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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을 보좌한 이십사장二十四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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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사장二十四將은 태원太原에서 군사를 일으킨 당국공 이연을 도와 당 왕조 건국에 일조하고, 현무문의 변에서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을 도와 그가 황제로 등극하는데 공을 세우고, 당태종의 정관성세를 연 24명의 공신을 말한다. 정관 17년인 643년 당태종 이세민은 이들을 표창하게 위해 장안에 있는 능연각凌煙閣에 당대 최고의 화가인 염립본閻立本(?-673)에게 이들의 초상을 그리게 한 것에서 유래한다. 능연각에 24인의 화상을 걸어둔 뒤 그는 자주 그곳에 가서 화상을 감상하면서 그들의 행적을 기념하고 찬양했다. 문헌에서는 이들을 ‘훈신이십사인勳臣二十四人’, ‘능연각공신 이십사인凌煙閣功臣 二十四人’이라고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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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은 확실히 정치적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데다 야심 또한 컸다. 그가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전투에 참전해 악전고투 속에 승리를 거둔 일이나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책략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 책사로 평가받는 방현령房玄齡의 도움이 컸다. 방현령은 18세 때 수나라에서 실시한 진사 시험에 급제한 인재로 당태종의 장자방으로 불렸다. 방현령은 개인적 품성도 뛰어났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이세민이 출정해 승리를 거둘 때마다 대다수 장수들은 재물을 모으기에 바빴으나, 방현령은 먼저 인재를 찾아 진왕 이세민의 막부로 데려갔고 그들은 제각기 죽을힘을 다해 이세민을 도왔다. 현무문의 변을 실질적으로 기획한 인물로, 주요 보직을 역임하며 이세민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이세민이 천책상장에 오르며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을 때, 인재를 끌어모으고 활용하였다. 이세민 휘하에는 이른바 18학사學士라 불리는 인재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이세민을 보위에 올리기 위한 정예 참모 집단이었다. 이들은 천하 대세의 흐름을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일을 했던 일종의 국정 자문단이었다. 이 중 방현령과 두여회는 지모와 지략이 뛰어났고, 육덕명陸德明과 공영달孔穎達은 경학에, 요사렴姚思廉은 문학과 시문에, 우세남虞世南은 구양순, 저수량과 함께 당나라 초기 서예의 3대가로 일컬어지며, 왕희지의 서법을 익혀 해서楷書에서는 일인자로 칭송받고 있다. 그 밖의 인물들도 다 뛰어난 준걸들이었으나, 단연 으뜸은 방현령이었다. 방현령의 지모와 두여회의 결단력으로 신생 당 제국은 안정과 번영에 큰 기여를 하여 ‘방모두단房謨杜斷이란 말을 만들었다. 30여 년간 군신으로 인연을 맺은 방현령은 20년간 안정적으로 재상의 직분을 수행하고 죽어서도 무한한 명예를 누렸다. 그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일찌감치 자발적으로 이세민에게 투항하였다. 둘째는 지극한 충성과 근면함이고, 셋째로는 대권을 손에 쥐고도 절대로 이세민이 위협을 느낄 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일을 잘 처리하면서도 이세민에게 충분한 자문 역할만 했을 뿐, 혼자서 어느 한 분야의 권력을 독점하지 않았다. 그런 그였기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장안에 남아 후방을 지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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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이 덕정을 편 데는 위징魏徵의 공이 컸다. 태평성세가 계속되자 신하들이 당태종을 찬양하는 중에서도 위징은 열 가지 결점을 지적했다(諫太宗十思疏). 자만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친인척이나 연공서열 등은 철저히 배제하고 유능한 인재 위주의 정사를 펼치게 하였다.

