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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허상虛像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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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까지 우리는 중화사관(공자, 사마천)과 소중화사관(태종 이방원)에 의한 역사 왜곡을 살펴봤다. 이제 중국의 역사 왜곡과 비견되는 일본의 역사 왜곡을 검토할 시간이다.

흔히 일본을 ‘가깝지만 먼 나라’라고 한다. 실제로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역사의 깊은 상처와 원한으로 심리적으로는 아직 먼 나라이다. 그것은 아마 일본이 우리에게 준 큰 상처 때문일 것이다. 대한인에게 일본이 안겨 준 큰 상처를 꼽으라면 누구나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과 ‘일제 36년 강점기(1910.8.22~1945.8.15)’를 떠올릴 것이다. 두 시기에 수백만(최소 임진왜란 230만, 일제강점기 100만 추정)의 우리 선조들이 억울하게 죽어 갔다. 그러나 반성 없는 일제의 뻔뻔함에 그분들의 울분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전쟁도 명분이 있고, 침략도 구실이 있다. 그럼 일본이 내세운 조선 침략의 논거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1867년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본격화된 정한론征韓論과 그 주장의 뿌리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部說이다. 그럼 정한론은 무엇이며, 임나일본부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실체를 역사 원문을 통해 살펴보자.


 

정한론征韓論이란?

 

정한론征韓論은 무엇인가? 『역사 용어사전』에는 ‘에도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초기에 일본에서 등장한 조선 침략론을 가리킨다’라고 되어 있다. 정한론은 ‘칠 정征, 대한 한韓, 말할 론論’으로 ‘조선 침략론’을 말한다.

그럼 왜 일본은 한국을 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일까?

일본의 정한론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명치유신明治維新이다. 『중학생이 알아야 할 사회·과학상식』에서는 명치유신을 이렇게 쉽게 정리했다. “1868년,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개항된 후 지방의 무사들이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고한 사건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신분제도 타파, 의무교육 실시, 서양 문물 도입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여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하였다.”라고 말이다. 한마디로 명치(明治, 메이지)왕 때 서양 문화를 도입해 기존 판을 뒤집은 유신惟新, 즉 새로운 체제를 말한다.

물론 ‘새로운 체계’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853년(미국 페리 제독 첫 개항 요구)부터 1868년(메이지유신)까지의 15년간은 일본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로, 피바람이 불었던 시기라 평가된다. 어찌 되었든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구 문명을 배우기 위해 서구 사회로 인재들을 유학 보냈다. 그 결과 서구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를 받아들였고, 정치 체계도 막부幕府(장군 중심의 군막)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무사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천황 중심 국가를 천명했다.

그런데 서구 문명의 달콤한 맛을 본 일본인은 과학 문명만 받아들인 게 아니라 제국주의의 잘못된 정신도 받아들였다. 서구 사회가 전 지구에 식민지植民地를 경영하듯 일본도 식민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중심에 정한론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옛 일본의 신공황후가 지배하던 한반도 남부부터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이제 임나일본부설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자. 임나일본부설은 문자적으로는 ‘임나任那에 있었던 일본日本의 부府, 즉 관청’이라는 말이다. 극우파 일본인들은 일본의 야마토 왜[大和倭]의 신공황후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을 주장한다. 이것을 일명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임나일본부설을 이용해 한반도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한마디로 조선을 병합하는 것은 고대 영토를 되찾는 것이지 침략이 아니라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는 패망하여 이 땅에서 물러갔지만 아직도 일본 교과서에는 ‘가야=임나’라고 명시한다. 그들의 후손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계속 심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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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일본서기』의 원문을 검토해 보자. 신공황후 기록을 살펴보자.

 

황후는 재물이 많은 보배로운 나라를 얻고자 (중략)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하였다. (중략) 순풍이 불어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 없이도 곧 신라에 이르렀다.

신라왕(파사매금波沙寐錦)은 두려워 전의를 상실했다. “어찌 군사를 내어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즉시 흰 기를 들고 항복했다. 흰 줄을 목에 드리우고 두 손을 뒤로 묶고, (중략) “길이 천지와 함께 복종하여 사부飼部가 되겠습니다. 춘추로 조공을 거르거나 태만하여 말빗과 말채찍을 바치지 않는다면 천신지기여, 벌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왕이 신라가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중략) 스스로 영외로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는 길이 서번西蕃(서쪽 울타리)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일본서기』 주아이 9년 조, 서기 200년)


 

이것이 이른바 『일본서기』가 전하는 ‘진구왕후의 삼한三韓정벌론’이다. 황당한 내용이지만 간략히 핵심 내용을 살펴보자.

