주의 시기에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감독들에 의해 영화산업이 활발하였으나, 1990년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한 이후에는 소련의 지원이 단절되면서 몽골 영화산업은 사양화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서구 사회에서 유학한 젊은 영화인들에 의해 영화산업이 다시 부흥하고 있다. 가장 이름이 알려진 젊은 감독은 영화 ‘낙타의 눈물(The Weeping Camel)’을 감독한 뱜바수렝 다와Byambasuren Davaa다.

몽골의 유명한 축제문화로는 나담Naadam 축제가 있다. 오늘날의 나담(play 혹은 rest 의미)은 몽골인민혁명당 정부가 사회주의 혁명이 달성된 1921년 7월 11일을 기념하기 위해 도입한 관제행사로서, 매년 7월 11일~13일 전국적으로 개최된다. 사회주의 혁명 이전 7명의 봉건제후가 주최하던 전통 나담 행사와 몽골 민족의 영산인 복드Bogd 산, 헨티Hentii 산 및 어버Ovoo에 바치는 제2대 나담 행사를 합친 형태이다. 원래의 나담은 종교적 의미와 군사 훈련의 의미가 강하였으나, 오늘날은 전국적 축제 행사를 통한 국민 결속이라는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주요 행사로는 축하 연회, 축하 군중 대회, 축하 공연 등이 있다. 축하 공연 때는 활쏘기, 경마, 씨름 등 민속 경기를 한다. 참고로 머링 호르Morin Khuur, 오리팅도Urtyn Duu, 허미Khöömii, 나담Naadam 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현재 나담은 몽골인의 독특한 문화적 특징과 이미지의 표현으로 유목민 문화와 전통을 대변함으로써, 세계에 몽골인의 문화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나담은 몽골 민족을 결속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자 국가적 유대를 위한 중요한 상징이다.

언어와 문자
몽골의 공용어는 할흐 몽골어(Khalkh Mongolian)이며, 러시아 문자를 차용한 키릴 문자를 사용한다. 고대에는 ‘몽골 비치그’라는 문자를 사용하였다. 1930년 국회 결의로 라틴화된 키릴 신문자 제정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1941년 러시아 문자를 기본으로 한 키릴 신문자를 제정하였으며, 1946년 키릴 신문자를 완전 실시하였다.

한편 1990년부터 몽골 고유 문자 복원위원회를 구성하고, 몽골 전통 문자 복원 사업을 시도해 왔다. 2011년 7월 1일 공식적인 외교 문서에 전통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몽골 중학교부터 의무적으로 몽골 고유 문자인 ‘몽골 비치그’를 배운다.

몽골의 생활문화
몽골인의 식생활 문화는 목축업을 주로 하는 관계로 봄과 겨울에는 주로 양, 소고기를, 여름에는 영소 고기, 겨울에는 소, 말고기를 즐겨 먹는다. 몽골의 주식이 고기와 밀가루라서 고기와 밀을 활용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여름과 가을에는 아롤, 버터, 치즈 등 유제품을 먹고 여름에는 장의 약주로 불리는 전통 술인 마유주(알코올 도수 2도~3도인 말 젖만을 발효시켜 만든 술) 즐겨 마시며, 아침에는 수테차Suuteitsai( 홍차와 우유를 혼합한 몽골 전통 차)를 마신다. 몽골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으로는 튀김만두와 비슷한 형태로 나담 축제 때 먹는 호쇼르Khuushuur, 설날에 먹는 음식으로 찐만두와 비슷하나 기름이 굉장히 많은 부즈Buuz, 특별한 행사 때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 쪄서 만드는 허르헉Horhog 등이 있다.