24장의 수장인 장손무기長孫無忌는 북위의 황족인 탁발씨 후손으로 수나라 우효위장군 장손성의 아들로, 이세민의 황후인 장손황후의 오빠이기도 했다. 그는 매제 당태종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보필하여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정관 10년(636) 여동생 장손황후가 죽으면서 오빠를 중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으나 이세민은 이를 좆지 않았다. 위징 사후 승상 겸 태위가 된 그는 고구려 침공에 나섰으나 대패하였고, 이후 당 고종 이치가 측천무후가 되는 당태종의 후궁 무씨를 황후로 맞아들일 때 반대하다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귀주로 유배를 가서 자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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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여회杜如晦는 대대로 북조와 수나라에서 벼슬을 한 관료 집안 출신으로 수나라 때 현위 벼슬을 한 후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이세민 휘하로 들어갔다. 이후 문학관 십팔학사의 일원이 되었다. 머리는 비록 방현령에 미치지 못했으나 결단력이 뛰어났다.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공평한 태도로 일관한 까닭에 위징과 더불어 현상賢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진숙보秦叔寶는 지금의 산둥성 제남시인 제주齊州 역성歷城 출신으로 용맹스럽고 절개가 굳었던 인물이다. 매번 선봉에 서서 용맹함을 드러냈다. 당고조 이연은 진숙보를 일컬어 처자식을 돌보지 않고 와서 공을 세운 인물로 자신의 살을 베어서 진숙보에게 내려 주어도 좋다고 했을 만큼 그의 공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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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적李(世)勣은 돌궐 격파에 공을 세웠고 고구려 침공에 종군했다. 결국 당고종 때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하는 공을 세웠다. 울지경덕蔚遲敬德은 창의 명수로 각종 전투에 참여해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으며, 현무문의 변에 참여했다. 이정李靖은 파촉 공략에 공을 세웠으며, 당태종과 역대 병법을 논한 『당리문대唐李問對(이위공 병법)』는 송나라 이래 무경 칠서의 하나로 선정돼 무인들의 필독서가 됐다. 굴동통屈突通은 수나라 장수였다가 포로가 되어 귀순해 전공을 세웠다. 후군집候君集은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토욕혼 토벌에 공을 세웠다. 소우蕭瑀는 남조 양나라 황실 후손으로 사리 판단과 인화에 뛰어나 재상을 지냈다. 고사렴高士廉은 명민한 데다 기억력이 좋았고, 촉 지방의 풍속을 바꾸고 학교를 부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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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節侯와 춘생추살春生秋殺


당태종의 24장은 24절기라는 시간적인 개념과 관련이 있다. 이는 후한 광무제를 도운 28장이 28방위라는 공간적인 개념과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에 대응된다. 이십사절후二十四節侯이십사기二十四氣이십사절二十四節이라고도 한다.

24절기는 옛사람들이 이룩한 지혜의 결정으로 그 의미는 심원하며 용도는 광범하여 우리의 모든 생활 방식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날씨와 기후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듯 예전 농업 생산이 더 중요하던 시대에는 더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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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節氣는 1년을 스물네 마디의 기후로 나눈 것이다. 기氣는 15일 간격으로 계절의 변화를 읽은 것이고, 이 15일을 다시 5일 간격으로 세 번 나눠 변화를 읽은 것을 후候라 한다. 24절기와 72후를 합쳐 기후氣候라 부른다.

황경黃經은 태양이 춘분점을 지나는 점을 기준으로 해서 황도에 따라 움직인 각도를 말한다. 황도는 지구에서 보았을 때 태양이 1년 동안 하늘을 한 바퀴 도는 길을 말한다. 이 황경은 15도를 간격으로 해서 0도일 때를 춘분, 15도일 때를 청명이라고 하는 식이다. 절기는 우주의 기운이 배치된 지도와 같아서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운과 기에 관여한다.