진구왕후(신공왕후神功皇后)라 하는 일본 통치자는 삼한을 정벌하기 전에 죽은 남편〔일왕 주아이(중애仲哀)〕의 시신을 감추고 신라를 정벌하기로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진구왕후는 만삭의 몸이었다는 것이다. 진구왕후는 신라 정벌 때까지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서 돌을 들어서 허리에 찼다고 한다. 아기가 나오는 것도 막은 진구황후는 음력 10월, 겨울에 신라로 출정한다. 이때 “풍신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이 파도를 일으키고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떠받쳤다.”고 한다. 이렇게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은덕을 받아 진구왕후는 신라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신라 왕은 놀라 바로 항복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소식을 듣고 고구려와 백제의 왕까지 바로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일본국에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구왕후의 삼한三韓정벌론’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총독부 시절 일제는 이것을 조선의 학생들에게 철저히 주입시켰다.

그럼 『일본서기』에 기록된 당시 신라 왕은 실존 인물인가? 신라의 왕은 파사매금波沙寐錦으로 나온다. 이름이 비슷한 신라 왕은 80~112년에 재위한 파사이사금이다. 그러나 이름이 비슷할 뿐 연대가 맞지 않다. 그리고 진구왕후 때는 200년경이다. 이때 신라 왕은 나해왕奈解王이다. 일본 측 주장대로 주갑제周甲制로 120년을 더해 계산해도 흘해왕 때가 된다. 이처럼 당대 신라 왕의 이름은 『일본서기』와 맞지 않다.

그럼 서기 200년경의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찾아보자. 이때 백제는 초고왕肖古王과 구수왕仇首王 때이고, 신라는 나해왕奈解王, 고구려는 유명한 을파소가 재상으로 있던 산상왕山上王 때다. 그런데 『삼국사기』 어디에도 진구왕후의 삼한三韓정벌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단지 고구려에는 한인漢人들이 투항해 왔다는 기사, 백제에는 신라와 전투한 기록, 신라에는 가야국의 화친 요청, 말갈의 침범, 왜구를 물리친 기사가 전부일 뿐이다.)

결국 『일본서기』 또는 『삼국사기』 둘 중 하나는 기록이 조작된 것이 된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가? 백이면 백 『삼국사기』일 것이다. 누가 읽어 봐도 『일본서기』는 황당한 판타지 소설 같은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몇몇 이 땅의 매국사학자들은 『일본서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일제 시대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오타 아키라太田亮,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주장한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이다. 한마디로 김부식의 기록 중 삼국의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학자들 속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서기』 기록에 맞게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역사를 조작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 기록을 불신해 『일본서기』의 황당한 기록이 자리할 틈을 만들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연대기적으로 기술된 『삼국사기』를 부정하고, 역사 기록의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은 『일본서기』를 칭송하는 것이다.

 

임나일본부 주장의 문제들

 

그럼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주장의 모순점을 검토해 보자.

첫째, '임나일본부'란 명칭 자체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일본서기』 유라쿠 8년(서기 464년)조다. 그런데 정작 임나를 평정했다는 기록은 『일본서기』 진구 49년(서기 369년) 조에 나온다. 두 기록은 약 100년 차이가 난다.

쉽게 말해 ‘임나 평정’은 369년에 하고, ‘일본부’라는 이름은 464년에 생겼다는 것이다. 평정하고 바로 관청을 세운 것이 아닌 이상한 역사 기록이다. 더구나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은 아직 없었던 때인데 ‘일본부’라 칭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국호는 670년에 쓰이기 시작한다. 『삼국사기』에는 670년에 ‘왜국倭國이 국호를 바꿔 일본日本이라 했다’고 분명히 전한다. 따라서 200년 전인 464년에 일본이라는 국호를 딴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기록한 『일본서기』의 내용은 성립될 수 없다. 기록자의 조작을 의심받을 뿐이다. 한마디로 야마토 왜 시절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이것이 제1의 모순이다.
그럼 『일본서기』의 해당 기록을 검토해 보자.