몽골 문화의 특성을 대표하는 상징 언어는 ‘유목’ 문화이다. 유목은 문자 그대로, 정주하지 않고 가축을 데려 목초지를 요구해서 이동하는 생활이다. 유목 생활에 있어서 나무와 펠트로 된 조립식이동 주거 수단이자 전통 가옥인 ‘게르Ger’는 1시간 내에 세워지고 쉽게 해체되어 이동이 용이하며 생활의 거점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집이라고 하는 의미의 게르는 원형 목제의 뼈대 위에 방수성의 천을 씌운 이동식 주거지다. 원형 모양과 낮은 지붕은 바람을 피하는 데 적격이다. 게르의 출입구는 항상 남쪽을 향하며, 게르에 사용되는 펠트Felt는 늦은 여름 양털로 만든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장점도 갖고 있다. 몽골에는 1960년대 이후 현대식 아파트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아직까지 몽골인들의 아파트 거주율은 60% 수준이고 40%는 여전히 유목을 하며 게르에서 생활하고 있다.

몽골의 유목민들이 기르는 가축은 통상 5축畜이라고 불리는 소, 말, 양, 염소, 낙타를 가리키는데, 가축으로부터 많은 덕을 보며 살아오고 있다. 가축의 가죽은 옷, 카펫, 게르의 덮개, 물건이나 고삐 등에 사용하고, 젖을 짜서 치즈 등 다양한 유제품을 만들며, 고기는 식용으로 사용하고 뼈(복사뼈)는 아이들의 장난감 등에 활용한다. 가축들 중 유목민이 가장 특별한 정을 품고 있는 것은 이동의 수단이며 나담축제의 경마에 사용되는 말(馬)이다. 유목민들은 가축의 고기를 주식으로 하지만, 노동을 시키는 소나 타는 말은 먹지 않는다.

그 밖에 몽골인들의 전통의상으로는 우리나라의 두루마기와 닮은 겉옷 델Del이 있다. 이것은 두루마기식 의복으로 계절에 따라 내피를 덧대거나 벗겨서 착용하며, 형태는 종족 및 신분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델은 모자격인 말가이Malgai와 긴 장화 모양의 신발인 고탈Gutal과 함께 착용한다.

종교와 교육
몽골의 국교는 13세기 초 전래된 라마교(티베트 불교)로서 국민의 절반 이상이 신봉하는 종교다. 헌법상 종교 및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어 이슬람교와 기독교 신자들도 존재한다. 몽골은 1924년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불교에 대한 박해와 탄압을 받아 입지가 많이 약화되었으나 1990년 자유주의 체제 이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160여 개의 사원이 문을 열었으나 2~3세대 간 불교의 단절로 불교 라마(승려)가 부족하여 티베트, 인도 및 서방세계 출신 방문 승려의 도움으로 불교의식 등이 전수되고 있다. 울란바타르 시내에 있는 라마불교 사원 간등사Gangdan Monastery에는 100여 명의 라마승이 있으며 부설 승원을 운영 중이다.

샤머니즘 또한 몽골 역사 초기부터 16세기까지 몽골인들의 심성에 가장 깊이 자리잡은 신앙체계로서 오늘날에도 몽골인들의 생활 곳곳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특히 몽골 북쪽지역에서는 샤머니즘과 불교가 혼합된 형태로 존재한다. 기독교 및 천주교의 경우, 영국인 존 기븐스John Gibbens가 몽골에서 최초의 선교활동을 시작하였고, 한국 미국 등에서 찾아온 선교사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신자 수가 점증하는 추세에 있다.

몽골의 교육체계는 유치원(2-5세), 초・중학교(6-14세), 고등학교(15-17세), 대학교 및 기술학교(18세이상)의 과정을 거치는 3단계 제도를 두고 있다. 초등・중학교(의무교육) 9년과 고등학교 3년의 과정은 따로 분리되어 운영되는 게 아니라 1학년에서 12학년까지 12년제로 구분하는 학제(2008.9.1 시작)를 시행 중이다. 몽골의 학생수는 약 73만 명으로 인구의 약 4분의 1 수준이며 고등학생의 90% 이상이 대학 및 전문학교에 진학하는 등 교육열이 매우 높고 인구에 비해 대학의 수가 많은 편이다.
 