24절기의 구분은 계절과 기후 그리고 물후物候(만물의 기후 변화에 대한 반응) 등 자연 현상의 변화를 충분히 고려한 것이다. 그중 입춘, 입하, 입추, 입동, 춘분, 추분, 하지, 동지는 계절을 반영한다. 춘분, 추분, 하지, 동지는 천문학의 각도에서 구분하여 계절의 분기점이 되는 기절기基節氣로 음과 양의 관계가 크게 변화하는 마디이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은 사계절의 시작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소서, 대서, 처서, 소한, 대한 등의 다섯 절기는 기온의 변화를 반영하고 우수, 곡우, 소설, 대설 등은 비와 눈이 내리는 시간과 강도를 나타낸 것이다. 백로, 한로, 상강은 수증기의 응결과 승화 현상을 나타내면서 기온이 점차 하강하는 과정과 정도를 반영한다. 소만과 망종은 작물의 성숙과 수확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경칩과 청명은 자연의 물후 현상을 나타낸다.

절기는 바꿔 말하면 농부의 마음으로 만들어진 생명의 리듬이다. 절기에는 가을에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의 마음이 담겨 있다. 농부가 봄에 사생결단으로 해야 할 일은 씨앗 발아이다. 봄이 살리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죽이는 계절이다. 여름 동안 벌여 놓은 일들을 한 번에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한 번에 하나씩이라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으로 산만함을 포착하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것을 갈가리 찢어 버리는 결단력이 가을의 리듬과 하나가 되는 때다. 그래서 과거에는 봄여름 동안 미루어 둔 형벌을 가을에 대대적으로 몰아서 집행했다. 이제 더 이상 봐줄 수 없기에, 가을의 풍요롭고 넉넉한 이면에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숙살의 기운이 작용한다.

칠석, 백중, 추석과 같이 신명 나는 명절의 연속인가 싶지만, 다른 쪽에서는 가차 없이 범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범죄란 실정법을 어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을 무렵에 접어들면 지난 봄여름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게 대체로 판가름 난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눈물의 질과 밀도는 다르다. 한쪽은 수확으로 인한 기쁨의 눈물이지만, 다른 쪽에선 참회와 후회의 눈물이다. 자연의 흐름은 가차 없고 또한 지극히 공정하다. 가을은 바야흐로 숙살지기의 때다! 쌀쌀하고 매서운 기운으로 성장과 성숙을 모두 마치고 불필요해져 버린 가지와 잎을 모두 떨구는 자기 부정의 시간이며 열매를 거둬들일 시간이다.

후회가 막심해도, 자신이 맺은 열매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다 떠안아야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숙살의 숙肅이다. 가을의 숙살지기를 온몸으로 견디고 나면 나무든 사람이든 더욱 단단해진다. 그 힘으로 겨울을 살고 다시 봄을 열 수 있으리라. 나무에 매달린 열매가 여물지 못하면 땅에 떨어질 때 박살이 난다. 그렇기에 열매의 껍질은 단단하기 마련이다. 입추가 지난 후에 처서가 오듯이 숙熟한 후에야 숙肅할 수 있다. 가을의 성숙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태도가 엄숙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이때에 이르러 천지가 마침내 숙연해진다. 


 

당태종이 넘지 못한 산, 고구려 대장부
[주3]
연개소문(603년∼657년)

당태종의 유일한 맞수
천하를 제패하려는 당태종이 결국 넘지 못한 산이 있었다. 바로 동방의 종주국 고구려였다. 문무를 겸전하고 지략이 뛰어났던 명장 당태종의 유일한 맞수라 할 수 있는 이가 바로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임금을 시해한 무자비한 독재자이고, 고구려 멸망에 책임이 있다는 통설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그를 악인으로 만들려는 조직적 작업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를 다룬 거의 대부분의 사료는 중국 측 자료였다. 즉 고구려 측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에 그를 다룬 기록은 연개소문에게 무척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수록된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를 보면 연개소문은 본래 우리의 고유한 신교 문화의 상무尙武 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임을 알 수 있다. 603년 영양제 홍무 14년 5월 10일에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조의선인皁衣仙人

[주4]