 

임나 평정 기록: 369년
(야마토에서 온 군사들이) 모두 탁순卓淳에 집결해서 신라를 공격해 깨뜨리고, 이로 인해 비자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탁국啄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7국을 평정했다. (『일본서기』 진구 49년 조)


 

임나국任那國과 일본부日本府 기록: 464년
고구려 왕이 즉시 군사를 일으켜 축족류성에 모였다. 노래하고 춤추면서 흥겹게 놀았다. 그래서 신라 왕은 밤에 고구려 군사가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에서 적이 신라 땅에 모두 들어온 것을 알고, 임나任那국 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말했다.


 

“고구려 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는데, 이때를 당하니 깃발에 매단 끝이 흔들리는 것 같이 나라가 위태롭고, 달걀을 쌓은 것보다 더해서 목숨의 길고 짧음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일본부日本府 행군원수行軍元帥 등의 구원을 청합니다. (『일본서기』 유랴쿠 8년 조)#]

이처럼 황당한 두 기사가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원출처이다. 위의 내용은 야마토 왜가 369년에 신라를 공격해 깨뜨리고, 7국을 평정했다는 것이다. 아래 내용은 95년 후 고구려의 정벌을 두려워한 신라가 임나국왕任那國王에게 사신을 보내 일본부日本府 군대에 구원을 청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임나 + 일본부’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두 기사는 이상한 점이 있다. 신라를 공격했는데 가라 등 7국을 평정했다고 한다. 이는 프랑스를 공격하고 이탈리아를 얻었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고구려 왕은 노래하고 춤추며 신라 땅으로 들어온다. 이는 전쟁하는 군대의 모습이 아니다. 이때 신라 왕은 ‘일본부日本府 행군원수行軍元帥의 군대’를 꼭 보내 달라고 엎드려 청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이라는 국호도 없던 때에 일본 군대가 나온다.

그럼 이 무렵(369년, 460년)의 기록을 『삼국사기』를 통해 검토해 보자.

369년은 신라는 나물왕奈勿王,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고구려는 고국원왕故國原王 시대였다. 이때 가장 큰 사건은 백제와 고구려가 황해도와 평양에서 크게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369년 가을에 치양雉壤(황해도 지역)에서 백제와 고구려 간의 큰 전쟁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크게 패하여 5천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371년 겨울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했고, 고구려 고국원왕은 화살에 맞아 서거했다고 한다. 신라 기록에는 왜倭에 관한 것은 없고, 백제 왕이 좋은 말을 보내왔다는 내용뿐이다. 『일본서기』의 첫째 기사와 같은 내용은 전혀 없다.

다음은 460년경 삼국을 살펴보자. 이때 신라는 자비왕慈悲王, 백제는 개로왕蓋鹵王, 고구려는 장수왕長壽王 집권 시대였다. 이때는 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의 남하 정책과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羅濟同盟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은 평양 천도(427년) 후 남하 정책을 폈고,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어서 버텼다. 결국 고구려의 공격에 백제는 수도 한성이 함락(475)되고, 개로왕은 서거한다.

그럼 460년을 전후한 신라의 기록은 어떠한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와 벌인 많은 전투 기록이 있다. 특히 463년 봄에 왜인이 심량성을 침입하였는데 신라군이 크게 물리쳤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렇지만 이때 왜인은 노략질을 주로 하는 해적이지 야마토 왜의 정식 군대는 아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고구려의 남하에 신라 자비왕慈悲王은 전전긍긍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470년 충북 보은에 건립된 삼년산성三年山城 축성築城에서 알 수 있다. 한강 유역까지 내려온 고구려군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는 당시 북쪽 경계인 보은에 삼년산성(3년간 축성해 명명됨)을 축성했다. 아직도 보은에 남아 있는 성을 볼 때 신라는 고구려와의 전투에 대비했고, 왜의 노략질도 물리칠 충분한 힘을 가졌다고 봐야 한다. 『일본서기』의 둘째 기사와 같은 황당한 내용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없다.