몽골에서의 예법문화

몽골에는 초원 유목생활의 전통에서 관습과 예절로 형성된 특유한 예법 문화들이 있다. 이를 유형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해야 할 사항’들이다. 테이블에서 음식을 자를 때는 몸쪽을 향하여 잘라야 하고, 음식과 음료를 받을 때는 오른손으로 받고 왼손은 음식이 무거울 때 오른팔을 지탱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차는 받는 즉시 마시며 마시기 전까지는 테이블에 놓지 말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더라도 최소한 시식 혹은 시음을 해 보아야 하며, 컵 밑을 만지고 컵 위 가장자리는 만지지 말아야 한다. 이쑤시개는 입을 가리고 사용하고, 무기는 게르 밖에 두어야 하며, 타인의 발을 밟았을 경우에는 즉시 악수를 청해야 한다.

반면에 ‘하지 말아야 할 사항’들이 있다. 칼을 전할 때는 상대방에게 칼끝을 겨누지 않고 칼 손잡이 쪽으로 전달해야 한다. 식사 중에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모든 사람의 식사가 종료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식사 중 다리를 포개지 않아야 한다. 연장자 앞에서 걷지 않고, 사원의 제단이나 종교적 대상에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사원을 떠날 때에는 제외). 난로, 제단, 혹은 타인에게 손가락질을 해선 안 되며 타인의 모자를 만지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이동식 전통가옥인 게르 관련 유의사항이다. 밖에서 보았을 때 게르 내부의 정중앙은 상석으로 집 주인석이고, 오른쪽은 주방시설이 있어 부인석이며, 왼쪽이 손님석이니 방문 시 주의를 요한다. 몽골인들은 불을 신성시 여기기 때문에 게르 안에 있는 화로에 물을 붓거나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야 하고 화로를 넘어가서도 안 된다. 게르 안에서 휘파람을 불거나 기둥에 몸을 기대서도 안 되며, 게르에 들어갈 때 문지방을 밟는 것은 주인장의 목을 밟는 행위로 간주되므로 문턱에 발이 걸리거나 문지방을 밟게 되면 나갔다 다시 들어와야 한다. 게르에서 누울 때는 발이 입구를 향해야 하므로 이에도 유의해야 한다.
 

한국과 몽골의 관계


몽골은 시장경제 체제 전환 이후 안정적 대외 환경 조성을 위해 지정학적 특수성을 반영한 균형적 외교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특수성을 반영하여 국방보다는 외교에 중점을 두는 국가안보 전략을 시행하고 있다. 안전 보장 차원에서 인접한 중국, 러시아에 대해 중립노선을 견지하고, 과도한 중・러 의존을 피하기 위해 한국 미국 일본 EU 등 제3의 이웃 국가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UN과 ASEM에 가입 후 다자 외교에도 적극 참여 중이다. 몽골은 2011년 현재, 150개 국가와 수교 중이며 러시아, 중국, 북한 등 구사회주의 국가는 물론 한국, 일본, 미국 등 제3의 이웃국가, 자원 부국 등과 균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총리의 꾸준한 정상외교를 통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과 몽골의 외교관계
한국과 몽골은 1990년 3월 26일에 수교하였다. 같은 해 6월에 몽골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고 1991년 2월에는 한국에 몽골대사관이 문을 열었다. 수교 이후 몽골 내에서 한국어 및 한국학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몽골에서의 한국 문화 영향력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한국 유학 경험자와 근로자 등을 중심으로 한국 음식에 대한 호감도 급증해 울란바타르 시내에 한국 식당이 약 70여 개에 이른다. 최근 한국 TV 드라마와 대중가요에 대한 인기도 급속히 확산 중인데, 일각에서는 몽골 내 한국 문화의 급속한 확산 추세에 대해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국-몽골 수교 25주년을 맞은 2015년에는 양국에서는 문화 교류 행사를 활발히 진행하였다. 2015년 말 현재 양국의 인적 교류는 방한 81,580명, 방몽 47,213명을 기록하고 있고 한국에 체류 중인 몽골인은 30,527명, 몽고에 체류 중인 한국인은 2,720명이다. 2015년 말 현재 양국의 인적 교류는 방한 81,580명, 방몽 47,213명을 기록하고 있고 한국에 체류 중인 몽골인은 30,527명, 몽고에 체류 중인 한국인은 2,720명이다. 최근 2016년 5월 19일에는 몽골의 엘벡도르지 대통령이 공식 방한을 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한-몽골 경제통상 관계
2015년 기준 한국의 대對몽골 수출은 2.457억 달러, 수입은 0.462억 달러로 무역수지는 1.995억 달러이다. 몽골 수출입은 큰 폭의 무역흑자 기조를 견지하고 있으나, 2012년 이후 몽골경제 침체로 인해 양국 교역은 감소 추세이다. 우리 수출 품목은 자동차 및 기계류 위주, 수입 품목은 광산물 및 의류, 가죽 등이 중심이 되어 있다.