이 되었다. 모습이 거대하고 위엄이 있으며 의기가 호방하고 초일한 자세가 있었고, 몸에는 다섯 개의 큰 칼을 차고 있었다.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고 한다. 또한 당대 최고의 병법가이기도 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의 이십사장 중 제1 명장인 이정이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웠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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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의 충돌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영류제榮留帝를 시해한 패륜아라는 굴레를 씌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 27세 영류제는 즉위 후 당과 친선 외교를 고수하였다. 물론 수나라와 대전을 겪은 뒤이기에 전략적으로 친선을 도모할 필요는 인정할 수 있지만, 당에게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강역도)를 바친 일(628년)이나, 당의 고구려 침입 때 당의 후방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세력인 돌궐 주력군이 당에 의해 격파되고, 힐리가칸이 사로잡혔을 때 수수방관한 부분은 굴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631년 대수對隋 전승기념탑인 경관京觀을 당의 요청에 의해 헐어 버렸기 때문에, 강력한 상무 정신을 가진 연개소문 같은 대당 강경파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던 중 642년 정월 영류제는 막리지인 연개소문에게 장성長城

[주5]

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했다.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는 군사와 정치를 총리總理하는 비상시국 최고 관직이다. 이런 위치에 있는 이를 한직으로 보냄으로써 대당 강경 세력을 무력화하려 했다. 이에 때를 보던 연개소문 일파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는 대당 굴욕 외교로 일관한 영류제와 그 세력에 대한 연개소문과 대당 강경파의 혁명 기의였다. 이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세력에 의한 혁명이었다. 즉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정치 세력이었다면, 영류제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포기하고 당 제국에 복속됨으로써 존속을 도모하는 정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연개소문은 정변 당시 임금을 시해하지 않았다. 변고를 전해 들은 영류제는 몰래 달아나 송양松壤에서 군사를 모으려고 했다. 송양은 현재 평안도 강동군 대박산으로 구을단군의 능이 있는 곳이며 고주몽 성제가 다물도多勿都로 삼은 곳이다. 하지만 영류제는 자신의 의도에 응하는 이가 없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대당전쟁의 총사령관
정변 후 연개소문은 보장제寶臧帝를 제위에 모셨다. 그는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하고 완성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성기자유成己自由),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는(개물평등開物平等) 나라를 만들었으며, 조의선인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펴지는 않았다. 당의 국교인 도교 수입을 자청하여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면서도 전술의 유연성을 택하는 정치가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보장제 개화 4년에 벌어진 국운을 건 당태종과의 전쟁을 총지휘하였고, 안시성 혈투를 지원하였으며, 조의들을 지휘하면 신출귀몰하게 전략을 구사하여 마침내 승리를 이끌어 냈다. 세계 최강대국 당이 전 국력을 기울여 쳐들어온 전쟁을 당당하게 승리로 이끌어 고구려를 구해 낸 용장이자 영웅인 것이다.

그 후
당태종 사후 고구려와 당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당은 수시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가 항시적인 전시 상태를 유지하게 하면서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고구려의 국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건만, 연개소문은 657년 10월 7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며 세상을 떠났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었다. 이후 660년 7월 백제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으로 구성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정세는 급변하였다.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에서 공격을 받게 된 고구려는 662년 정월 평양 인근의 사수蛇水 유역에서 당의 장수 방효태龐孝泰와 그 아들 열세 명을 포함한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기도 하였다. 백제가 망하고 고립된 상황에서도 당의 대군을 맞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 이겨 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공백은 국력 통합의 구심점이 공백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그의 아들과 동생의 권력 투쟁으로 변했다. 큰아들 남생은 동생들과 분쟁을 벌이다가 적국인 당에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당과 신라의 연합군은 668년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내분으로 인해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러한 역사 과정의 결과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그를 저주하고 두려워한 당唐의 기록만 남게 되었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당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나라가 망하느냐 존속하느냐 하는 비상시국에서 고구려의 자존을 지키며 존속을 이루어 낸 지도자였다. 이런 그를 단재 신채호는 우리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다.
 