만약 『삼국사기』에 나오는 왜군이 야마토 왜라면 어떻게 신라가 전쟁 중인 적국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일본서기』 주장대로 신라가 369년 깨뜨려졌다면 고구려를 대비하여 삼년산성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일본서기』의 기록은 당시 정세와 사리에 맞지 않는 왜곡된 기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유랴쿠 8년 조에 이어지는 기사記事는 더욱 황당하다. 고구려의 국력도 무시한 황당함 그 자체이다. 임나 왕이 가시와데노오미 이카루가 등의 장수를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는데 “고구려의 장수들은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이런 거듭된 『일본서기』의 기록을 우리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강력한 장수대왕의 고구려 군사들이 두려워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는 당시 역사 상식과 부합하지 않는다. 결국 이는 『일본서기』 집필자의 의도된 왜곡이요, 창작의 붓놀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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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야마토 왜의 통합 역사와 임나 경영의 시기가 맞지 않다.
 

야마토 왜 세력이 주변의 일본 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에 들어서야 가능했다. 그런데 4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것은 내부 성장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일본서기』의 맹점이라 할 것이다.

또 그들의 주장대로 임나任那가 가야이고, 왜倭가 임나를 200년 동안 지배했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 유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지만, 가야 지역 발굴 자료들은 4세기 이전과 5~6세기의 문화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해당 기사는 후대의 역사 기록자가 조작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셋째, 가야의 멸망 후에도 임나라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계속 등장한다.

만약 식민사학자들의 주장대로 ‘가야 = 임나’라면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가야의 멸망(562년) 후에 임나가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진흥대왕이 재위 23년(562) 이사부와 사다함 장군을 보내 가야를 멸망시켰다고 나온다. 『일본서기』에도 562년 신라가 임나를 멸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가야에 관한 기사가 더 나오지 않지만, 『일본서기』에는 가야 멸망 이후에도 5번이나 더 나온다. 멸망 후 80년이 지난 기록도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일제 식민사관의 주장대로 ‘가야=임나’의 논리가 성립되지 않음을 그들의 1차 사료인 『일본서기』가 명증해 주는 것이다. 가야는 임나와는 완전히 다른 국가라는 것이다.

 

가야 멸망 38년 후인 600년에도 계속 나오는 임나
신라와 임나가 서로 공격했다. 천황은 임나를 도우려고 하였다. (중략)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나를 위해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에 직접 가기 위해 바다에 배를 띄워 신라에 도착하여 다섯 성을 공격해 뿌리를 뽑았다. 신라 왕이 두려워서 백기를 들고 장군의 깃발 아래 섰다. (중략) 신라와 임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 『일본서기』 일왕 스이코 8년)


 

신라와 임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신라와 임나가) 상표上表를 올려서 말하기를, “하늘에는 신神이 있고, 땅에는 천황天皇이 있습니다. 이 두 분의 신을 제외하고 두려울 것이 또 있겠습니까? 지금 이후에는 서로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또 배의 키가 마르지 않도록 매년 조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야마토에서는) 사신을 보내서 장군을 소환했다. 장군들이 신라에서 돌아왔다. 신라는 즉시 임나를 다시 공격했다. (일왕 스이코 8년, 서기 600년)


 

우리가 이런 세 가지 문제점만 봐도 임나일본부 주장이 얼마나 허점투성이인지 알게 된다. 이런 엉터리 기록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이는 야마토 왜의 모국母國이자 상국上國인 백제의 멸망에 울분을 터트리며 『일본서기』(720년)를 편찬한 기록자의 붓장난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서기』 기록자는 패망의 울분을 신라에 대한 보복의 붓장난으로 풀려고 했다. 실제로 『일본서기』를 보라. 늘 신라 왕은 야마토 왜의 군대만 보면 바로 겁먹고 항복한다. 그리고 배의 키가 마르지 않도록 매년 조공을 올리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다가 야마토 왜의 군대가 철수하면 바로 배반해 임나를 공격한다고 되어 있다. 『일본서기』는 항상 신라인을 비열하고 의를 모르는 치졸한 사람들로 그렸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 나열을 넘어선 맥락 공부다. 앞뒤도 안 맞는 『일본서기』를 맹신해 열등감과 분노의 붓장난에 놀아나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임나=가야’를 주장하는 근거와 한계

 

식민사학자들이 ‘임나가 가야’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가야 = 임나’를 주장하는 식민사학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세 가지 기록이 있다.

첫째, 유교를 공부한 강수 선생의 고향이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둘째,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러 귀복시켰다는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이다.