몽골은 우리나라의 51번째 투자대상국이다. 2015년까지 한국의 대對몽골 투자총액은 8.4억 달러(신고기준 1,323건)이고 그 중 2015년도는 0.83억 달러 수준이며, 투자 분야는 광업(33.6%), 도소매 및 외식업(16.8%), 부동산업(11.9%), 건설업(11.2%) 순이었다. 몽골의 대對한 투자는 건수나 금액면에서 미미한 수준이며, 2015년까지 몽골의 대對한 투자총액은 0.61억 달러(신고기준 993건), 2015년도에는 0.01억 달러에 그치고 있다.

북한과 몽골의 관계
몽골은 1948년 10월 15일 북한과 수교를 맺었으며, 양국은 사회주의 연대를 바탕으로 ‘전통적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1990년 3월 한국과 수교한 이후 몽골은 개혁·개방 추진을 위해 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는데, 북한은 몽골이 한국의 햇볕정책을 지지한 데 대해 반발하면서 1999년 주몽골대사관을 철수하여 양국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소원해졌다. 하지만 2007년 김영남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몽골 방문을 계기로 양국의 관계는 복원되었다. 몽골은 경제 발전 과정에서 동북아 안정과 평화가 국익에 부합한다는 판단하에 남북한 균형 외교를 통해 자국의 외교적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몽골은 시장경제 전환 경험을 북한에 전수함으로써 북한의 개방을 유도한다는 명분하에 대對북한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 1980년대 몽골과 북한의 교역액은 연간 1,000만 달러 수준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 감소 추세를 보였고 2014년은 60만 달러로 미미한 수준에 있다. 몽골은 경제 발전 과정에서 건설·광업 분야의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하므로, 중국 노동력의 과다한 유입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북한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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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기념공원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에는 신의神醫라 불린 한국인 의사로서 몽골 민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대암大岩 이태준李泰俊 선생(1883~1921)의 기념공원이 있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서 태어난 이태준 선생은 세브란스 의학교(현재의 연세대 의과대학)를 졸업하고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눈을 뜬 후 중국에서 활동을 하다 1914년 몽골에 입국,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업하여 몽골인들에게 근대적 의술을 베풀었다. 당시 몽골을 휩쓸던 성병을 퇴치해 몽골 민중의 사랑을 받았으며,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연계하여 항일활동 전개하였다. 몽골 마지막 황제의 주치의로 활약했으며, 1919년에는 몽골로부터 ‘에르레닌오르치르’라는 최고의 훈장까지 받은 그는 현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21년 울란바타르를 점령한 러시아 군대(백군) 운게른의 부하들에 의해 38세의 나이에 피살되었다. 선생의 묘는 성산인 보그트산에 있다고 전하며, 1980년 한국 정부는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1년 7월, 이태준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여 국가보훈처 및 연세의료원의 재정 지원으로 울란바타르 시 복드칸 산 남쪽 기슭, 자이승 승전탑 아래에 ‘이태준 기념공원’이 준공되었다. 2007년 한-몽 양국 정상회담 시 동 공원의 영구 보전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2008년 1월에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와 몽골 자연환경부 간 양해각서를 체결, 부지의 안정적 사용 기반이 마련되었다. 2010년 6월에는 국가보훈처 및 연세의료원의 지원을 받아 공원 내 이태준 기념관을 개축하기도 했다. 현재 주몽골대사관, 재몽골한인회, 연세의료원, 몽골 정부측 인사로 구성된 “이태준 기념공원 관리위원회”가 공원의 관리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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