 

북방의 강자 돌궐제국사

552년 몽골 초원에 새로운 패자가 등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돌궐突厥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들의 본명은 튀르크Türk이다. 앞서 초원을 지배한 유연柔然은 몽골어를 사용했지만, 이들은 투르크어를 사용했다. 오늘날 이 언어를 쓰는 사람은 서쪽으로는 터키에서 동쪽으로는 중국령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은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에 강력한 제국을 세웠다. 제국의 건국자는 토문土門으로 이는 투르크어 ‘만萬’을 뜻하는 투멘Tümen을 옮긴 말이다. 만호장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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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몽골족 국가로 알타이 지역에서 주로 야금 일에 종사하였다. 철광석을 제련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금속 가공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이들은 유연을 멸망시켰다. 건국자 토문이 죽자 아들 형제에 의해 둘로 나뉜다. ‘카간’이 된 장남 무한은 몽골 지역을 차지하여 동돌궐을 세웠고, ‘야브구’라는 칭호를 쓴 아우 이스테미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서돌궐을 세웠는데, 이로서 돌궐은 흉노에 비해 그 영역이 서쪽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서돌궐은 사산 왕조와 연합하여 헤프탈을 멸망시킨 뒤 아무다리야를 경계로 영토를 분할하였다. 주된 관심사는 막대한 중개 이익을 주는 비단 교역이었다. 경제적 이권 때문에 사산 왕조와는 대립 관계가 되었고, 돌궐은 더 서쪽인 비잔티움 제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돌궐의 건국 집단은 원래 투르판 부근에 살았는데, 유연을 격파한 뒤 중심지를 몽골 서부의 외튀켄 산지(오늘날의 항가이 지방)로 옮겼다. 카간은 한 지점에서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제국을 셋으로 분할하여 지배하였다. 과거 흉노가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동서에 좌우현왕을 두는 방식과 비슷하고,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와 유사하다.

당시 중국 북부에는 북제와 북주가 서로 대립하며 경쟁적으로 돌궐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고, 돌궐은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 권력의 약화와 분권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지배 집단 내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과 반목은 제국의 안정적 발전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618년 당唐이 건국될 시점에 동돌궐은 시필카간始畢可汗의 치세였다. 당시 ‘동쪽으로는 거란에서 서쪽으로는 토욕혼과 고창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들이 신속하며 활을 쏘는 자가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은 돌궐에 칭신하였고,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당태종은 돌궐을 상대로 이간책을 사용하였다. 돌궐은 내분 격화와 수년에 걸친 대설로 가축들이 폐사하는 자연재해를 입으며 급격히 쇠약해졌다. 이를 간파한 당태종은 630년 초 내몽골에 있던 근거지를 급습하여 힐리카간을 생포하여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반세기에 걸쳐 당 제국의 지배를 받던 돌궐은 6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682년 아사나阿史那씨 출신의 쿠틀룩이라는 인물이 거병하여 내몽골의 초가이 산지와 반半 사막 지대 카라쿰에 근거를 두고 흩어진 돌궐인을 모아 제국을 재건하였다. 제2 돌궐제국이었다. 하지만 752년 그 지배하에 있던 위구르Uyghur, 바스밀, 카를룩 세 부족의 반란으로 붕괴되었다. 돌궐의 후예들은 북방의 초원을 떠나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가즈나 왕조(975년~1187년)를 세우고, 11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워(1037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1299년에는 오스만 튀르크 왕조를 세우고 14세기 말에는 발칸 반도까지 장악하였다.