셋째, 창원 봉림사 전경대사의 출신이 ‘임나왕족任那王族’이라는 진경대사비문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사료들은 임나가 가야라는 것을 명증해 주진 못한다. 첫째 기록을 보면 태종무열왕(김춘추)과 강수의 대화 속에서 강수는 분명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이 임나가량은 자신 또는 조상의 출신을 말한 것이지만 어느 지역으로 비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점이 있다. 임나가 식민사학자들의 주장대로 4~6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사실이라면 ‘임나’가 『삼국사기』 「강수열전」에 한 번 언급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신라본기」 등 삼국의 본기에 무수히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임나’가 다수 기록된 『일본서기』와 달리 『삼국사기』에는 겨우 한 번밖에 안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번째 세 번째 증거로 주장하는 광개토태왕비의 ‘임나가라任那加羅’와 진경대사비의 ‘임나왕족任那王族’의 기록도 ‘임나가라’와 ‘임나’가 어디를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더구나 임나 왕이 가야 왕이라는 기록도 없다. 결론적으로 세 기록 모두 임나를 가야로 비정할 만한 결정적인 사료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몇몇 식민^매국사학자들은 음音이 비슷하면 가져다 붙이기를 좋아한다. 식민사학의 태두泰斗라는 이병도는 사료에 없는데도 어디에 비정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기술했다. 그 전통을 후세들이 따르는 것인가. 제대로 된 역사학자라면 1차 사료에 전혀 없는 이야기를 상상으로 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임나를 가야로 주장하고 싶은 식민사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국, 임나, 의부가라意富加羅, 미마나국, 가라加羅’ 등을 바탕으로 가야를 임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차근차근 살펴보면 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일 뿐이다. 음이 비슷할 뿐이지 가야伽耶가 임나任那가 될 수 없고, 가락駕洛이 가라加羅가 될 순 없다. 『삼국유사』의 가야伽耶, 『삼국사기』의 대가락大駕洛, 가야국伽耶國이 어찌 임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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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6가야에 해당되는 지명은 『일본서기』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들의 후예인 이 땅의 매국사학자들은 음이 비슷한 가라를 가야로 읽고 싶어 한다. 가라와 가야의 음이 비슷하니 그렇게 대충 비정하고 우긴다. 그러나 우리가 대전大田과 대구大邱가 같은 대자로 시작한다고 해서 같은 곳이라 칭하고 우긴다면 지리 상식이 전무한 사람이거나 정신병자라 칭할 것이다. 그것은 억지일 뿐이다. 역사학자는 한 글자 한 글자의 다름에 주목해야 함이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임나가 가야가 아니라면 임나국은 어디인가?

 

『일본서기』에서 임나국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 기사가 있다.

 

任那者(임나자) 去築紫國(거축자국) 二千餘里(이천여리)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북조해이재계림지서남)
“임나는 쓰꾸시(기타큐슈)국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일본서기』 스진 65년 조, 서기전 33년)


 

‘가야 = 임나’라는 일본의 주장은 이 구절만 제대로 봐도 거짓임이 명확해진다. 『일본서기』에는 이처럼 ‘임나국은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는 명확한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도 일본의 학자들은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는 부분만 읽고 그 앞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는 부분은 외면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가야 = 임나’가 성립되려면 가야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야 지역에는 북쪽이 바다로 막힌 곳이 없다. 신공왕후 시절에 대구와 경상북도가 바다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일본서기』를 검토해 보면, 일제가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인용한 1차 사료인 『일본서기』 자체에서 ‘임나=가야’가 아님을 명증해 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실증사학을 주장한 일제 식민사학의 맨얼굴이다. 그런데 아직도 매국사학자들은 1차 사료의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는 말만 인용해 ‘김해 지역에 임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일제 식민사관과 이를 추종하는 매국사학의 실체인 것이다.

또 『일본서기』의 스진 65년(서기전 33년) 기사를 보면, 이때 임나국에서 야마토 왜에 소나가시치라는 조공사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가야는 42년이 돼서야 건국되었는데 어찌 서기전 33년에 존재한 임나국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식민사학자들은 ‘임나 = 가야’를 주장하기 위해 출생도 안한 가야를 소환했다. 역사 맥락도 무시한 채 가야가 건국되기 75년 전에 가야가 있었다고 우긴 것이다. 이렇게 일제는 막무가내로 ‘임나 = 가야’라고 선포했고, 조선 침략의 정당성의 도구로 활용했다. 결론적으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는 결코 가야가 될 수 없다. 임나는 가야 땅이 아닌 ‘북쪽이 바다로 막힌 지형’을 가진 곳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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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일사」가 명증하는 임나의 위치

 

그럼 임나국은 어디인가? 그 해답은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있다. 「태백일사」는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쪽 끄트머리에 있던 지역이다’라고 전한다.

 

任那者(임나자)는 本在對馬島西北界(본재대마도서북계)하니 北阻海(북조해)하고
有治曰國尾城(유치왈국미성)이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國尾城이라 했다.

後(후)에 對(대마이도)馬二島가 遂爲任那所制故(수위임나소제고)로 自是(자시)로
任那(임나)는 乃對馬全稱也(내대마전칭야)라.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안경전 대한사랑 상임고문은 “『환단고기』를 보면 임나에 대해서 아주 총체적인 해답을 내려 줍니다. 임나와 임나일본부에 대해 지리학적, 문화교류사적인 측면에서 이것보다 더 진실을 전해 주는 기록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동방 대한의 역사 원형을 간직한 『환단고기』는 분명 ‘임나 = 대마도’라 기록했다. 그리고 임나任那는 삼가라三加羅로 나뉘었고, 가라加羅는 중심이 되는 읍邑을 지칭하는 것이라 했다. 대마도의 삼가라는 ‘좌호佐護가라, 인위仁位가라, 계지雞知가라’를 말하는데 각각 신라, 고구려, 백제가 통치했고, 나중에 광개토대왕 10년(서기 400년)에 고구려에 모두 귀속되었다고 전한다.

이제 우리는 『환단고기』 와 『일본서기』 기록을 동시에 볼 필요가 있다. 분명 두 기록은 ‘임나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고 똑같이 선언한다. 즉 ‘북조해北阻海’가 임나 위치를 비정할 결정적인 문구란 소리이다. 조阻 자는 ‘막히다, 험하다’는 뜻이다. 아래 『일본서기』 기록을 다시 읽어 보라. 임나가 어디인지 이제는 명확히 보일 것이다.

 

“임나는 쓰꾸시국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일본서기』 스진 65년 조 기사)


 

이제 우리는 『환단고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 임나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게 되었다. 임나는 규슈 북부에 있던 쓰꾸시국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는 곳이다. 그곳은 바로 대마도對馬島인 것이다. 이런 ‘임나=대마도’라는 주장은 문정창, 황순종, 최재석, 윤내현 교수 등도 논문과 저서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한마디로 임나는 대마도인 것이다. 대마도의 뜻 그대로 마한을 마주하는 섬인 것이다.

또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일본서기』가 전하는 임나의 크기이다. 『일본서기』 게이타이 6년(512) 12월 조에는 임나와 인근 신라·백제·고구려 사이는 서로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만 가지고는 그 주인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가깝다고 서술하고 있다. 즉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와 신라·백제·고구려는 서로 붙어 있다시피 했던 마을 규모의 소국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의 대마도 삼가라의 왕들에 관한 기록과 함께 삼가라가 각기 신라, 고구려, 백제에 속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좌호’, ‘인위’, ‘계지’라는 말이 아직 대마도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任那(임나)가 又分爲三加羅(우분위삼가라)하니 所謂加羅者(소위가라자)는 首邑之稱也(수읍지칭야)라.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自是(자시)로 三汗(삼한)이 相爭(상쟁)하야 歲久不解(세구불해)하니
이때부터 삼한三汗(삼가라의 왕)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佐護加羅(좌호가라)는 屬新羅(속신라)하고 仁位加羅(인위가라)는 屬高句麗(속고구려)하고
雞知加羅(계지가라)는 屬百濟(속백제)가 是(시야)也라.
좌호가라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에서 임나가 곧 대마도對馬島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일본서기』 유랴쿠 8년 조에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이라 칭한 존재도 대마도에 있던 소국을 다스린 왕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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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아는 만큼 보이고, 배운 만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제 식민사학자와 매국사학자들 주장의 엉터리 논리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코 ‘임나 = 가야’가 성립될 수 없음을 1차 사료들(『삼국사기』, 『일본서기』, 『환단고기』)를 통해 확인했다. 특히 일본학자들이 주장의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조차 ‘임나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결정적인 역사 증거다. 그러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헛된 주장은 아마 일본이 사라지기 전까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직 분명하게 깨어난 우리들의 의로운 역사의식만이 그들의 헛된 망상을 잠재울 것이다.