돌궐은 흉노와 몽골 사이를 잇는 초원의 패자로 만약 지배층의 내분과 자연재해 등이 없었다면, 몽골 제국의 역사는 돌궐 제국에서 먼저 시작되었을 것이다. 돌궐은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기 때문에 당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 먼저 돌궐을 복속시키려 했다. 고구려는 돌궐의 설연타薛延陀족과 동맹을 맺었고, 실제로 설연타는 1차 고구려 당나라 전쟁에서 장안을 급습하였다. 그 결과 안시성에서 발목이 잡힌 당태종은 서둘러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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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과 수성의 심법전수, 정관정요貞觀政要

당태종과 그를 보좌한 명신들의 대화로 구성된 책이 『정관정요貞觀政要』이다. 이 책은 주자가 사서四書를 엮기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는 정치의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이 책에는 공자의 덕치와 노자의 무위지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창업과 수성의 논리가 집약돼 있는데, 법가의 패도를 추종한 방현령이 창업을 강조하였다면, 유가의 왕도를 추종한 위징은 수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방현령은 옛날 짐을 따라 정천하定天下를 할 때 온갖 고초를 두루 맛보고 만 번 죽을 고비를 넘겨 간신히 살아온 까닭에 초창의 어려움을 보았고, 위징은 짐과 더불어 안천하安天下를 하면서 교만과 방종의 단서가 생겨나 필히 위망의 정황으로 나아갈까 염려하는 까닭에 수성의 어려움을 본 것이다. 지금 초창의 어려움은 이미 지나갔으니 앞으로 수성의 어려움은 응당 공들과 함께 신중히 대처해 나가도록 할 생각이다.”고 했다. (정관정요 군치론)

당태종 자신이 창업과 수성을 모두 경험했기에 이런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둘을 성공시킬 수 있는 핵심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늘 겸손한 자세로 스승과 친구를 곁에 두고 천하에 임하는 이른바 사우師友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태종처럼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자부심이 크다. 이는 자만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제왕의 자만심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늘 곁에서 충고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경륜이 높은 원로를 스승으로 모시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곁에 두어야 한다. 사우는 이런 스승 또는 친구 같은 신하를 뜻한다.

당태종은 재위 기간 연호를 정관 하나만 사용하였다. 정관은 주역 계사전 하 1장에 나오는 천지지도天地之道는 정관자야貞觀者也에서 따왔다. 이는 천지의 도는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천하 쟁패와 처참한 골육상쟁으로 옥좌에 올랐기에 바른 안목을 갖고 태평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정관정요』의 편찬자는 사관 오긍吳兢으로 천품이 강직하고 과묵하며 해박한 지식을 지녔고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책을 집필하면서 모든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을 고수하여, 당태종의 장점과 단점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최고통치권자인 제왕의 잘못된 행동은 백성뿐 아니라 나라의 존망에 큰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관정요』는 모두 10권 40편으로 되어 있다.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권 「군치론君治論」은 군주가 갖추어야 할 도리와 정치의 근본에 관해 논하고 있다. 제2권 「규간론規諫論」은 현량한 관원과 간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제3권 「감계론鑑戒論」은 군신이 지켜야 할 계율, 관원의 선발 등을 집중 거론하고 있다. 제4권 「태자론太子論」은 태자와 여러 왕을 경계하는 내용이 실려 있고, 제5권 「공덕론公德論」은 유가의 기본 덕목인 충효와 믿음, 공평 등을 다루고 있다. 제6권 「수신론修身論」은 절약과 겸양 등 수신제가 덕목을 심도 있게 논하고 있다. 제7권 「학예론學藝論」은 유학의 중요성과 문학 및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주문하고 있다. 제8권 「민생론民生論」은 내치의 요체인 민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농업과 형법, 부역, 세금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9권 「국방론國防論」은 외치의 핵심인 대외 원정과 변경 안정 등의 국방 문제를 깊이 다루고, 제10권 「군덕론君德論」은 군주의 순행과 사냥 등 군주가 명심해야 할 구체적인 덕목을 언급해 놓고 있다. 