 


 

힘 없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최후

 

당시 서양 제국주의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日本은 호시탐탐 조선 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은 1885년에 청나라와 맺은 톈진조약을 구실 삼아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서구화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제는 더 이상 예전의 왜倭가 아니었다. 조선이 믿고 의지했던 청淸나라도 일제의 군홧발에 허무하게 무너졌고, 조선의 강토와 동학군은 일제의 총칼에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동학군을 무자비하게 토벌한 이듬해 1895년 을미년에는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조선의 국모 민비를 난도질하여 시해하는 만행(건청궁乾淸宮의 변變)을 저질렀다. 그로부터 24년 후 일제는 덕수궁에 머물던 퇴위한 황제, 고종마저도 독살하였다. 일본은 우리와 가까운 이웃이지만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패륜 사건으로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구한말 힘 없는 조선의 상황을 대변하는 두 사건을 당대의 지식인 윤치호의 일기를 통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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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일기가 밝혀 주는 황가皇家의 비극

고종 독살 장면 

윤치호尹致昊(1865~1945)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될 때까지 산 한문과 영어, 일어에 능통한 인재였다. 결국 친일의 길을 걷게 된 안타까운 인물이지만 그의 일기는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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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서 고종 독살의 다섯 가지 근거를 언급했다. 숙모 생일날 숙모의 동생인 한진창韓鎭昌이 전한, 고종의 시신을 직접 봤던 민영달(명성황후의 사촌 동생)의 말을 기록한 것이다. 민영달이 목격한 독살의 결정적인 다섯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멀쩡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둘째, 시신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다.

셋째,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 있었고 혀는 녹아서 없어졌다.#

넷째, 30cm쯤 되는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다섯째, 고종 승하 직후에 궁녀 2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일기는 원문이 영어다. 지문 관계상 첫째와 셋째 이유만 영어로 첨부한다.
1) The Emperor who enjoyed perfect health died inside of half an hour after he had taken the 식혜食醯 or sweet rice water, in violent contortion.
3) They found the tongue had actually disappeared while the teeth had all dropped out of their sockets.

명성明成황후 시해弑害 사건
이에 앞서 일제는 조선의 국모國母인 명성황후도 시해했다. 이때의 기록을 윤치호 영문 일기를 통해 살펴보자. 지면 관계상 한글만 싣는다.


 

<1895년(고종 32년, 을미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화요일>

그들은 세자비世子妃의 머리를 잡아채어 발로 차고 구타하고 질질 끌면서 왕후王后가 어디 있는지를 말하도록 강요했다. 대답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세자비를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은 군인들 사이로 던져 버렸다. 한 일본인이 세자世子의 머리를 잡아채고 발로 걷어찼다. 그사이에 100명에 이르는 궁녀宮女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왕후王后가 나타났다. 일본인 하나가 왕후를 붙잡아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왕후는 자신이 왕후가 아니라 먹을 것을 찾으러 들어왔을 뿐이라고 외쳤다. 자객들이 왕후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걷어찼다. 그러고 나서 암살자들은 그녀를 한 방으로 끌고 가서 홑이불로 그녀를 덮었다.

그러고 나서 왕후인지를 확인하고자 일본인 통역 스즈키鈴木가 궁을 가리키면서 한 상궁에게 말하기를 왕후가 그 방에 누워 있다고 말했다. 그 상궁은 방으로 들어갔고 유혈이 낭자한 광경에 충격을 받아 공포에 질려 달려나오면서, “오, 왕후께서 승하하셨다!”고 울부짖었다. 이 소리를 들은 암살자들은 달려들어가 왕후의 시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꽃밭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그들은 왕후의 시신을 내려놓고 불을 질렀다. 이 모든 얘기는 너무 공포스러워 상상하기도 어렵다.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왕후가 맞이한 그 비참한 운명에 충격을 받아 심신이 몹시 탈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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