<참고문헌>
『역주 환단고기』 (안경전, 상생출판, 2012)
『조선상고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
『당태종과 이십사장』 (이재석, 상생출판, 2010)
『인물지:제왕들의 인사 교과서』 (박찬철, 공원국, 위즈덤하우스, 2009)
『영웅의 역사 7 대제국의 황제 당태종 』(마루야마 마츠유키 지음, 윤소영 옮김, 솔출판사, 2000)
『정관정요, 부족함을 안다는 것』 (신동준, 위즈덤하우스, 2013)
『그 위대한 전쟁 1,2』 (이덕일, 김영사, 2007)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임용한, 교보문고, 2014)
『역사스페셜 6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쟁, 베일을 벗다』 (KBS 역사스페셜,효형출판, 2003)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김호동, 사계절, 2016)
『돌궐유목제국사』 (정재훈, 사계절, 2016)
『종횡무진 동양사』 (남경태, 그린비, 2013)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황원갑, 인디북, 2004)
『아틀라스 중국사』(박한제 등, 사계절 출판사, 2008)
『절기서당』 (김동철, 송혜경, 북드라망, 2013)
『변경辨經』 (렁청진, 김태성 역, 더난출판, 2003)
『한민족전쟁사』 (온창일, 지문당, 2001)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이덕일, 역사의 아침, 2007)
『연개소문을 생각한다』 (강준식, 아름다운 책, 2004)
『도올의 중국일기 4』 (김용옥, 통나무, 2015)

 

[주1]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동호 즉 퉁구스계에 속하는 선비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후한서』에는 선비와 오환을 모두 동호東胡, 즉 번조선의 후예라고 했다. 『위서』에서는 선비족의 발상지를 대선비산大鮮卑山(대흥안령 일대)으로 산 이름에서 족명을 취했다고 한다. 북흉노가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이동해 흉노의 본거지인 몽골 고원이 일시적인 공백 지대가 되자 패권을 다투던 여러 족속 중 선비족이 패권을 잡았다.
 

[주2]

견벽청야입보堅壁淸野入保 전략 - 전쟁 때 방어 측에서 사용하는 대표적 전술로 청야수성淸野守城이라고도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요새와 군량미, 주민들의 호응과 더불어 적의 보급로와 후방을 교란시킬 기병이 존재해야 했다. 이 점에서 고구려는 완벽한 전술을 구사했다.

청야전술은 적군의 손에 들어간다면 사용할 만한 모든 물자를 없애 버리며, 적의 보급을 어렵게 했다. 공격군에게는 전쟁을 해도 얻을 게 없다는 정신적 공황을 야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후유증이 있다. 적에게 넘길 모든 것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전후 피해가 막심해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이후 수당제국과의 연이은 전쟁에 청야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이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 졌다.
 

[주3]

대장부大丈夫 - 출처는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천하의 넓은 집(仁)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 천하의 대도(義)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여,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이 절개를 옮겨 놓지 못하며, 위무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음을 일러 대장부라 한다’.
 

[주4]

조의선인皁衣仙人- 조의는 삼신 상제님의 진리, 즉 한민족의 신교 낭가사상으로 무장한 종교적 무사 집단이다. 조의는 개인적인 완성이 아니라 공도公道와 국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도 같이 내던지는 살신성도殺身成道를 이상과 목적으로 삼는다. 평상시에는 삼신 상제님의 신교 진리를 터득하여 완전한 인격자의 길을 추구하고, 심신과 학문을 닦으며 무예를 연마하다가 유사시에는 항상 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국가의 위급을 구하였다. 조의의 계율은 참전계參佺戒로 충인의지예忠仁義智禮이다.
 

[주5]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방벽은 어느 한쪽이 뚫리면 그 기능을 상실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장성은 요동 지역에 있던 100여 개 고구려 성들의 협조 연락 체계와 방어망 정비로 봐야 할 것이다. 한 성이 함락되어도 다른 성들이 계속해서 협조하면서 방어진을 펼 수 있다.
 

[주6]

당 건국 초기 최대 왕위 쟁탈전인 ‘현무문의 변’ 때 이세민은 형 건성과 아우 원길 그리고 조카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아버지 이연을 강제로 왕위에서 몰아내고, 아우 원길의 아내(楊氏: 수양제의 둘째 딸)를 황비로 삼았다. 후에 문덕황후 장손씨가 죽자 양씨를 황후로 삼으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단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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